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일주에 실패했다.

in #worldtravel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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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왔다.
나는 한국이 너무 좋다.
그냥 무작정 좋다.
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뭐가 좋은건지 무엇이 좋지 않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또 그럭저럭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계속해서 하고 싶은 무언가가 마음속에 있고 그걸 하고 있는 것은 행복하다.

나는 내가 세계일주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는 먼저 ‘세계일주가 무엇인가’ 라는 정의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 그 정의는 누구도 내릴 수 없다.

다만, 나에게는 ‘3년, 6개 대륙, 50여개국, 2번에 나누어서 연속적으로 여행하는 그것’이 ‘세계일주’였다.
그걸 못하고 ‘1년, 2개 대륙, 4개국, 한번에 여행’ 했기 때문에 나는 세계일주에 실패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래서 내가 낙심하고 있느냐? 예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 여행 중 작은 순간순간에는 낙심하기도 했다.
여러가지 사업을 구상하고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열 받았고,
사람을 믿었지만 사기당해서 힘들었고,
늘 흥정했지만 실패해서 속상했고,
무수히 많은 시도들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마음이 너무나 단단해졌고 견고해졌다.
실패에 내성이 생겼고 지금 나는 실패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 실패를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씩 더 깊게 알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여행중에 관심이 생긴 몇가지 것들을 해나가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또 실패하는 중인 것 같고, 몇번의 실패를 더 경험하게 될 것 같다.
언젠간 성공하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 글에서는 이 실패의 과정들을 조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70프로는 멋지다. 30프로는 미쳤다.
멋지다는 사람중 일부는 나에게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미쳤다는 사람 중 일부는 자기와 다른 인생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를 정말 아껴주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자료조사나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봐도 결국은 귀차니즘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3년을 여행하기로 했다. 대륙당 6개월은 여행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1년반정도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여행하고 잠시 귀국했다가,
재정비 후 다시 출국해서 호주-남미-북미를 여행하는 계획이었다.
나름 여행의 컨셉도 정했다. 세계의 유명한 스포츠 액티비티를 다 해보자.
그래서 내가 정한 첫번째 나라가 인도였고 요가로 시작을 하려했다.
마무리는 미국에서의 PCT(pacific crest trail), 총 거리 약 4,200km의 미 서부 종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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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나라, 인도 (3개월)
인도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뻔하디 뻔한 길막 사기 (길이 막혔으니 우리를 따라와라…)를 당했다.
델리의 교통혼잡과 매연과 소음 그리고 사기꾼들에게 정신을 빼았겼다가
요가의 본고장 리시케시에 가서야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인도의 첫인상은 슬로건 그대로 인크레더블 (incredible)했다.

요가강사과정 코스를 한달동안 밟았다.
세계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되도 않는 영어를 써가며 우여곡절끝에 강사과정을 마쳤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요가 강행군.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요가라고 생각하는 아사나 (하타, 아쉬탕가) 부터
명상, 철학, 해부학, 생리학, 만트라 (기도), 클렌징, 프라나야마 (호흡법) 까지 요가의 모든 것을 다 배웠다.

식단조절까지 해가며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몸이 많이 건강해졌고 마음도 튼튼 (?) 해졌다.
첫번째 나라로 인도를 선택하고 요가를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영어가 엄청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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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빳사나 명상.
아마 내 세계여행 동안 가장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리시케시에서 요가를 마치고 다시 떠난 여행길에서 푸쉬카르라는 도시에 들렀다.

나는 위빳사나 명상센터를 찾았고 10일동안의 코스에 참가했다.
휴대전화를 반납했다. 주변사람과 이야기는 커녕 메모조차 금지였다.
매일아침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명상만 하다가 잠들었다.
온몸이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팠다. 명상을 하며 내면의 무수히 많은 것들이 충돌했다.
너무 힘들었다.
그 시간을 버텨낸 후 나는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물론 10일만에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도 내가 변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생각해보지 않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니.
그렇게 아주 조금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잘 못하고있다.

