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 제2장 요약 (中) : 신체, 역사, (초)민족, 그리고 서사

in #wuxia4 years ago

무술연구 제2장 요약 (中)
: 신체, 역사, (초)민족, 그리고 서사

무술, 내셔널리즘, 트랜스내셔널리즘

앞서 보았듯이 역사, 이데올로기, 정체성의 문제에 있어, 민족(nation)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부분에서는 그 민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논하되, 일반적인 논의와는 다소 다른 방식을 추구하고자 한다.

페트러스 리우(Petrus Liu)는 최근 저작에서 무협 문학 및 문화에 대해 다루었다. (Stateless Subject: Chinese martial arts literature and postcolonial history, 2011) 이는 크게 몇 가지 면에서 눈여겨볼만 하다.

A. 해당 저서는 근대 중국에서 무협문학의 지위를 재고하길 요구한다.
B. 동시에 문학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부각한다.
C. 긴 문화적-지적 전통을 가진 무협문학이 20세기에 들어 역사적으로 간과된 지점을 논한다.
D. 무협문학의 형식이 중국의 사회 및 역사에 관해 비평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 결과 무협문학은 중국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평적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허나 그 가능성이 무시되었던 분야로 그려진다.

서문에서 리우는, 무협 영화나 문학을 논함에 있어 민족주의는 가장 일반적인 해설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장르의 성장, 미적 관습, 그리고 대중성 등을 모두 중국 민족을 재현하는 감정적 투사로 처리한 것이다. 이는 크리스 햄(Chris Hamm)의 김용소설 연구를 겨냥한 것이다. (Paper Swordsmen: Jin Yong and the Modern Chinese Martial Arts Novel, 2005)

리우에 따르면 햄의 연구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의 상황을 통해 김용 소설이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햄은 김용 소설을 일종의 “영웅적이고 에로틱한 내셔널리즘”의 체현으로 본다. 요컨대 김용 소설이 중국 문화를 기리고 본질화하여, 식민지의 불안한 정체성을 가진 홍콩인들에게 내셔널리즘적인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이다.

또한 햄은 김용의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앤더슨의 인쇄-자본주의 개념을 끌어온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신문 같은 인쇄-자본주의의 산물이 같은 민족이라는 소속감을 가져다준다고 지적했다. <상상의 공동체> 참고)
결과적으로 햄이 보기에, 무협문학이란 영국 식민지인들의 식민지 열등 콤플렉스가 빚어낸 산물이며, 그 장르의 인기란 작품의 지적인 깊이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추구에 의해 설명된다.

여기서 리우는 중국 문화사에 있어 무협문학은 중국이 근대화를 시작하던 시기부터 20 세기 전반에 걸쳐 변천되어 옴을 지적한다. 물론 무협문학이 식민적이면서 탈식민적인 중국 역사의 산물로 민족과 항상 상관있다는 현대 학자들의 암묵적인 합의는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전통적인 국가 중심적 해석은 무협 텍스트 생산에 있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 문제와 국민국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런 해석은 무협문학이 ‘잊혀진 역사’를 그리워한다고 말하면서도, 근대중국문화에 공헌한 바가 있다는 일관되지 못한 평가를 만들어낸다. 허나 무협 문학에 있어 사실 ‘국가’는 정의를 결정하지도 않고, 도덕적인 공간도 아니다. 무협 문학의 “강호(江湖)”에는 국가가 비어있다. 그 점에서 무협소설은 자아의 사회성을 설명해주는 “비국가의 주체(stateless subjects)”이다.

리우의 관점이 그저 소수의견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는 무협에 관해 널리 퍼진 ‘민족국가 알레고리’ 관점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기존의 국가중심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학들의 흥미롭고 복잡한 부분들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아왔다.’ 무협문화에는 미적 관습, 철학적 기반, 제도적 역사, 주제적 동일성 등 살펴볼 부분이 많지만, 대중문화로 간주하는 시선이 무협문학에 대한 비평을 빈약하게 만들었다. 리우는 무협소설을 근대 문학 운동으로 간주하여 정치가 언제나 국가 정치라는 선입견에 도전하고자 한다.

여기서 리우는 두 가지에 집중했다.
① 무협 장르의 변별적인 미적 특징을 써내려가는 것.
② 무협을, 가장 중요한 비국가적 정치적 책임을 고안해낸, 20세기 중국 지성사에 있어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운동으로 재위치 시키는 것.

