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 제2장 요약 (上) : 신체, 역사, (초)민족, 그리고 서사

in #wuxia4 years ago (edited)

무술연구 제2장 요약 (上)
: 신체, 역사, (초)민족, 그리고 서사

신체를 써내려가기

Wacquant는 신체(the body)를 써나감에 있어 우리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점검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신체에 대해 제대로 쓰기 어렵다는 점은 여러 학문 영역(field)에서도 지적되는 바이다. 문제의 핵심은 살아있는 감각적 경험을 학술적 지식으로 바꿔내는 것이다. 이 문제는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이미 신체를 써나감에 있어 몇 가지 개념이나 전통이 있긴 하다. ‘실천(practices)’에 대해 스피박은 “개념-은유(concept-metaphors)”를 제시하였다. 기술을 배우고 체화하여 실천하는 것은, 비유나 이미지 등으로 가득 찬 담론들에 연루된다는 것이다.

(번역자: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실천이, 담론에 든 개념을 은유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일례로 태극권의 실천들은 어떤 감각에 대한 비유로 가득 차있다. “맨 땅에서 헤엄치듯 움직여야 한다.”

학문적 담론의 언어는 무술에서 사용하는 비유나 은유들의 언어와는 다르며, 달라야한다. 또한 분과학문마다도 그 언어(질문이나 가치)가 마냥 동일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술연구는 어떤 언어로 쓰여야 하는가?” 태극권에 대해 논하며 이야기해보자.

역사와 이데올로기

요하네스 파비안(Johannes Fabian)은 변색주의(allochronism)라는 개념을 통해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해 일종의 판타지를 투사하며, 어떤 영구적인 특징이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을 지적했다. 서구인들은 흔히 아마존의 부족들을 ‘원시적’인 것으로 본다. 이런 시선은 부족들을 처음 접촉했을 때 찍은 사진들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부족들은 이미 그 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허나 사진들은 여전히 남아 ‘원시적’이라는 이미지를 수십 년간 재생산했다.

변색주의는 일종의 본질주의(essentialism)로, 한 민족 집단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상정하는 사고이다. 이 본질주의는 오리엔탈리즘과 연관되어, 집단의 어떤 순수성(ex.순수한 중국 문화)을 지향하게 한다.

이런 지점들에 대해 레이 초우(Rey Chow)는 한 가지 중요한 지적을 한다. 순수성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토착민(native)이, 서구인 등에게 불순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초우는 이러한 인종적 변색주의가 학술 담론에도 영향을 미침을 지적했다. 인종적 학술 담론에 있어 대상들은 특정한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기를 기대 받는다. 초우는 “강압적인 모방주의(coercive mimeticism)”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종적이거나 젠더적인 대상에게 어떠한 생각이나 행위를 강요하는 어떤 힘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상의 개념들은 무술연구에서도 주의해야할 바이다.

태극권의 경우, 더글라스 와일(Douglas Wile)이 지적하듯, 종래 연구 중 많은 부분이 태극권의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무시한 채 그 기예 자체와 몇몇의 대가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왔다. 이렇게 단순화된 ‘신화’에는 변색주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자기-오리엔탈리즘의 문제가 들어있다. 중국무술은 ‘고대 중국’이란 개념 아래 스스로 고대까지 거슬러갈 수 있는 계보도를 쌓아 자신을 정당화시켰다. 허나 대다수의 고전적인 태극권 저작은 19세기 밖에 되지 않는다. 주요 인물인 양로선(杨露禅)과 무우양(武禹襄) 해도 다윈이나 마르크스와 동시대 사람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와일(Wile)은 태극권의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면을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태극권의 유명인물들이 무술을 학습한 이유와 창시한 이유를 알고자 한다.