그렇게 명상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나는 남은 인도여행을 했다.
주로 나는 혼자 움직였다. 움직이며 만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동행하기도 했지만 혼자가 편했고 좋았다.
아니, 혼자여도 나는 전혀 문제 없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그 혼잡하고 사기꾼이 득실거리는 인도에서 나는 먼지를 맞고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을 느꼈다.
작은 사고라면 왼쪽 다리를 개한테 물린 정도.
지금 영광스러운 흉터를 웃으며 보지만, 도시를 옮겨가며 병원을 4번이나 가느라 참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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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리시케시 - 맥글로드간즈 - 델리 - 아그라 - 푸쉬카르 - 조드푸르 - 자이살메르 - 우다이푸르 - 바라나시’ 를 3개월간 여행했다.
그리고 나는 육로를 통해 두번째 나라 네팔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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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라, 네팔 (2개월)
네팔에 간 큰 이유는 바로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문이었다.
바라나시부터 포카라까지의 육로이동은 지옥같았지만 (버스에서의 네팔 전통 음악 디제잉은 최악이었음;;)
네팔은 인도에 비하면 정말 천국이었다.
특히 포카라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천국이었다. 그 여유있는 페와호수와 사람들.
도착해서 부랴부랴 나는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윈드폴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사장님이 빌려주신 장비로 산에 올랐다.
나는 안나푸르나 ‘서킷 트레킹’을 했다.
안나푸르나 산의 주요 봉우리들을 가운데 두고 그것 주변을 돌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트레킹.
보통 2주정도 소요된다. ‘트레킹’ 정도라고 무시할 수도 있는데 그 마저도 최고 고도가 무려 5,416m (소롱 라 패스) 였다.
총 16일이 걸렸고 틸리초 호수에 갈 때는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다들 말렸다.
중간에 내려온 팀도 많았다.
그 날, 고산병까지 겹쳐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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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산에서는 총 두번을 울었다.
첫번째는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빽빽이 들어찬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두번째는 고산병을 이겨내고 틸리초 호수에 갔을 때 구름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틸리초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막 쏟아졌다.
그렇게 나는 산에서 무사히 내려왔다.
그런데 내가 내려온 뒤에 눈이 많이 내리고 눈사태가 나서 사람들이 고립되는 사고도 있었다.
무언가 도운 것 같았다. 나는 살 운명이었다. 될 놈은 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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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온 뒤에는 카약을 배웠다.
카약을 배우며 그 코스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뒤집혀 30초 넘게 나오지 않아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롤링(뒤집기) 연습을 하다가 오른쪽 어깨를 심하게 다쳤다.
그러나 그 카약센터에서 일을 하고 싶을 정도로 카약이 너무 매력적이었고 사람들도 너무 좋았다.

그 이후에도 포카라에 더 머물렀다.
낮에는 책을 읽었다. 명상을 하고 요가를 했다.
페와호수를 걸었고 수영했다.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그래봐야 몇권이지만 내가 이렇게 책만 읽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게 신기했다.

밤에는 술을 마셨다.
장기여행자들과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포카라에서 벌이는 술판이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겠는가.
매일밤 간단한 맥주파티가 열렸고 거기서 피어난 이야기들은 정말 좋은 안주거리였다.

어느 순간 활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발견했고,
슬슬 이동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UA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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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나라, 아랍에미레이트 (1주일)
부자도시 두바이로 떠나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네팔 포카라에 있는동안 한곳에 머물렀던 나는 사람들과 그곳의 모든 것에 듬뿍 정이 들어 있었다.
2달을 그곳에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던 것 같다.