리우는 무협문학의 “강호(江湖) 담론”을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 개념인 “민간(民間)”과 “천하(天下)”의 대비 사이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무협소설은 “인간 주체를 윤리적인 타성(他性)으로서,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의지하면서도 또 그 책임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에 따라 무협소설의 ‘비국가적 주체’는 국가의 법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리우는, 무협이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국가적인 부분을 넘어선 정치가 공적 책임 하의 개인에게 무슨 의미인지 묻는다고 주장한다.

리우는 무협소설이 단순한 영화(film)이 아니라, 일종의 시네마(cinema)로 국제적 규모에서 엄청난 가시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홍콩 시네마에 대해 알고, 중국 문화를 일종의 문화적 병리학 면에서 해석하곤 하지만, 그들이 대개 그런다는 게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리우의 가장 큰 펀치는 이 지점을 둘러싸고 있다.

미국에 있어 무협소설은 가장 연구가 될 된 근대 중국학 분야 중 하나다. 근래 학계는 무협소설에 대해 세 가지 가정을 하곤 했다. ① 무협소설은 홍콩 영화에서 역사적으로 유래하여 신체적 스팩타클을 재현한다. ② 무협소설 장르는 제국주의 시기 중국인들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는 도피주의적 판타지였다. ③ 무협소설은 중국문화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애국주의적 색채가 짙으며, 이는 주로 중국 콤플렉스나 식민적 근대 등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 모든 가정에 저항하며, 리우는 무협소설을 일종의 근대화 이론에 대한 지적 해석으로서 무협소설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①에 대해서는 무협문화가 현대 홍콩이 아니라 근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영화가 아니라 소설로 시작되었기에 ‘신체’와 ‘시각’이 아니라 ‘신체’와 ‘문자’에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때문에 무협은 영화더라도 문학적인 관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② ③ 무협은 도피의 환상이 아니라, 중국 근대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지적 개입이다. 무협이 정전에서 빠진 역사적 원인은 민족주의적(이면서도 서구적인) 근대화 담론이 무협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민족주의와 그렇게 호응하지 않는다.)

5.4 신문학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서구) 근대화 담론은 무협이 봉건 중국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무협소설가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지적 요소들을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도교, 불교, 유교, 전 근대적 문학형식 등)
아이러니한 점은 1920~30년대 이전만 해도 중국의 무협문학은 문학적으로 ‘고급’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무협문학의 여러 부분들은 시나 사, 혹은 당 전기 등처럼 중국 고전문학에 속한다.

허나 1920년대 이래 무협문학은 다양한 부분에서 빠져나와, 로우브로우 대중문학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들의 한문적인 문체가 대중적인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근대화 세력(마오쩌둥과 루쉰을 포함하여)은 무협소설 그 자체보다는, 무협소설이 20세기에도 존재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따라 무협소설은 로우브로우의, 반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무언가로 낙인 찍혔다.
1932년 무협영화는 중국에서 금지당했으며, 1949년에는 무협소설이 신중국에서 금지 당했다. 특히 신중국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 근대중국문학사를 세우면서, 무협소설과 같이 리얼리즘적이지 않은 것을 문학사에서 지워냈다.

리우는 김용 현상을 논하면서, 김용을 재평가함으로써 중국 문학사는 단순히 정전(canon)을 수정하는 것 이상의 사건을 겪게 된다고 주장했다. 탈식민적 관점에서 무협 문학은, 중국이 자신의 전통을 부수어야만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식민화된 상상’을 재고하게 해준다.
특히 언어의 유럽화가 중요하다는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서구와 그 합리주의를 갈망하는 식민화된 중국 지식인의 의식을 폭로한다. 특히 류짜이푸(Liu Zaifu)는 김용의 소설언어가 신문학 세력에 대비하여 ‘반-유럽적인 중국어 쓰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저자 폴 바우만은 이 주장을 주목하며, 리우가 민족주의적으로 중국문학사를 읽어내는 것에 긍정적임에도, 다양한 탈식민 연구자들 –프레드릭 제임슨, 하일레 게리마, 비재이 프라샤드 등-을 통해 문제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리우는 무협의 내적 구성, 서사, 장르 특징에 주목하며, 이것들을 논하지 않은 채 무협을 친/반-민족주의니, 친/반-자본주의니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한다. 이에 더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
① 무협 문학의 작품성, 그리고 ② 그 문학성이 참여할 수 있는 관계, 그룹, 정체성, 실천의 가능성이다.