와일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태극권의 고전들을 우리가 아는 태극권의 현재와 비교하며, 태극권이 어떤 순수한 것이 아니라 19세기를 걸쳐 변화된 것임을 살핀다. 와일에 따르면, 19세기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 지식이란 위협에 맞서, 도교적인 원리를 내장한 태극권을 중국적인 무언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와일은 계보학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근대적인 태극권의 ‘조상들’을 탐색한다. 그는 태극권과 운용원리가 상이한 특징-느림, 감각성, 유연 등의 면에서-을 가진 여러 내가권(內家拳)을 탐색하며, 태극권으로 내려오는 근대 이전의 계보를 탐색한다. 허나 이 계보와는 별개로, 와일은 일단 근대 중국 때 태극권이 구성되어 ‘본질적인 중국’을 형상화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서구 근대성의 침입 아래 태극권은 ‘국가의 부활’ 개념과 연결되었다. 와일은 태극권을 ‘순수하게 중국적인 가치와 세계관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려는 시도’로 이해해주길 요청한다. 근대 당시 중국의 정치적인 공간이 붕괴한 시점에서, 태극권은 협소하게나마 수련자의 몸을 통해 나름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와일에 따르면 서양 지배의 기호 구조는 본질화 된 중국성 담론을 여성성에 등치시켰다. 이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중국을 서양의 남성성에 대치하는 여성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아주 작은 기호학적 여지 –예를 들면 태극권-을 남겨 놓는 일이었다. 서양의 진보와 기술에 대비하여, 중국은 ‘자연’ 같은 방어적이고 노스탤지어 적인 대응을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와일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럽의 낭만주의와, 19세기 중국 태극권 운동과 기묘한 평행을 이룬다고 지적했다. 유럽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신체를 지지”했는데, 이는 태극권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둘 다 ‘서구화를 거부하며 어떤 문화적 뿌리로 철수하는 복고적 반응’이다. 단지 낭만주의는 그리스 신화에, 태극권은 도교에 기원을 뒀을 뿐이다.

이런 ‘토착주의(nativism, 원주민 문화 보호주의)’들은 20세기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대비하는 어떤 치유 효과로 볼 수 있다. 태극권 담론을 통해 발현되는 ‘중국인 됨’에 대한 강력한 감각은, 민족(nation)과 관련된 전통을 만들어내며(홉스봄) 그 자체로 한 개인이 민족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앤더슨).

다시 말해 무술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 감각을 강화하며, 때문에 근대국가 건설에 연루되어있다. 물론 이러한 논리를 통해 태극권이 “단순히” 민족주의적이며 오리엔탈적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와일이 지적했듯, (태극권을 통해) 민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근대성을 썩 원만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서구에서의 태극권이 근대성 안에서 어떤 외국의 실천을 끌어안은 것이라면, 19세기 중국은 근대성에서 뒷걸음질 쳐 민족적 뿌리로 되돌아간 것이다. 다만 둘 다 기본적으로는 근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와일의 지적은, ‘서구 불교’나 ‘서구 도교’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바를 떠오르게 한다. 지젝은 이러한 경향이 근대 자본주의와 전혀 싸우지 않은 채, 스스로를 비정치적으로 여기면서도 부정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게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와일의 지적이 적어도 여기서는, 지젝보다 더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태극권은 20세기 후반에 있어 ‘중국인 됨’을 개발하여 중국을 달성하는 프로젝트의 일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태극권을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중국 대륙에서 20세기 초 근대화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자, 일정 부분은 마오이즘에 빚지고 있다. 마오이즘은 그 집단성, 비 서구성, 비 스포츠성 등을 이유로 태극권을 선택하여, 사회주의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키게 했다. 여기서 기공(氣功)이라는 다소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실천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재구성되었다. 태극권의 기공은 종종 면면히 내려온 중국의 전통을 보여준다고 이야기된다.

