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불초한 서생> 제 1장 요약 (上) -작가의 삶-
<평강의 불초한 서생> 제 1장 요약 (上)
-작가의 삶-
#무협 #무술
샹카이란(向愷然). 아호는 타이지에(泰階), 이름은 쿠이(逵), 자(字)는 카이위안(愷元)이다.
그는 광서 시절 1890년 6월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호남성 평강(平江)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남성의 수도인 장샤의 동북쪽으로 8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허나 샹카이란은 장샤로부터 50km정도 남쪽에 떨어진 샹탄(湘潭)에서 태어났다. 샹(湘) 강 옆에 있는 도시로, 그의 아버지는 공장제 수공업으로 우산을 만들어 팔았다. 다소 유복한 환경에서, 샹카이란은 4살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10살에는 장사 동쪽 지방으로 옮겨 살았다.
샹카이란은 1923년 쓴 「세 원숭이 이야기(三個猴兒的古事)」에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1903년, 13살 때 쯤 신식으로 만들어진 국립 ‘셩위안(省垣) 실업학당’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광업과 공업이 주 내용이었다. 그는 이때 인생을 결정짓게 될 중요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1903년 또 다른 호남인인 천티엔화(陳天華, 1875~1905)는 일본 유학 중, 곧장 유학생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있던 혁명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는 일본에서 조직을 구축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선동적인 팸플렛을 뿌렸으며, 곧 1905년 일본에 왔을 때는 쑨원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05년 11월 일본 교육청은 일본에 유학 온 중국인들의 정치적 행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같은 달 7일에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이 중국인들이 규정을 잘 이해 못한다며,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아집, 그리고 방종함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대해 천티엔화는 동료들에게 일본의 중상모략에 대해 비판하다가 곧장 도쿄 만에서 자살해버렸다.
또 다른 후난인 동료인 황싱(黃興)가 천티엔화의 주검을 가지고 장샤로 돌아와 장례를 치뤘다. 1906년 5월 29일이었다. 지방정부가 이 장례식을 막을 힘은 없었지만, 참가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다. 샹카이란은 곧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에 가족들은 대안을 강구했고, 약간의 땅을 팔아 샹카이란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샹카이란은 1906년 하반에 일본에 도착해 1911년 초까지 머물렀다. 그는 고분학원(宏文學院)에 들어갔는데, 일본 대학에 유학 올 중국인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천티엔화나 황싱과 더불어, 이후 유명해질 루쉰도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여기서 샹카이란이 어떤 코스를 밟았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정치 행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는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또한 같은 후난 사람인 왕즈췬(王志群)과 어울리며 무술을 배웠다. -본명은 루셩(潤生, 1880~1941)으로, 같은 고분학원 학생이자 동맹회 회원이었다.- 그 외에는, 그가 스스로 서술했듯, 중국인 유학생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주색잡기에 몰두했다.
1911년 3월 샹카이란은 장샤로 돌아왔으며, 무술 연구 그룹을 세우는데 참여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그의 첫 번째 글인 「권술(拳術)」을 장샤일보(長沙日報)에 실었다.
그는 일본에 돌아가려 했으나, 1911년 우창 봉기이 일어남에 따라 18개월을 중국에 머물렀다. 우창폭동은 곧 신해혁명으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1912년 중화민국이 세워지며 청 왕조가 몰락했다. 이 당시 샹카이란이 무엇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샹카이란의 가족 중 일부는 1911년 우창 봉기 이전 일어났던, 4월 광저우에서 일어난 황싱의 황화강 봉기에 연관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샹카이란이 쓴 자료 중에서는 그에 연관된 부분이 없다.
이후 쓰인 몇몇 글 일부에서 저자-서술자는 신해혁명 기간을 두고 자기비하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5년 「회두시안(回頭是岸)」에서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의 모습을 살짝 서술했다.