리우가 보기에, 무협의 문학성에 있어 비급(秘籍) 모티프는 중요하다. 무협에서는 흔히 대단한 무공이 담긴 고대 경전을 ‘비급’이라하는데, 이 책을 다투는 게 소설의 중심 플롯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급은 중국 한문(혹은 산스크리트어)으로 쓰여 있으며, 내적인 성찰을 통해 어떤 변천을 이루게 한다. 문제는 여기서 주인공을 글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이 실제 세계에 있어 지배적인 계급의 교육 자본에 접촉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무협 장르는 무력을 배우는 원천으로 책을 지시한 것이다. 이는 무협 장르가 교육 받은 층에게 읽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문학성을 지시함을 드러낸다. “무협은 자기의식적인 문학 담론으로, 언어의 미적 자산에 관심을 가져왔다.” 또한 무협은 중국 고문과 우주론적 개념을 쉽고 이해할 수 있게 인용한다. 그 결과 문학을 대중적 문화영역으로 옮겨놓는다.

이런 무협소설의 전통은 현대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급의 서사전통은 2004년 쿵푸 코미디 <쿵푸허슬>이나 비슷한 시기의 <와호장룡>에서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무협문학의 전통은 일종의 미적/지적 자본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무협문화를 고급문화로 만든 정점이다. 당시 무협문학은 중국에서 다시 환영받고 있었다. 이는 1990년대 이래 김용 연구를 중심으로 무협 연구가 흥성한 것과 연결된다. 여기서 리우의 주장은, 무협문학과 민족(nation)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다소 문제적인 부분이 있다.

리우는 중국과 홍콩의 무협문화를 민족적인 것으로 읽는데 본격적으로 반대한다.. 이 부분에 대한 리우의 주장은 분명히 탁월하지만, 저자 폴 바우만이 보기에 그의 관찰은 무협문학에 관한 ‘민족적 알레고리’ 독해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리우는 무협이 민족적 생산물이라는 주장에서 해방되기 위해 ‘비국가적 주체’라는 개념을 탐구했다. 분명히 중요한 대안적 탐구지만, 지나쳤다. 오히려 민족이라는 주류적 작용 옆에서, ‘비국가적 주체’라는 부가적인 작용을 드러냈다고 보는 게 맞다.

여기서 리우의 접근이 가지는 장점은, 20세기 중국의 근대화-민족화 세력을 무협소설가보다 더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와 민족화를 열망했던 어떤 반동적인 세력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리우는 김용 현상이 우상숭배되던 신문학의 위치를 재고시켜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무협을 통한 전통에 대한 재발견은 “노스탤지어한 내셔널리즘”의 기미가 있다.

리우는 폴 리쾨르, 프레드릭 제임슨 등의 주장을 끌어들여, 무협문학이 “유토피아 충동” -자본주의의 실패가 전개됨에 따른,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집단적 소망“-을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무협문학이 내부화된 식민주의 논리에 대한 서발턴의 저항이라고까지 보았다. 허나 폴 바우만이 보기에 이는 다소 편중된 논리이다.

라캉은 탈구조주의적인 견지에서 어떤 총체성이 없음을 지적했다. 노스탤지어틱한 신화는 소급적으로 구성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 같이) 만약 무협문학이 고급 문화적 형식의 근대성을 이어내려오는 것이라면, 이를 ‘서발턴적인 저항’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난점이 따른다.

더욱이 레이 초우가 지적했듯, ‘저항으로서의 문학’은 푸코가 󰡔성의 역사󰡕 등에서 지적한 “억압적인 가설”의 기미가 있다. (관료적 합리주의 언어라는 문학의 지위 면에서 그렇다.) 초우는 이렇게 포스트모던 페티쉬로 문학을 과대포장하는 것을 해체해오고자 했다.

특히 리우는 근대성 부상 이전의 어떤 총체성을 암시하는데, 이는 초우가 지적하는 “원시적 열정”에 대한 비판 사정거리에 들어있다. 리우가 “정말로” “원시적 열정”을 찬양하는 건 아니지만, 몇몇 문단들은 다소 문제될 소지가 있다.