허나 데이비드 팔머(Daivid Palmer)에 따르면 기공 개념 자체는 분명 역사적이긴 해도, 우리가 아는 기공 개념은 1949년 중국정부가 그 이름을 정착시키고 민족주의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민국 이전에도 기공에 해당하는 여러 동작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동작들을 모아 기공이라는 카테고리 아래 체계화 시킨 것은 분명 신중국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동작들은 다양한 기관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수련되었는데, 이것들이 1949년 이후에는 중국적인 호흡, 명상, 체조 기술로 이해되었다.

팔머에 따르자면, 기공(氣功)이라는 이름의 선택도, 1949년 당 간부들에 의해 진행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를 반영한다. 기공은 봉건적인 중국의 신체 기술을 근대국가에 맞게 재조립한, 일종의 ‘만들어진 전통’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통들은 무술의 실제 행적들을 매우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태극권과 기공 개념은 (소림 등의 쿵푸가 그러하듯)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영구불변의 것으로 만들어지고 표현되었지만, 사실 그들의 역사와 계보는 대개 19~20세기 정도에 불과하다. 다량의 역사적인 연구들은 이런 변색주의적 신화에 대항하여 중국무술 담론을 파헤치고 있다.

여기서 무술연구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무술에 대해 (역사학과는 구별되는) 어떤 새로운 지식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대답 중 하나는, 무술 민족지 방법론을 사용한 아담 프랭크(Adam Frank)의 연구이다. (이하 “태극권”) 그는 자신의 2006년도 글에서, 탈구조주의와 태극권을 이론적으로 접합시켰다. 특히 “태극” 개념을 책 구성의 원리로 사용한 점이 특기할만하다.

Frank는 “정체성”을 연구함에 있어 개인에서 사회나 문화로, 단일 존재에서 다중적인 역사로 관점을 옮겨나간다. 그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자아 밖과 관련이 있는, 타자와의 차연(différance)임을 드러냈다.
(번역자: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은 다르면서 지연되는 것을 지칭한다. “미국인”이라는 개념은 누군가를 미국인으로 지칭하지만, 사실 그 미국인이라 불린 (흑인이나 아랍인이나 동양인 같은) 존재가 온전히 미국인이라는 개념에 포섭되지 않곤 한다. 개념이 대상을 지칭할 때 생겨나는 어떤 미끄러짐, 다름과 지연됨을 데리다는 차연(延異)이라 지칭했다.)

이렇게 도교와 해체주의적 문제를 다룬 저작은 몇몇 있지만, Frank와 같이 성공적으로 다룬 저작은 드물다. 이는 Frank가 태극권뿐만 아니라 문화이론 및 민족지의 방법론에도 공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사실 Frank는 문화적 차이가 정확히 “어디”에 머무는지 자주 숙고한다. 드러난 문화적 차이는 그저 상상된 것인가, 아니면 진짜인 것인가? 이 부분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일단 Frank는 “이 문제를 문제로 남겨두기”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증거를 읽어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상황을 맥락적으로 해석해야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해석해내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한 판타지들을 포용하고 다루면서, 중국인 동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정들에 대해서도 판단하려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문제를 남겨 놓은 뒤, 가능성들을 유동적으로 다루려 한다.

Frank는 이러한 과정에서 태극도를 패러다임으로 삼아 개인적인 부분이 항상 정치적, 역사적, 사회학적인 부분임을 드러내려 한다. 이런 패러다임은 연구 대상과 관계 맺는 한 가지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Frank의 접근에는 장점과 단점이 혼재되어있다. 그 접근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의 복잡성과 우여곡절을 볼 수 있다. 허나 정체성이라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해체주의를 통해 이 과정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Frank는 개인이나 그룹의 의식이 어떻게 미디어, 문학, 정치 등 비인간적이거나 ‘현실이 아닌’ 요소에 의해 생산되는지 파악했다. 허나 어떻게 인간이 그런 비인간적인 요소를 창안해내는지 논하지 않았다. 또한 라클라우(Laclau)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 정체성이 성립되는 공간을 이해할 것만 아니라, 그 구성과 해체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술과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들어맞을 수는 없다. 일례로 Wacquant가 쓴 아비투스 개념은 미국의 시카고 게토를 논할 때는 들어맞겠지만, Frank가 논한 상하이를 논할 때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 정체성에 대한 구성과 해체의 논리는 여러 방향에서 다뤄질 수 있다.

