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애들은 순수하고 순박할 거야, 라 생각하는 사람

in #book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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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애들은 순수하고 순박할 거야, 라 생각하는 사람

「쟤 뭐랜?」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2021

시골 애들은 순수하고 순박할 거야, 라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다. 미디어에 비친 시골은 늘 정겨운 풍경이어서인지, 시골 아이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잠자리채를 들고 나무 타는 모습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내가 겪은 시골 친구들은 조금, 아니 아주 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짝사랑에 가슴앓이하던 반 아이가 드디어 고백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위 잘나가는 친구라 성공하나 싶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담배였다. 흡연자는 싫다는 답을 듣자마자 반 아이는 담뱃갑을 꺼내 지르밟았다.

"됀?" *됐지?

둘이 사귀었는지 안 사귀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애가 꽤 오래 사랑꾼으로 불린 기억이 난다. 소문을 들은 나는 어떻게 열세 살이 담배를 피울 수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그 애뿐이겠냐며 흡연하는 친구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담배는 도대체 어디서 구하냐고 묻자, 중학교 선배가 공급책이라고 했다. 제주도의 모든 학교가 이런 상황은 아니었겠으나 우리 학교는 그랬다. 학교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어서 학부모는 자식을 중학교부터 잘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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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은 초등학생 몇 명을 고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름하여 '의제'. 의리로 맺어진 형제라는 뜻이다. 어려 보이는 초등학생이 담배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의제 덕분이다. 초등학생은 중학생과, 중학생은 고등학생과 의제를 맺었으니까. 선배는 잘생기거나 예쁜 아이 혹은 잘나가는 다른 선배의 친동생을 찜했다.

반강제적으로 의제가 된 후배는 선배에게 비싼 화장품이나 게임 아이템을 바쳤다. 선배는 선물을 발판 삼아 후배에게 권력을 주었다. 내가 아끼는 아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무도 그 후배를 건드리지 않았다. 선배의 권력을 빌릴수록 자기 위상도 높아지는 착각에 빠지기 쉬웠으니, '조공'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급속도로 커졌다.

권력의 맛을 본 친구는 선배에게 더 비싼 물건을 바치고 더 큰 사랑으로 돌려받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 좋게 말하면 빌리는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돈을 뜯는 것이다. 전국에 색깔 패딩이 유행하던 때니 제주도가 아니라도 많은 아이가 돈을 뺏겼으리라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조공과 의제 악습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자, 선생님들이 전면에 나섰다.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가해자를 잡고자 익명으로 조사했고, 쉬는 시간에도 학교 주변을 돌아다녔다. 꼭대기 중 한 명이 잡히면, 뒷골목에서는 선배를 일러바친 후배를 잡기 위해 난리가 났다. 애꿎은 돈만 뜯긴 반 아이 1을 담당한 나까지 무서웠으니 과연 살벌한 분위기였다.

집 근처에 있는 대학의 간호학과에서는 후배들이 돈을 모아 졸업생 선배에게 금반지를 선물한다고 했다. 매번 바뀌는 금 시세와 졸업하는 선배 수에 따라 반지를 주문할 테니 너희는 돈을 내라는 식이었다. 초등학교가 이 모양인데, 대학교에 가서도 그래야 한다니 제주도의 조공 악습은 도대체 언제 끝나나 싶었다(그 대학교의 금반지 조공 사건은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터졌다).

당시 조공을 요구하는 선배들이 쓰는 사투리는 아이들을 겁주기 딱 좋은 도구였다. 안 그래도 억세기로 유명한 제주도 사투리를 무서운 상황에서 듣자니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제주 사투리를 해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말하면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하니 하고 싶지 않은데, 괜히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억지로 사투리를 뱉는다(제주도민에게 사투리 해보라고 하지 말자).

웃음거리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유독 딱 하나의 말은 피하는데, 바로 "뭐랜?"이다. 표준어로 바꾸면 "도대체 뭐라는 거야?"와 가깝다. "쟤 뭐랜?"은 주로 상대를 앞에 두고 친구에게 물어보는 상황에 쓰인다. 기분 나쁜 게 당연하다. 네가 뭐라고 해도 안 들린다는 얘기니까. "너 뭐 믿고 겅 나대맨?"도 있는데…….

이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왜 제주 사투리를 싫어했는지 기억났다. 좋은 뜻보다 안 좋은 뜻의 사투리를 많이 들어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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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서 전학 온 친구가 내게 잠깐 사투리 과외를 받았다. 친구들과 잘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놀림받지 않기 위해서가 더 컸다. 제주 사람은 진영을 "진영이"라 부르지만, 서울 사람은 "진영아"라 불렀다. 전학생은 서울말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예쁜 척 좀 그만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제주 사투리는 이렇게 해석됐다. 왜곡된 결속력을 키우는 무엇. 타인을 배척하려는 의도로 사용되기도 하는 언어.

단순히 사투리로 편을 가르는 건 아니다. 지역별로도 그랬다. 표선 사람은 남원 사람과 달랐고, 광령 사람은 외도 사람과 달랐다. 제주 안에서도 주민을 나누는데, 육지 사람은 어련할까.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 묘한 적대심을 갖는 건 비단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온 선생님이 있었는데,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의 교육과정을 마친 토박이 선생님은 그 선생님이 없는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말했다.

"서울 나와도 다 필요 없저, 어차피 제주 오는 마당."

나는 그게 열등감이라는 걸 안다. 자신의 학생만큼은 한 명이라도 더 육지로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므로.

어떤 선생님이 어떤 선생님과 친하고, 어떤 선생님을 싫어하는지는 급식실만 가도 충분히 확인됐다. 저 멀리 떨어져 홀로 밥 먹는 선생님이 한둘은 꼭 있었다. 중학생 떄나 심하던 왕따가 아직 있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주 토박이가 봐도 제주도민의 텃세는 심했다. 그건 마치 상대방을 앞에 두고 "쟤 뭐랜?"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처럼 보였다.

어릴 적부터 좁은 지역에서 긴밀한 관계를 일삼고, 최대한 공통점을 찾은 뒤 나머지 사람들은 과감히 배척하는 제주. 사투리를 쓰면 물건을 사더라도 할인되고, 식당에 가더라도 도민이 친절함을 베푼다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이 진짜라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최근 제주 한 달 살이 열풍이 끝나간다는 기사를 읽다가, 제주는 섬이라 그런지 텃세가 너무 심해 나와버렸다는 육지 사람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차올랐다.

후배님, 저도 그래서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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