리우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협의 신화적인 시간은 ‘자본 이전의 시간’에 속해있다. 이는 주체와 대상이 근대 자본주의로 인해 파편화되기 이전의 이상화된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한 때 전염력 있는, 상업화된 대중문화의 결과물로 여겨진 무협은, 오늘날 중국의 호메르스 서사시이다.

여기서 폴 바우만이 지적하길, 독자가 주의 깊지 않다면 무협의 ‘신화적인 시간’을 ‘체와 대상이 근대 자본주의로 인해 파편화되기 이전의 이상화된 공간’과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1980~90년대 라캉주의자부터 레이 초우에 이르는 시선으로 보자면, 이런 신화적 완결성 및 총체적인 감각은, 현재의 시점으로 재구축 된 것이다. 리우야 이를 알겠지만, 읽는 이로써는 혼동될 여지가 지나치게 많다.

특히 ‘저항’, ‘서발턴성’ 등의 언어는, 리우의 저서에 적절한 것 같지 않다. 리우의 주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도 무협문학은 발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안적인 접근을 제시하기 위해, 리우는 무술의 몇몇 비평적 사용 사례를 통해 비판적 무술의 정치적인 가능성을 논하려고 한다. 허나 리우가 그 가능성을 제대로 논하려면 중국 밖, 문학 밖 그 자체를 볼 필요가 있다. (화교는 물론, 비중국인을, 그리고 영화 등을 포함하여)

리우는 메간 모리스(Meaghan Morris)의 “마이너 시네마” 개념을 끌어온다. 모리스는 글로벌한 메이저 시네마를 대신하여 트랜스내셔널한 마이너 시네마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리우가 보기에 무협 영화는 마이너 시네마의 중요한 예시가 될 수 있다.

헌데 이러한 리우의 접근은 문학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것이며, 무엇을 ‘마이너’라고 단정 짓는 것은 특정한 관점으로 무협문화 및 영화의 가능성을 가리는 것이다. (중국과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마이너하지도, 민족주의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나 그렇지.) 이런 담론이 중국이나 홍콩에 적용될 수 있겠는가?

또한 리우는 비재이 프라샤드(Vijay Brashad) 등을 통해 무협영화가 중국인-흑인 연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논했다. (홍위병과 블랙팬서의 유대감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리우의 지적은 ‘문학’이나 ‘중국’과는 동떨어져있다.
이는 어쩌면 논의 초점 문제거나, 이 정도로 다이나믹한 예시가 문학이나 중국 범위에는 없었을 수도 있다.
또한 어쩌면 이 동떨어짐은, 무협문학과 영화를 빨아들이는 내셔널리즘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양 이론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학, 영화, 그리고 민족주의를 통해 생산되는, 중국의 어떤.

민족과 시뮬레이션

무협문학과 문화에서 무술 실천과 민족주의라는 지점으로 넘어갈 때, 문제는 더더욱 복잡해진다. 앞선 논한 Fran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태극권은 중화 민족주의의 대표적 상징이다.”
(2006, 186p) 많은 이들이 Frank나 Douglas Wile처럼 태극권과 민족주의를 연관 짓는데 비판적이다. 그 중 주된 이유는 태극권이 근대 중국 민족국가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보자면, 태극권과 민족주의를 연결 짓는 건 일종의 투사(projection)의 문제를 가져온다. 현재의 가치관을 과거의 대상에 무작정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에 따르면, 현재의 가치관이 언제고 자연적이며 불변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관련 있어 보인다. 다르게 말하자면, 민족주의 이전의 무언가가 어떻게 민족주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 Frank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극권은 중국에 있어 “단지 진실 증명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는 성지”라지만, 사실 이 경우 과거로서의 고대 중국은 재형성된 것이다.

