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5(수)역사단편247. 역사4, 부끄러운 역사기록

噫(희)라,
李勣(이적)과 蘇定方(소정방)이
麗·濟의 文獻(려-제의 문헌)을 掃蕩(소탕)하였다 하지만
그 史學界의 刧運(사학계의 겁운)이 어찌
金富軾(김부식)의 西京戰役(서경전역)의 結果에 及(급)하랴?
金富軾(김부식)이 花郞의 歷史(화랑의 역사)를 憎惡(증오)하였을 것인데,
何故(하고)로 『三國史記삼국사기』 中에 그 事實(사실)을 全削(전삭)치 않았는가?
金富軾(김부식)은 大槪(대개) 中國史를 尊重(중국사를 존중)히 여기는 者(자)라.
花郞의 事實(화랑의 사실)이
唐人(당인)의 『新羅國記신라국기』·『大中遺事대중유사』 等(등) 書에 記載(서에 기재)된 고로
金富軾(김부식)이 不得已(부득이) 몇 줄의 郞家典故(낭가전고)를 적어 줌이다.
郞家(낭가)에서 女敎師(여교사)를 源花(원화)라 하고
男敎師(남교사)를 花郞(화랑)이라 한 것이거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源花와 花郞(원화와 화랑)의 區別을 混同(구별을 혼동)하였으며,
「斯多含傳사다함전」에 斯多含(사다함)이
眞興王 二十六年(진흥왕26년)에 花郞(화랑)이 되었거늘,
本紀(본기)에 眞興王 二十七年(진흥왕 27년)에
源花·花郞이 始(원화,화랑이 시)하였다 하여
그 年代를 錯誤(연대를 착오)하였으며,
花郞(화랑)은 高句麗 皁衣仙人(고구려 조의선인)을 模倣한 者(모방한 자)거늘
그 來歷(내력)을 抹殺(말살)하였으니, 可惜(가석)한 일이 아닌가?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掃蕩(소탕): 모조리 없애버림
刧運(겁운): 재난, 불행
及(급): ~에 미치다
何故(하고): 무슨 까닭
全削(전삭): 전부 없애다.
大槪(대개): 일반적으로
典故(전고): 전례와 고사
來歷(내력): 이어져온 자취
抹殺(말살): 있는 사물을 뭉개 없애버림
可惜(가석): 몹시 안타까움

원화.JPG

사다함에 관련된 기록을 신라본기에서 확인하면,
진흥왕이 대가야를 정복할때 (23년:562년 ) 사다함이 공을 세웠는데
이때는 이미 화랑이었다.
단재가 지적한 始(시)는 진흥왕 37년의 기록에 있다.
글속의 연도에 오류가 있으나 내용은 틀리지 않다.

(옮기면)

안타까운 일이다,
이적과 소정방이 고구려-백제의 문헌을 없애버렸다고 하지만
그 사학계의 불행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전쟁의 결과에 미치겠는가?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증오하였을 것인데,
어떤 이유로 『삼국사기』 중에 그 사실을 모조리 삭제치 않았는가?
김부식은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사를 존중히 여기는 者라.
화랑에 대한 사실이 당나라 사람의
『신라국기』·『대중유사』등 책에 적혀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 어쩔 수 없이 몇 줄의 낭가에 대한 전례와 고사를 적어준 것이다.
낭가에서 여교사를 원화源花라 하고
남교사를 화랑花郞이라 한 것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원화와 화랑의 구별을 혼동하였으며,
「사다함전」에서 사다함이
진흥왕26년에 화랑이 되었거늘,
신라본기에서는 진흥왕 27년에
원화, 화랑이 시작하였다 하여
그 연대를 착오하였으며,
화랑은 고구려 조의선인을 모방한 者자거늘
그 이어져 내려온 자취를 없애버렸으니,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Coin Marketplace

STEEM 0.25
TRX 0.24
JST 0.040
BTC 103447.46
ETH 3313.50
SBD 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