민국의 임자년(壬子年, 1912)에 나는 악주(岳州)에서 좋지 못한 처지에 있었다. 당시 중화민국이 세워지자, 국민당이 혁명당에서부터 재조직되어 호남성에서 한창 행세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진짜배기 구시대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공부할 때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 혁명가들과 가까운 편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혁명이 한 번 성공하자, 구시대의 진짜 혁명가들이 보상 받는데 나 또한 따라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또한 1922년 그가 1911~12년 사이를 회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해년(1911)년 11월, 나는 장샤의 대한보(大漢報) 사무실에서 지냈다. 사무실에서 나는 아무 직위도 없었고, 주임이 그저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곳에 지내게 해주었다. 당시 나와 함께 지내던 이 중에는 신닝에서 온 리우투이공도 있었다.
비록 리우투이공은 비교적 어렸지만, 그 교육 받은 바나 성격은 썩 좋았다. 그는 본받을 만한 재능-주로 대화에 대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기이한 일과 흥미로운 존재에 대한 것으로- 그가 머리에서 얼마나 많이 끄집어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웠고, 우리 중 누구도 직업적으로 책임질 게 없었다. 매일 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할 다양한 일로 바빴다. 그와 나는 화롯가에 앉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터무니없는 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영혼, 귀신, 그리고 기이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이야기한 것의 대부분이었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신문 대한보(大漢報)는 동맹회의 후원으로 설립되었고, 샹카이란이 당시 운동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나 이 문단에서 샹카이란은 정치에 대해 별로 논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이야기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드러낸다.
물론 이런 회고는 10년이 지난지라 윤색되었을 것이고, 또한 샹카이란이 작가로서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부분이 짙다. 다만 샹카이란은 그 스스로가 서술한 것보다 더 많이 혁명에 연루된 것 같다.
그는 일본에 갔다가 1913년 곧장 호남으로 돌아왔다. 그는 악양(岳阳)에서 가죽공장 관리직을 얻었으며, 왕즈췬의 지도 및 국가의 보조 아래 무술을 가르치고 지도할 조직을 구축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1913년 3월 국민당 수상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과 상관있어 보인다.
1913년 7월 호남성의 군정 장관 탄얜카이(譚延闓)가 위안스카이에 대항하는 2차 혁명을 지지하자, 샹카이란은 반-위안스카이 측 제 1군 청즈카이(程子楷) 휘하의 부관으로 들어갔다. 2차 혁명이 잘 진행되지 않자 탄얜카이는 위안스카이 측으로 돌아섰고, 청즈카이는 체포 위협에 같은 해 8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에 따라 샹카이란 또한 그를 따라 일본으로 세 번째로 떠났다.
세 번째 체류 당시, 샹카이란은 도쿄의 중앙대학(中央大學)에서 수학했다. 그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끝마치지는 않은 건 확실하다. 1915년 하반기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쑨원이 조직한 중화혁명당의 강서 분국과 제휴했다.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기를 꿈꿨고, 이는 호국군(護國軍)의 반란을 불러와 다시 반대파가 결집하게 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는 황위를 포기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1916년 4월 12일 해주사건이 일어났다. 광저우 총독 롱지광(龍濟光, 1867~1925)의 사절이 협상 중에 호국군의 대표를 쏘아 죽인 것이다. 당시 샹카이란은 광저우에서 반-위안스카이 측의 강서혁명군을 대표하고 있었다. 위험이 임박한 것을 느끼자-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었다-, 6월 말 그는 상하이로 떠났다. 정치에서 벗어난 것이다.
1915년 하반기 그는 「권술(拳術)」이란 제목으로 중화소설계(中華小說界)에 글을 연재했다. -장샤일보에서 연재된 것과 같은 제목이다- 1916년 3월 초에는 「권술견문록(拳術見聞錄)」이 「권술」의 후속작으로 연재되었다. 권법에 대한 기술 및 원리 설명과 더불어, 한문 전기와 무술 관련 일화가 들어있다.
같은 기간 그는 또 호랑이 사냥에 대한 이야기인 「변색담(變色談)」을 민권소(民權素)에 연재했다. 민권소는 반-위안스카이 진영 문학잡지이다.