이런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언급한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접근이 일반적이지만, 자크 데리다가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논한 것도 도움이 된다.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국가는 스스로의 기원을 고대에서 끌어오지만, 실제로 그들 자체는 근대적인 창조물이다. 민족 이전에 유럽에는 다양한 주권들(왕조, 귀족정, 혈연 등등)이 있었고, 이중 민족은 비교적 최근에 태어났다.
이는 인쇄 기술이 교회 라틴어로 쓰여진 세계를 해체하고, 또 다르게 연결한 결과이다. 마르틴 루터의 “이단” 문제는 독일이 로마의 라틴어 세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Frank는 베네딕트 앤더슨에 대한 창의적인 독해를 보여준다. 그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제시한 “인쇄-자본주의” 가 ‘국가의 구어 언어’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확장시켜, 태극권 또한 “운동적인 국가적 구어언어”임을 주장한다. 우리가 인쇄, 건축, 운동 중 무엇을 말하던, 국가는 어떤 특정한 언어를 기준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태극권 또한 중국 국가의 핵심적인 형식이 되어,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역할을 했다.
가문에서 이어진 전통적인 것과, 국가가 지정한 48식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국가-스승, 도교-사회주의, 가문의 역사-국가의 역사 같은 것이 한 몸 안에 있는 것이다.

허나, 실제로 Frank의 말대로, ‘국가적인 레벨에 있어, 태극권은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세계로 퍼트린 ’중국적‘인 심볼 중 하나’인가? Frank는 여기서 태극권이 민족 신체를 구성하기 위한 1920년대 중국의 국가 담론에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지적에서 Frank는 태극권이 중국의 마스터 심볼로 ‘떠올랐다’고 지적하는데, 여기서 ‘떠올랐다’는 것은 태극권이 무조건 중국적인 마스터 심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게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이 있다는 말이다.

데리다는 “Polticis of Friendship”에서, 텔레이오포에이시스(teleiopoesis)의 논리를 제시한다. 이 개념은 한 실체를 의미하고 가치를 지니게 하는 논리를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목란권 같은 무술이 고대 뮬란에게서 이어져 나온다고 본다면, 더 존중하기로 합의할 가망이 높다. 그게 1999년이나 1971년 국가의 무뢰배들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앞서 실비아 총이 지적했듯,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 –혹은 시간-은 조작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이 가치 있다면 새로운 척 재포장 할 것이고, 반대면 장삼봉이나 보리달마를 끌어들이듯 처리 할 것이다.

Frank는 중국 태극권의 담론에 매 층위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들어와 있음을 지적했다. 경기, 관광, 각종 연구 등은 이 민족주의적 담론이 형성되도록 일조했다. 또한 Frank의 지적에 따르면, 사회주의 중국의 태극권은 사실 특정한 종류의 태극권을 실천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느린 동작이나 검무를 통해 과거를 재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누가 되고자 하는지 경험한다. 다시 말해, 중국인 됨에 대한 감각을 생산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폴 바우만은 지적한다. “언데 이러한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민족주의는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다.”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은 이전 시대의 왕국이나 지리적 공간에서 자각되어 나온 것이다. 옛 제국 시스템은 민족국가의 도전을 받았다.

중국의 경우, 쑨원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군사, 정치, 그리고 시운을 합쳐 청 제국의 구조를 해체했다. 많은 수의 혁명가들이 해외-일본, 미국, 유럽-에서 교육 받았는데. 이 경험은 그들에게 ‘중국인 됨’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이 ‘중국인 됨’은 지역 군벌들에 의해 개발된 지역성과 지역 언어에 대한 관념을 대체했다. 혁명가들은 민족주의를 통해 아편 전쟁 이후 75년간 중국인을 사로잡았던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했다. (Frank, 161~2p)

민족주의적 감각을 건설하는 데 있어 세대적인 자부심은 중요하다. 이런 자부심은 올림픽 등을 통해 건설되며, 국가적 신체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새로운 정부의 정책 제작자들은 올림픽이라는 이 가능성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 “민족전통체육”을 올림픽에 삽입시켜 중국이 즉각 금메달을 따도록 하려 했다. 이때 가장 주된 과목이 무술이었다. 이미 고도로 학습된 인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정 부분은, 일본 유도와 같은 사례가 이미 있기 때문이었다.

Frank는 태극권 담론의 민족주의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 담론은 근대에 연원하지만, 이상에서 보여주었듯 각 시대에 맞춰졌다. 다만 이미 상술한 부분을 더 나열하기보다는, 민족주의가 가진 ‘고대성’이나 ‘본질적인 중국성’에 대해 좀 더 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레이 초우가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1995)에서 논했듯, 원시적 열정이란 근대성이 위기에 처한 순간, 어떤 원시적인 것-고대, 영원불변, 자연적인 것 등-을 추구하는 열정을 말한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어떤 감각은 근대 담론 및 사회-정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헤게모니와 정체성

이 지점에서, 다시 Frank의 저작을 통해 논해보는 게 유용할 듯하다. Frank에 따르면, 중국 근대화에 있어 관료들은 아편 전쟁 이후의 분노를 유용한 에너지로 사용하고자, 임대한 영토 및 조계지를 공격하는 걸 허용하곤 했다.

