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8(금)말이 되는 역사5. 요수3 '요양遼陽'
지난 글에서는
고대사를 밝혀줄 힌트중 하나인
'요遼'가 들어간 지명
'요산遼山'의 남쪽이거나,
'요수遼(潦)水'의 북쪽에 있는 지명을 언급했다.
지도 중앙에 '요주遼州'가 보인다.
'요遼'라는 이름을 붙인 행정구역중 가장 큰 것이다.
동쪽으로, '기산箕山'이 보인다.
고대사의 또 다른 수수께끼중 하나인
'기자箕子'의 그 '기箕'다.
'요주遼州'의 북쪽에
'장성진長城镇'이 있다.
'장성長城'이 있는 또는
시작이나 끝지점에 있는마을이다.
이 지도가 명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니
산서성의 내륙쪽은 이미 전략적비중이 약화되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과거지명은
'진镇'으로 격하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요주遼州'로 표기된 곳보다
바로 북쪽에 있는
'요양현遼陽县'을 살펴본다.
기록을 보자.
《여지광기(輿地廣記)》 권18 하 요주遼州 하,
요산현遼山縣은 "본래 녈씨涅氏현 지역이다.
한나라 시대에는 상당군에 속했고,
진晉나라 시대에는 요양현遼陽縣에 속했으며, 낙평군에 속했다.
북위 시대에는 '요양遼陽' 이라 불렀다.
북제 시대에 폐지되었다.
수나라 개황 10년(590년)에 다시 설치하고 '요산(현)遼山'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름과 행정구역이 계속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涅(열,녈)'은 '개흙, 진흙, 검은물'의 뜻이다.
해당 지역의 토양이 물이 많아 질다는 의미다.
기원전인 한나라 시대에 이름을 붙일때
지역의 특징을 가지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원화지(元和志)》에 따르면
"수나라 개황 16년에 '요양轑阳' 옛 성에 요산현을 설치하고
병주并州에 속하게 하였으니, 지금의 주 치소이다."
'요양轑阳' 과 '요양遼陽' 이 다르다.
다른장소 아닌가?
우리가 한문을 상형문자라고 알고있지만,
그것은 글자 하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고
기록을 할때는,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거나
뜻이 통하면 아무글자나 가져다 썼다.
成吉思汗[성길사한]즉 '징기스칸'이 그 예다.
《원화지(元和志)》의 기록에 따르면,
요양현이 '요주遼州'가 아니라 병주에 속했다.
수나라 당시에는 '병주并州'가
현재의 좌권현 '요양진'에 있었다는 해설이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연결하면
한나라(BC202~AD220)때는 상당군
사마씨의 진晉나라(266~420)때는 낙평군
북위(386~535)
그리고 수나라 개황 10년(590년)에는 '병주并州'
《수서》 권30 《지》 제25 지리 중 기주冀州 태원군 요산辽山
"기요수萁轑水가 있다."
'기요수萁轑水'가 있단다.
'기萁' 는 '기箕'다
'요수萁轑水'는 곧 '요수遼(潦)水'임을 알 수 있다.
이후의 변화를 살펴본다.
《구당서(舊唐書)》 권39 《지》 제19 지리 2 하동도河东道 3 요주遼州
에 따르면 "수나라 태원군太原郡의 요산현이다.
무덕 3년(620년)에 병주에서 낙평, 화순, 평성, 석애 4개 현을 나누어
'요주遼州'를 설치하고 치소를 낙평에 두었다. 그해 의흥현을 설치했다.
6년(623년)에 치소를 낙평에서 '요산辽山'으로 옮겼다.
구당서의 내용에 따르면,
하동도: 황하의 동쪽(=산서성경내)에 속했다.
수나라때 '요산현遼山縣(=요양현)이 태원군에 속했다고 했는데
수나라때 태원군은 '기주冀州'였다.
그리고,
당나라 무덕6년(623년)에 와서는
'요산현遼山縣(=요양현)'이 '요주遼州'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늘 살펴본 내용에는
'태원, 병주, 요주,기요수萁轑水' 등 다양한 내용이 나왔다.
원화군현지의 세부내용은 아래와 같다.
후위後魏(=북위) 명제는 '요양尞陽'을 '요양遼陽'으로 개칭했으며,
수隋나라 개황開皇(581~600) 16년에는
요양의 옛 성에 요산현(遼山縣)을 설치하여 병주并州에 속하도록 했다. 이는 현재의 주 치소와 같다.
당(唐)나라 무덕(武德) 3년에는 이곳에 요주遼州를 설치했으며,
8년에는 기주箕州로 개칭했는데 이는 요산현 지역의 '기산箕山'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선천(先天:712~713) 원년에는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이름과 같은 발음을 피해 '의주儀州'로 개칭했다.
이것은 주州 동쪽에 있는 의령儀嶺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당나라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