위에서 논한 Frank나 Wacquant의 예시 외에, 몇 가지 다른 접근 방식을 더 논할 수도 있겠다. 그 중에는 실비아 휴이 총(Sylvia Huey Chong)이 21세기 미국 문화에서 아시아의 위치가 어떤지 논한 것이 있다. 해당 연구는 문화, 미디어,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무술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The Oriental Obscene: Violence and Facial Fantasies in the Vietnam Era, 2012)

다음 챕터에서, 나는 역사(혹은 담론)의 문제 집중하여, 무술과 정체성의 문제를 더 탐구해나가고자 한다.

무술연구로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기

일반적인 감각에서는, 역사를 절대적인 무언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사건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발견되어 역사를 이룬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역사 그 자체도 수많은 복잡한 방향과 과정들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역사는 항상 ‘이데올로기’와 짙게 연결되어있다.

이데올로기란 신념체계, 비전, 이상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가짜 믿음”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지젝의 급진적인 문화 이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문화와 사회의 근본으로서 그 바깥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말들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야말로 무술의 역사를 써내려감에 있어 고심해야 할 대상이다.

일례로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 시리즈를 예로 들 수 있다.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1982)는 일견 미국 특수부대의 힘을 전시하는 듯하지만, 실비아 총이 지적하듯 베트남전을 트라우마로 이해하는 것과 연관되어있다.

총의 작업(2012)에서 <퍼스트 블러드>는 1960~70년대의 베트남전을 1980년대의 시각문화에 재조직하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 후속작 중 하나인 <람보 : 퍼스트 블러드 파트 2>는, 로날드 레이건이 지적했듯, 베트남 참전을 자랑스럽게 인식할 수 있도록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을 하였다.

레이건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람보 정신과 함께,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이길 것입니다.” 람보 시리즈는 무술을 비롯해 다양한 시각매체의 남성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영화를 통해 기억되는 역사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해 말해준다.

실비아 총은 미국이 베트남전을 트라우마화 하는 것이 (미국) 민족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그녀에게 있어 (미국) 민족이 한 개인(람보)을 통해 표상되는 것은 –한 민족이 통일성 있게 상상되는 것은- 탈구조주의적 방법을 통해 물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여기서 시각 문화에 나오는 무술 또한 “경제와 국가적 힘이라는 주된 구조에 내적으로 저항하는, 본질적인 제3세계의 문화적 형식”으로 숙고될 필요가 있다.

람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아시아 무술 또한 재현했다. 랄프 마치오(Ralph Macchio)이 가라테 키드(karate kid), 그리고 그보다 다소 앞선 척 노리스(Chuck Norris) 시리즈가 그 예시다. 이런 무술들은 센세이나 도복 같은 어휘나 물품을 통해 아시아 문화를 미국인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허나 척 노리스 같은 실제 배우들은, 스크린 밖의 동양 무술에 있어 “아시아적 신체”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소룡이 등장하기 이전에 일본인 배우 소니 치바(Sonny Chiba) 같은 유명한 이들이 있었다. 허나 실비아 총에 따르면 치바 같은 배우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반해 이소룡은 오리엔탈화된 폭력이 어떻게, 아시아로 인종화되지 않고 아메리칸 바디로 받아들여지는지 보여주는 드문 예시다. 특히 총이 보기에 관중들은 이소룡의 정지된 이미지에 매료된 게 아니라, 이소룡의 신체 동작이 보여주는 다이나믹한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실비아 총은, 이소룡이 영화라는 매개 공간에 자신을 들뢰즈적인 운동-이미지로 넣은 중요 예시임을 지적한다. 이는 영화 이론가들에게는 다소 독특할 수 있다. 허나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건. “베트남전이 이소룡의 운동-이미지에 그림자를 드리워, <용쟁호투>에도 윌리엄스와 로퍼 같은 베트남전 참전 캐릭터가 나오고, 이 그림자가 이소룡의 다른 영화와도 충돌한다는 점이다.”