때문에 저자 폴 바우만이 보기에 민족주의 논리는 일종의 국내 정치였다. 그 점에서 민족주의 정서는 스포츠를 통해 생산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드디어 태극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은 태극권을 경기시범종목으로 올렸다. 참가국들은 국가의 기예를 보일 기회가 잠시 있었는데, 중국인은 짧게 태극권의 몇 동작을 보였다. (Frank, 166p)

허나 태극권에 대한, 계획되어 있던 지적 접근은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사라졌다. 또한 몇 년 사이 유명한 무술가 몇이 살해되거나 도망쳤다.

국공내전 이후, 공산당은 무술을 신성화하고 태극권의 대중화를 진행했다. 이는 국민당의 무술 지원을 잇는 것이자, 1942년 옌안 문예회담에서 마오쩌둥이 지시한 정책을 잇는 것이었다. 태극권과 다른 무술들은 민족전통체육의 분류로 들어갔다. (Frank, 168p)

문화대혁명은 수많은 무술단체를 붕괴시켰다. 홍위병들이 봉건적인 것으로 지목하여 금했기 때문이다. 허나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다시 정통성 있는 무술기관들을 지원했고, 무술의 스포츠적 측면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때 공산당은 무술의 경기 시스템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각 무술단체들은 해외의 조직과 문화적으로 더 널리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정저우에서 이뤄진 국제소림축제는 지역 이익과 국가 문화정책의 혼합을 보여준다. 이는 물론정체성 건립과 연결되어 있으며, 실행자들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적 개념을, 토너먼트를 통해 교환하였다. (Frank, 168p)

역사적 변천을 통해, 개인적, 집단적, 국가적 정체성들이 교호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경기에 참여하는 중국무술수행자들은 민족적, 문화적, 혹은 유파적 범위를 가로지르며 동지애를 나눈다. 이때 민족적 정체성은 종종 압도적일 수 있다. Frank는 다음과 같이 관측한다. “국제소림축제 스타디움의 배너는 중국과 영국의 연대를 드러낸다. 한 쪽에는 영어로, 다른 쪽에는 중국어로 쓴 문구가 나란히 걸려 있다. 축제에는 12개국이 참여한다.”

국제소림축제는 시장 논리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등장함을 보여준다. 이 사업은 “개인 개발로서의 도교라는 대중적인 인지”가 “무술과는 별 관련 없어 보이나 중국을 처음 온 무술 여행자의 꿈을 채워주기에는 적당한 기념품” 파는 것과 기묘하게 연결된다.

또한 Frank에 따르면, 이 국제소림축제는 일종의 국제화를 보여준다. 그 조직은 무술 투어리즘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진행시킨다. 이런 예시들을 통해(천씨 마을 및 소림사 투어를 포함하여) 새로운 “국가의 구어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중국 정부는 민족주의 프로젝트를 가동함에 있어, 소림사와 태극권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TV의 공공 이미지와도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투어리즘에 있어 이 모든 것은 뒤섞여 나타난다. 민족 이미지는 무술의 이미지와 불가분하게 엮여 있다. (Frank, 182~3p)

무술은 민족주의, 혹은 민족적 정체성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허나 그와 동시에 수련자, 팬, 소비자 등 국제적인 대상으로도 작동한다. 또한 경제 논리에 의해 이 모든 게 작동한다. 이 일들 자체로는 가짜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이중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독실한 신앙과 상업적 열정이 맞닿아 있고, 국제적인 연결은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이루어져있다. 이 중 무엇도 무술에 있어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들은 관계들과 정체성들을 구성하는 담론적 힘과 관계들이다.

곧 다시 이 담론들을 다루긴 하겠지만, 여기서는 Frank의 책을 따라, 나는 정체성과 관련하여 무술에 관한 읽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의 대안적 방향은 무술, 정체성, 그리고 트랜스내셔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둘째는 인터네셔널-혹은 트랜스네셔널-과 영화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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