1916년 8월~12월에는 한문으로 쓰인 긴 시리즈가 소설해(小說海)에 연재되었다. 샹카이란의 작가적 명성을 만든 건 90 챕터짜리 백화문 소설 유동외사(留東外史)로,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이라는 필명으로 민권출판사(民權出版社)에서 1916년 5월 출판되었다. 일본에 유학 간 중국인 학생 및 국외거주자 등이 개항시기부터 1914년까지 벌인 방탕한 행실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평강불초생의 글쓰기 특징에 관해 「권술견문록(拳術見聞錄)」(1916)년을 잠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청말민초에 출판된 무협소설과 저자의 초기 소설(초기 근대무협소설)을 이어주는 일종의 교두보다. 「권술견문록」은 실제 권술가에 대해 보고 들은 기록이지, 창작된 소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곧 서사로 바뀌어, 더 상세해진 채로 곽원갑(霍元甲)에 대해 서술할 터였다. (근대협의영웅전을 의미한다.)
이런 초기작들은 샹카이란이 죽을 때까지 무술에 대해 설명적인 글을 썼듯, 다소 설명적인 부분이 있다. 또한 이런 초기작들은 무협소설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이후 샹카이란이 써내려갈 무협소설의 캐릭터, 사건, 주제 등 많은 부분을 담고 있지만, 초기작들은 무협소설이라기보다는 당시 유행했던 비교적 고전적인 형식들-역사소설, 전기(傳奇)소설, 사회소설 등등-에 속한다.
무엇보다, 샹카이란의 초기작은 이전 시대의 문학형식을 많이 담고 있다. 한문으로 된 필기(筆記)는 물론이고, 백화문으로 된 장회(章回) 형식이 그러하다.
이제 상하이는 샹카이란이 앞으로 5년간 살아가는 주된 무대가 되었다. 비록 1917년 잠시 지방 민병대에 복무하고, 1919년에는 왕즈쥔과 무술조직을 세웠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유동외사만큼 잘 팔리는 걸 쓰지는 못했지만 끝없이 써내려갔다.
1917년에는 한문으로 「기정소설(奇情小說)」을 썼다. 상하이의 대동도서국(泰東圖書局)에서 권술(拳術)이란 이름으로 한문 책을 내었다. 그 외에 덜 알려진 단편소설 둘이 있다. 「용호춘추(龍虎春秋)」(1919), 「한 밤에 날아다니는 머리(半夜飛頭記)」(1920?) 이 둘은 백화문 장회소설의 형식을 빌려 써낸 것이다.
이 당시 샹카이란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1919년 5.4 운동에 대해 개입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이때는 주로 유동외사를 쓰며 글을 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유림외사는 바오톈샤오(包天笑, 1876~1973)에게 추천받았다. 그는 상하이의 베테랑 편집자로, 새로운 연재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22년 2월 소설 잡지 일요일(星期) (대동서국(大東書局) 출판)을 위한 연재물을 찾을 때, 유동외사를 쓰는 작가가 어디에 사는지 찾아내려 했다. 허나 작가의 명성에 비해 작가의 근래 소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후난에 갔다느니, 일본에 갔다느니, 합의된 바가 없었다.
당시 장밍페이(張冥飛, 1894~?)가 샹카이란의 상하이 집을 바오톈샤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 장밍페이는 경고했다.
샹카이란은 손님을 잘 받지 않는데, 만약 그를 보고 싶다면 해질 때나 밤에 가시오.
“아하!, 아편 피우나 보구만.”
바오의 말에 장은 웃어 보였다.
다음날 바오는 신자로(新閘路)에 있는 그에 집에 가 그와 더불어, 개, 고양이, 여주인을 보았다. 4시가 되어서야 샹카이란은 간신히 손님 맞을 채비를 하였다. “그는 채비를 갖추기 전 그의 욕망부터 만족시켰다. 고로 어떠한 인사도 없이 나는 그의 아편 소파에서 모로 떨어져 앉았다.”