실비아 총에 따르면, 이소룡은 인종적으로 중국인이면서 명예 백인이었고, 그렇게 남성적 힘의 형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소룡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인종주의 그 자체와 대결하는 이야기로, ‘중국적 인종주의’ 문제에 언제나 개입되어있다. (중국인이 아닌 사람에게 쿵푸를 가르칠 수 없었는데, 이를 이소룡이 깼다거나)

이에 반해, 1980년대 척 노리스와 실베스터 스탤론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이소룡 시대는 다소 다른 일이 발생했다. 일단 실비아 총은 대이비스 밀러(Davis Miller)의 회고를 인용하며, 밀러에 있어 이소룡이 단순히 인종적인 상징이 아니라, 명예로운 백인의 상으로 오리엔탈함을 재구성했음을 지적한다.

비슷하게, 노동계급 서사인 영화 “특명 어밴저(No Retreat, No Surrender)”(1986)에서, 주인공은 이소룡의 혼을 통해, 아버지가 거세됨으로써 잃었던 백인적 특권을 되찾는다. 허나 막상 영화 자체는 홍콩의 배우들이, 홍콩의 경극 기술을 활용하여, 홍콩의 스태프들을 동반하여 찍은 영화였다. 이는 중국인을 할리우드에 들여오는 모양새였다.

요컨대 “특명 어밴저”는 홍콩인들이 미국인으로 오해 받아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게 아니라, 단지 “가라테 키드”를 홍콩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재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이소룡이 명예 백인으로 미국화한 게 아니라, 주인공이 이소룡을 일종의 따거(大哥)로 모심으로서 오리엔탈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비아 총은 1980년대 척 노리스를 논하며, 그 스스로가 자신의 롤 모델을 이소룡에서 서부극의 존 웨인으로 바꿨다고 주장한 것을 주목했다. 척 노리스나 실배스터 스탤론 같은 특수부대 캐릭터는 베트남 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소룡 영화에 상당량 미학적인 빚을 지고 있다. (신체 형상 면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 보다는 이소룡에 가깝다.) 헌데 여기서 척 노리스가 이소룡을 존 웨인으로 대체하면서, 이소룡의 전성기 때보다 다소 오리엔탈리즘적으로 퇴보한 모습을 보인다.

이 두 군인-영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오리엔탈화된 몸을 전시했는데, 그 표면은 백인의 신체일지언정, 그 근본은 오리엔탈적이었다. “그들은 황인의 얼굴을 한 음유시인으로 황인종의 노래를 불렀으며, 1970년대 잠시 헤게모니적 권력을 잃은 백인성 및 그 남성성에 활기를 불어넣어줬다. 허나 이러한 행위는 초기만 해도 아시아 문화에 대한 오리엔탈적인 반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미적 절도에 가까웠다.”

실비아 총에 따르면 “백인성은 이미 타자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아시아 무술에 의한 것이자, 벌거벗은 이소룡의 신체를 반영한 것이다.

이상 미국화된 무술 미학의 계보를 분석한 것은,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복잡히 얽혀 미적이고 의식적인 담론을 생산함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 있어 본고는 실비아 총의 복잡미묘한 작업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실비아 총이 역사적 분석에 사용한 몇몇 작업 방식은 한 시기의 문화적-역사적 국면(conjuncture)을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해 보인다. 또한 사회학의 범속하기 그지 없는 아비투스 개념 이해를 확장시킬 가능성이 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24
JST 0.034
BTC 95288.12
ETH 2701.60
SBD 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