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픈 나날에는 브라키오사우르스를

in #essay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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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에는 "실프다"라는 단어가 있다. 종종 '싫다'나 '슬프다'로 해석되고는 하는데, 도민이 자주 쓰는 상황을 빌려 그나마 정확히 접근해본다면 "해야 하기는 하는데 귀찮다"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미룰 데까지는 다 미뤄버려 오늘 꼭 하기는 해야 하는데, 도무지 할 힘이 나지 않아 빈둥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에 우리는 "아, 실퍼 죽겠다!"라고 소리친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고 나는 계속 실픈 나날을 보냈다. 월급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한참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면서 드문드문 놓인 할 일을 미루느라 하루가 다 갔다. 초반만 하더라도 과외는 일주일 전, 강의는 이주일 전에 준비했으면서 오늘은 오늘 저녁에 할 강의를 아침에 준비하는 경지에 올랐다. 마침 폭우까지 세차게 내리니 강의도 가기 귀찮다고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편하게 원격으로 수업을 하고 싶지만 이미 대면 강의로 수강료를 받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은 다 해버렸다. 과거의 현요아를 미워하며 오늘의 현요아는 꺼내 뒀던 새 와이드 팬츠를 도로 옷장에 접어놓고 반바지를 입어야 한다.

이제껏 자존감이 낮은 세월을 보내서인지 최근의 나는 자존감이 아주 높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하늘을 뚫을 만큼 높다. 그래서인지 에세이 공모전에 떨어지거나 투고를 실패할 때, 잘 될 줄 알았던 동화가 번번이 지면에 오르지 못할 때면 못마땅한 습관으로 대처한다. 내가 놓고 나온 자리에 들어간 이가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기업의 안 좋은 평점을 보며 안도하거나, 내가 받지 못한 대상을 수상한 사람의 글을 읽으며 나보다 못 썼다며 툴툴대고 심사위원의 시각은 나와 맞지 않다고 단념하는 습관이다.

자연스레 검색창은 심사위원의 정보와 이름, 대상의 글, 기업의 악평으로 채워졌다. 푹 자고 난 아침의 나는 부정적인 어휘로 가득한 검색 기록을 보며 경악했다. 다름 아닌 오늘의 일이다. 제일 기피하는 사람을 고르자면 과거에만 얽매여 사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선망과 동경을 미움과 질투라는 감정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직 내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에서 잘 나가는 이를 볼 때면 '나도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어'라 생각하고, 내가 잘하는 분야에서 대단한 평을 받는 이들의 책은 질투심에 구태여 도서관까지 가서 빌려 읽었다. 인세라고 해봤자 별로 되지 않는 걸 직접 겪어 알면서도 나는 열등감에 찌들어 그들의 면모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 좋은 점은 안 좋게 보았고 안 좋은 점은 극대화해 받아들였다.

고등학생 때는 질투심과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바꾸어 나아갔는데, 이제는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저 미워하는 일에만 머물렀으니 과연 나는 내가 완벽히 기피하는 사람이었다. 내 글은 솔직함이 가장 큰 무기라는 얘기를 몇 번 들어서인지 나보다 더 솔직하고 담담하게 쓴 글을 만나면 이번 글만 그런 거지, 다음 글은 엉망일 거라며 치부했다. (와,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발행을 해도 되는지 좀 두렵다). 이렇게 매일 자기 합리화를 한 덕분에 떨어져도 예전만큼 좌절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내 마음은 검은 얼룩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훌륭한 작품임에도 사 두고 며칠을 표지만 보며 울적해했으니 과연 내 상황이 어땠는지 상상할 만하다.

오늘, 단점으로 시작하는 검색 기록을 모두 지웠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 되자 다짐했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허울뿐인 결심이었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내가 동경한 상황을 겪은 이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대인은 되지 못해도, 안 좋은 점을 구태여 찾아 마음속으로 깎아내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나는 실프다고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열과 성을 다하는 이를 운 때문에 그 자리에 올랐다 비판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제까지 현대인을 경쟁자로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나아가는 지점을 미워하고 가만히 있는 나를 자조하며 스스로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 놓아버린 게 아니려나. 나는 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조언이나 충고를 위해 쓴 게 아니라, 당장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서다. 제가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온 마음 담아 축하하지는 못하더라도 구태여 안 좋은 점을 찾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거예요. 자꾸 질투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톨스토이나 헤르만 헤세와 같은 대작가를 질투하며 현대인을 한 편으로 만들려고요. 그러면 나아가는 이들이 모두 내 편이라는 생각에 긍정을 얻어 조금 덜 실퍼질 것 같습니다. 이 단계를 통과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제 편으로 만들고…… 그 다음은 브라키오사우르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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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티라노사우르스를..

ㅋㅋㅋㅋㅋ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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