바오는 그날 밤 일요일에 실을 두 원고를 약속 받았다.
그가 일요일에 실은 원고 중 하나는 유동외사보(留東外史補)로, 전작의 후속작이었다. 두 번째는 사냥꾼을 만나다(獵人遇記)로 호남성의 야생에서 벌어지는 호랑이 사냥 관련 이야기다. 앞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제나 형식 면에서 무협소설 장르와 관련성이 있으나, 작품 자체는 개인적인 네트워크와 상업적 결정이 이끌어낸 산물이다.
이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자, 바오는 이 호남성 이야기들을 션즈팡(沈知方, 1882~1939)에게 보여주었다. 션즈팡은 바오의 친구이자 동료로 함께 소설대관(小說大觀)을 주관했었다. 당시 션즈팡은 가장 공격적인 상하이 출판업자로 출판사 세계서국(世界書局)을 열었으며, 마침 흥미위주 주간지로 1922년 8월 홍잡지(紅雜誌)를 낼 터였고, 그 자매지로 중국 최초의 장르잡지인 탐정세계(探偵世界)도 낼 예정이었다.
션즈팡은 새로운 시장 니즈를 창출하는 데 재능이 있었고, 곧장 샹카이란에게 꽤 특정한 방식의 소설을 쓸 것을 주문했다. “검선이나 협사가 나오는 일류 전기(傳奇) 소설”이라던지.
그 결과 1923년 평강불초생의 강호기협전이 홍잡지에 연재되었고, 그와 동시에 근대협의영웅전이 탐정세계에 연재되었다. 당시 상표문구는 이렇다.
“상하이 무협소설의 첫 물결을 열다(開上海武俠小說的先河).”
이상 바오티엔샤오의 회고에 근거한 이야기는, 다음 챕터에서 다시 논의해봐야 할 부분이 많다. 다만 샹카이란의 커리어에 있어 바오톈샤오의 일요일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1922년은 유림외사보가 일요일에 연재된 때이자, 민권출판부(民權出版部)네서 70편 짜리 후속작이 출판된 때이다. 또한 일요일과 세계서국의 유쾌(快活) 잡지에서 단편 몇 편이 출판되었다.
1923년에는 <강호기협전>과 <근대협의영웅전>도 연재되기 시작했으며, 거기에 더해 유동외사의 또다른 후속작 유동신사(留東新史)가 신문보(新聞報)에서 연재되기도 했다. 이 원고들은 책으로 출판되었고, 그 외에도 최소한 9편의 단편이 각종 잡지에 실렸다.
그 외에 1923년 10월 중국무술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인 국기대관(國技大觀)이 출판됨에 있어, 샹카이란은 편집자 및 공헌자로 일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태극권을 익히기 시작했다. 1918년 태어난 샹카이란의 아들 샹이쉐(向一學)는, 샹카이란의 상하이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상하이의 유명인들, 비밀조직의 지도자들, 무술의 대가들, 그리고 각 분야의 충실한 이들이, 샹카이란과 모두 가깝게 지냈다. 집은 방문객으로 북적였고, 그들은 원하는 대로 오고 갔다. 형식적인 인사는 드물었고, 사람들은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하며, 대화의 홍수 속에서 간단히 인사했다. 그리고는 인사 없이 떠나가곤 했다.
종종 다양한 사람들이 두세 명이 무리를 이뤄 오면, 아버지는 열성을 다해 대화하고 농담을 나누며, 태양 아래 모든 것과, 현재 및 과거, 그리고 국내와 국외 모든 걸 이야기 했다.
그분의 기억력은 탁월하여, 사람들의 이야기, 일화, 가십 등을 들으면, 마음속에 골라 적어놓을 수 있으셨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할 때 그분은 끊이지 않게 써내려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번역자: 무술 연구 번역하다가 문득 지쳐버려, 잠시 다른 글을 정리해봤습니다. 문화연구는 문장이 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