2024/5/22(수)역사단편50-조선사연구초2부, 《三國史記》에 바뀐 東西 兩字(2)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2 months ago (edited)

조선사연구초 2부에서 두 번째 절을 해석한다.

《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사기중 동서양자상환고증

《三國史記》에 西字가 東字로 바뀐 者가 많으니,

이를테면 溫祖王 二十三年에 마한왕이 溫祖(온조)를 責하여 가로되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 安之」라 한 바,
百濟가 馬韓의 西北인즉 馬韓이 割與(할여)한 百里地,
溫祖(온조)가 初據한 彌鄒城(미추성)·慰禮城 (위례성)等도 西北됨이 明白하니,
「東北一百里」는 「西北一百里」로 作함이 可하며,

해당조에 있는 기록을 읽어보면
24년( 05년 ) 가을 7월, 왕이 웅천熊川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당대에 알려진바로
백제는 마한의 서북에 있으니 할양받은 땅은
온조가 초기에 머물렀던 미추성과 위례성이 분명하니
'동북1백리'를 '서북1백리'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점검하고 넘어가야 하는 이슈가 있다.

  1. 마한의 위치
  2. 초기백제의 위치

사실 두 이슈에 대해선 여기서 문제삼지 않는다.
단재도 기존 사학계에서 주장하는대로 가정을 하고
본인의 논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이 온조에게 땅을 떼어주려면
본래 그곳을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
백제의 초기에 자리잡은 곳은 현재의 서울을 기준으로도
인천방향쪽이다. 그러니 서북방향이 맞다.
그런데 왜 '동북東北'이라고 적었을까?

계속 읽어보자.

온조왕 37년에 「漢水東北部落饑荒流入高句麗者 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이라 한 바,
浿水(패수)는 대동강이요, 帶水(대수)는 臨津江(임진강)이면
漢水(한수) 西北(서북)됨이 확연한즉,
漢水 西北 부락이 逃亡(도망)하여야 浿帶之間(패대지간)의 居人이 없으리니,
「漢水東北」은 「漢水西北」으로 作함이 可하며,

漢水東北部:한수동북부
饑荒(기황):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 것.
饑: 흉년(凶年)이 들다

백제 온조왕대의 기록부분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백제시조)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髙句麗者一千餘戸,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19)〕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들이 1천여 호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출처: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단재 기록에는 '流':옮겨가다, 떠돌다
삼국사기에는 '亡':달아나다, 없어지다
도망이나, 고구려로의 유입이라는 점에서 문맥은 일치하나
글자는 다르다.

강.JPG
(1)한수(=한강?) (2) 임진강 (3) 대동강

한강의 동북에 흉년이 들어 지역주민이 고구려로 달아났다!
즉 (1)번 지역에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배운대로 '한수'가 한강이라면,
한수의 동북쪽은 광진, 구리이고 멀리는 가평, 춘천이다.
대동강과 임진강의 사이가 비었다는 기록에는 조금
의문이 생긴다.
서북쪽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지리지에 「新城國之東北大鎭」(신성국지동북대진)이라 한 바,
新城(신성)은 高奴子(고노자)가 鮮卑(선비)를 막고
男建(남건)이 李勣(이적)을 막던 고구려의 西北要塞(서북요새)인 故로,
《新唐書》에도 「新城賊之西邊要鄙」(신성적지서변요비)라 함이니,
「東北大鎭」은 西北大鎭으로 作함이 可하다.

邊: 가 변, 변두리
賊:도적 적
鄙:더러울 비, 마을 비
鎭: 군사상 중요한 지역, 중국에서는 큰 도시-산
新城賊之西邊要鄙」(신성적지서변요비):신성은 도적의 서쪽중요지역이다.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西川王(서천왕:고구려 13대왕)편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7년(276) 여름 4월에
왕이 신성<신성은 나라 동북의 큰 진(鎭)이라고도 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의 기록과 대조하지 않으면,
"그냥 동쪽에 있는 큰 성이었다보다"라고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역사지리에 대해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以上의 모든 東(동)字는 西(서)字로 作함을 因(인)하여 나는
東有樂浪(동유낙랑)도 西有樂浪(서유낙랑)으로 作함이 可(가)하다 한다.

첫번째 '동유낙랑'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백제 온조왕과 고구려 서천왕의 기록을 토대로
'동'과 '서'를 바꿀 수 있다는 잠정결론을 내고 있다.

이두문명사해석법은 그런대로 가볍게 수용했는데,
방위를 나타내는 '동-서'가 기록상에 문제가 있다는
단재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언뜻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져볼때
단재의 지적이 정확하지 않은가.
단지, 걸리는 점 한가지는
삼국과 삼한의 당대 강역에 대한 명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전 포스팅에 있었던, 신라 나해니사금의 경우
당대에는 '압록강'을 구경도 하지 못했으니
맹세를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단재의 논리가 맞는것은

당시, 신라의 영토가 현재의 낙동강 이남이었다.
라는 교과서적 해설을 전제로 한다.

만일 신라의 강역이 '건륭제'의 주장대로
압록강 인근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의 도읍과 도시, 강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과 지금의 중공에게 양보할 수 있겠는가.
양보하자는 자들은
조상의 땅을 팔아먹는 '매국노'이자 '역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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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연구하는 그룹이 있나요?

사학계의 주류는 우리가 배웠던 국사교과서를 만든 학자들이지요. 대략 95%이상의 학자라고 보면 됩니다. 조선시대 유학자와 일제시대 이병도의 후예들이지요. 극소수의 '상고사연구'자들이 있는데 그들도 다시 온건(?)파와 극단적민족주의자로 나뉘어서 극단주의자들은 온건파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튜브에 보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서와 현지답사를 기반으로 역사를 다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문제는 국민들이 어려서 한반도사관에 오염된후에는 역사에 관심이 없고, 결정적인 힘을 가진 정치인이나 언론이 '한반도사관'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지요. 망상을 가져서도 안되고 남에나라 역사관에 오염되어서도 안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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