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4)
(二) 아군의 방어작전 및 그 실시의 개요
(1) 아군의 병력배치
아 육군의 38선 경비를 위한 평시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즉 제1선으로 강릉 주문진 지구에 제8사단(사단사령부 강릉)
춘천 원주지구에 제6사단(사단사령부 원주)
동두천지구에 제7사단(사단사령부 의정부)
개성지구에 제1사단(사단사령부 수색)
서울지구에 수도경비사령부(경비사령부 서울)
옹진지구에 육군 직할 제17연대(연대본부 옹진)
이며 그 부대 배치 현황은 부도 제3과 같은 바 이와 같은 전선 배치에 대하여 제2선 예비 병력으로서는
중부지구에 제2사단(사단사령부 대전)
영남지구에 제3사단(사단사령부 대구)
호남지구에 제5사단(사단사령부 광주)
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전투 병력 약 80,000명과 기타를 포함하여 총병력 약 97,000명이었다.
(2) 38선 방어에 대한 아군의 견해
전술한 바와 같이 아 육군 수뇌부의 적정에 대한 파악은 다소 과소 평가되었으나 비교적 정확하였다. 또한 적의 침공을 예상하는 경우에도 아군은 그 성격이 피아를 막론하고 통일이라는 목표 아래 전면적인 영토 회복을 기하는 결전의 양태를 정하게 될 것도 잘 지실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 국방의 중책을 진 3군에 있어 작전상 가장 긴요하게 요청된 것은 아 국군의 병력 및 장비를 북한괴뢰군의 그것보다 우월하거나 적어도 대등하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단기 4283년 1월 25일부 한국통신에 의하면 동월 24일 신 국방장관은 내외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실지 회복 방침에 대한 기자 질문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실지 회복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음으로 다만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라고 아 국방력을 과대 선전하였던 것인데 단기 4283년 5월 10일에도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즉 『우리에 대한 공격이 있을 시 이북에 대한 행동을 언제든지 개시할 수 있다. (중략) 현재 우리 해군은 일조 유사시에는 동서 이북에 대한 하고 싶은 행동을 어디까지든지 할 수 있는 힘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국방장관의 이와 같은 담화에도 불구하고 육군수뇌부가 적의 침공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만은 솔직한 실정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의 조속한 도래 없이는 38선 방어에 대한 충분한 자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당시 육군 수뇌부의 공통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당시 주한 미군사고문단은 북한괴뢰군의 실력을 아군 수뇌부들 보다 약간 적게 평가하였고 위기의 절박에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괴뢰군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한국군은 그에 대항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거듭 표명하였던 것이다. (주 전기 부록 제1 국련한위보고서 참조)
(3) 방어계획
개전 직전 아 육군은 전선 각 사단에 대하여 적 남침시의 방어계획을 수립케 하였을 뿐이고 육군 제반을 통한 방어계획은 성문상으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다만 육군참모학교에서 연구되고 논의된 바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사단 제7사단 및 제6사단은 전기 각 사단 방어계획에 의한 주저항선을 연결 유지하고 점차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지연작전을 전개하며 옹진 제17연대와 강릉 제8사단은 초기작전에 있어 유격대로서 사용된다. 상황에 따라 제8사단은 수도 서울 방어의 원형 진지선의 최우익 일선부대로나 혹은 육군 예비대로서 사용되고 수도사단 및 잔여 3개 사단은 육군 예비대로서 공세이전 혹은 반격 시기에 사용된다.
상기 육군 방어계획 안은 참모학교에서 개전 직전에 실시된 고급 간부 집합 교육시의 일개 강의에 불과한 것이고 육군의 계획으로서 예하 전군에 하달된 바 없으며 또한 그 세부가 육군본부에 의하여 연구된 바도 없었다. 전선 각 사단 및 17연대에 의하여 계획되고 육군본부에 제출된 각기 방어계획을 일별(一瞥: 한번 힐끗 봄)하면 다음과 같다.
가. 옹진지구 제17연대
57㎞에 달하는 옹진지구 38선을 방어함에 있어 제17연대는 오남으로부터 수대산에 제3대대를, 서부지구인 비파리~윤산고지선에 제1대대를 배치하고 제2대대는 예비대로서 연대본부에 잔치하였다. 기 외 105밀리 유탄포 1개 대대와 대전차포 1개 중대가 연대본부에 배속되어 있었으니 우선 아군은 일부 예비 병력을 동부지구에 증파하여 학산지대를 확보함으로써 강령을 장악하여 최악의 경우에는 부포를 확보하여 해상으로부터의 구원 병력의 도착을 기하여 적을 구축하려 하였다.
나. 개성방면 제1사단의 방어계획
(ㄱ) 개요
사단 방어정면의 지형적 조건이 불리하므로 연백 부근에는 경계부대 정도를 배치하여 적정수집에 임하고 적 침입시는 백석포로부터 시급히 문산 부근에 철수시킬 계획이었다. (해군주정을 요청하여 상비함)개성부근은 상황에 의하여 예성강 철교를 절단하는 동시에 남하하는 적을 최대한으로 저지하는 한편 장단 예비 방어선에서 제12연대는 임진강 이서 부근 부대와 합류하여 저지를 계획하였으며 만약 상화이 시급할 시는 운봉산에 집결 및 즉시 영정포에서 선박으로 문산 부근에 상륙 제13연대 주력과 합류하여 사단 주저항선을 확보케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제13연대는 고랑포 부근 진지에서 적의 침공을 적극 저지하여 임진강 이서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여 지원부대(사단 포병대 및 응원부대)의 내원을 받아 파주 부근 주저항선에서 진전 격멸을 계획하였다.
(ㄴ) 병력배치
사단사령부 수색
제11연대본부(예비대) 개성남방 수색
제12연대본부 개성남방 강릉(康陵)
제13연대본부 문산
(ㄷ) 방어진지
아군은 적의 주공을 고랑포 부근으로 예측하고 38산 일대의 지형적 제 애로를 극복하고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자 파주 일대에 1개월여간 공병대와 서울 학생대를 연일 1000명 이상 동원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개성 연백 부근은 광정면이므로 분산적으로 요지를 점령하고 이선 혹은 삼선으로 엄체와 교통호를 구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