물가 비싼 두바이에서 어쩔수 없이 묶게 되었던 10만원 짜리 중저가 브랜드 호텔의 방은...정말...너무나도...행복했다!!!!!!!!!
깨끗한 시설물과 침대, 새하얀 이불. 나는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빨개벗고 잤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돈을 벌어서 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싶다.’ 보통 장기여행자들은 두바이는 비싸서 별로라고 한다. 나는 달랐다.
한국에서의 나는 도시도 좋고 시골도 좋았다.
딱히 어떤 사는 곳에 대한 견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순간 나는 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봤다.
그리고는 잘 정돈되고 구획화 된 두바이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고 좋았다.

물론 지난 두 나라가 인도와 네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누구라도 그럴법 했지만 당시 나의 느낌은 굉장히 강했다.
그 이후, 나는 여행에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즐거운 곳의 사진을 봐도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돈을 더 벌고 잘 정돈된 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원래 그런 ‘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류’가 어떤 ‘류’인지 까지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 스스로를 마구 정의내려버리는 것 같아서…
아직 어떻게 살지 모르니…
좀 열어두고 그정도 까지만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또한명의 은인 덕분에
여행박람회며 요트에서 하는 저녁식사, 사막사파리에서의 VIP석, 페라리월드 등
두바이와 아부다비의 핫플레이스들을 두루 경험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두바이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무표정으로 일에 치여 살아가는 모습이 서울과 흡사 했지만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점이 나는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국을 그리워 하며, 환율이 많이 싸진 이집트로 어서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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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나라, 이집트 (6개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는 아주 짧게 여행했다.
피라미드는 교과서에서 본 그대로였고 나에게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카이로의 극성이라던 장사치들은 내가 보기에는 인도의 그들과 비등한 수준이지 더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 조금 집요하긴 했다.
이 두 도시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스타벅스…였다.

드디어 내가 여행을 마무리 한 다합으로 넘어갔다.
물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는 물 앞에 사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매일같이 물가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가 수영을 하고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호텔을 계약해서 호텔에 살게 되었다. 내 꿈 중 하나였다. 호텔에 살기. 참 좋았다.
나는 이집트 다합에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려고 왔었다.
그런데 주변 친구들이 모두 하나같이 왜 프리다이빙을 배우지 않고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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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프리다이빙이 뭐길래?
친구가 소개해준 강사를 찾아갔다.
나는 그에게 프리다이빙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특히, 다이빙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그는 장사치가 아니었다. 그는 스승이었다.
나는 그의 가르침이 너무 좋았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동안 늘 수업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작한 프리다이빙에 나는 홀딱 빠져버렸고,
이미 여행에 흥미를 잃은 나는 그렇게 이집트 다합에 6개월 이상을 더 머물렀다.
오직 프리다이빙만을 위해서였다.
강사과정을 마치고 대회에도 참가했다.
강사 과정 중간에는 나를 가르쳐주셨던 트레이너의 죽음을 맞이하는 슬픈 일도 있었다.

대회에서는 운좋게도 CNF종목 (핀 없이 들어가는 것) 에서 디피스트 다이버로 선정되어 노즈클립 선물도 받았다.
다합에서는 가장 길게 살았다. 거주를 했기 때문에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사람들이 정말 많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은 한국사회와 같은 희노애락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참 흥미로웠다.
그런데 나는 점점 지쳐갔다.
몸무게가 10kg이 넘게 빠졌다. 먹거리도 모두 다 질렸다.
하루 24시간 중 1시간 이상을 프리다이빙 트레이닝을 하며 숨을 참고,
그곳 음식이 물려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 가고싶은 마음이 항상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다합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나는 기록에 집착하고 있었고 프리다이빙을 대하는 처음의 내 태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던 프리다이빙이 나에게 더이상 행복한 무언가가 아니게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이악물고 다행히 대회는 무사히 잘 마쳤다.
내가 생각한 기록은 아니었지만 다친 곳 없이 마친 것에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 나는 터키를 경유해서 귀국했다. 한국으로 간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스티밋에 다른 글을 썼다가 지웠다.
첫번째 글을 이걸로 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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