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비츠 샵(Witz Shop) - 7화 : 태윤의 이야기
모처럼 외가에 들렀다. 주말 라디오는 녹화로 진행된 덕분에 매니저 일한 이래 처음으로 있는 휴가였다. 어엿한 사회인이지만 나를 여전히 철부지 손자로 보는 할머니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손맛이 느껴지는 저녁도 먹고. 어느덧 주말이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할머니, 저 갈게요.”
“태윤이 벌써 가게?”
“네. 추운데 나오지 마세요.”
배웅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본다.
서진 누나에게 줄,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손에 들려 있었다. 건강에 안 좋을까봐 일부러 샷은 한 번만 추가했다. 아무튼 자기 몸 신경 안 쓰는 건 일등이다. 맹물같다고 해도 나라도 누나 몸에 신경써야지. 내가 매니전데, 그럼.
그런데 지금, 10시 10분이라고?
아씨, 망했다.
방송국 지하에 차를 대고 뛰다시피 해 4층으로 직행했다. 늦는다고 뭐라 하거나 신경 쓸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헉헉거리며 라디오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서진 누나는 벌써 원고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아, 좀 늦었구나.
쭈뼛쭈뼛 다가가 커피를 건넸다.
“어? 커피네. 부탁 안 했는데, 고마워.”
“아니에요. 늦어서 죄송해요. 일찍 출발한다는 게 그만...”
“괜찮아. 나 PD님이랑 할 말 있으니 좀 있다 보자.”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벽을 치는 사람. 매니저가 된지 근 세달 동안 내가 서진 누나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지금도 그렇다. 다른 연예인들처럼 싸가지가 없거나 인성이 개차반이어서 늦었다고 자르네 마네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핑계를 들어 줄 생각은 없는. 그건 마치 네 영역이라는 듯.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서진 누나가 내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들기고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자리에 앉아 음향을 체크하고 목을 푸는 누나의 모습이 부스 유리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온에어 등이 켜지고 오늘의 라디오가 시작됐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음, 오늘의 주제는 특별히 사랑으로 하죠. 사랑을 하고 있거나, 했거나, 혹은 하고 싶으신 분들. 시청자 게시판 혹은 오랑우탄과 문자로 남겨 주세요. 문자는 #0613, 단문 50원 장문 100원입니다.
멀뚱멀뚱 서 있으니 작가님이 옆에 앉으라며 의자를 내어주셨다. 안 그래도 다리 아팠는데, 감사합니다 쏘 스윗 천사 작가님! 이 라디오는 저 꼰대틱한 PD님이 아니라 작가님이 살리는 것이죠. 그럼요! (물론 저 PD님도 능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힐끗힐끗 문자 게시판을 보며 반응을 살피며 동시에 서진 누나를 보느라 눈동자가 바삐 왔다갔다 했다. 어라. 서진 누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2초 간 정적이 흘렀고 PD님이 일어서려는 찰나 누나는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라디오를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지. 걱정됐지만 여기서 나까지 사고치면 안 된다 싶어 애써 문자 게시판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 너도 나 좋아하잖아. 이런 식으로...]
...어? 방금 내가 뭘 본 것 같은데?
PD님의 눈치를 보다가 휙 지나가버린 문자의 스크롤을 다시 올려 내용을 사진으로 찍은 뒤 재빨리 원래대로 게시판을 돌려 놓았다.
[010-****-4782
전에 내가 라디오 끝나고 방송국 1층 아티제로 나오라 했잖아. 그때 왜 안 나왔어 서진아? 너도 나 좋아하잖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곤란하지 자기야.]
멍했다. 그냥 말그대로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 자리에 굳은 채, 멀거니 앉아 있었다. 누나 애인일...리가 없지 참.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서진 누나가 맺혔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까. 그런 거겠지.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넘어가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무작정 PD님을 붙잡았다.
PD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PD님, 아까 제가 문자 게시판에서 이상한 걸 봤는데 그게-”
“아 그 좋아한다느니 나오라느니 그거? 그런 거 뭐 라디오에서 자주 일어나.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넘기는 거지.”
“그렇지만, 그래도…”
“아니 디제이도 가만히 있는데 왜 그러시나. 그 것도 관심이고 애정이에요, 이 친구. 아직 사회생활을 모르네.”
PD가 뭐 이런 게 있냐는 얼굴로 내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인심 쓰듯 훈계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순간적으로 열이 올랐다.
“아니 PD님, 말이 심하시네요! 이게 어떻게 팬이고 관심이에요! 이건 명백한 범죄라고요! 스토킹!”
“아니 어른이 말하면 옳은 줄 알아야지! 어디서 따지고 들어! 그리고, 그런 문자 오는 게 내 책임이야? 우리도 게시판에 경고문도 올리고 했어요, 어쩔 수 없다니까 거참.”
“그럼 이거 신고해도 되나요?”
“아니 이 친구가-”
“떳떳하시다면서요. 그러면-”
“그만해. 김태윤. 뭐하는 짓이야.”
“아, 누나! 글쎄 PD가-”
“PD가라니. 어서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아직 신입 매니저라 뭘 잘 몰라요.”
누나가 고개를 들더니 내 머리를 꾹 누르곤 다시 한 번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PD는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누나를 내려다 보더니 다음부터 이딴 식이면 국물도 없다며 스튜디오를 문을 발로 뻥차고 나갔다.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까 그거 보고 당황한 거 맞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제가 경찰에도 신고하고 기획사 측에도 말할 거니까. 진짜 저 PD 꼰대 새끼!”
“흥분하지 말지? 예전에도 그런 일 많았어. 원래 유명한 DJ들은 다 그래. 그냥 넘겨 애처럼 굴지 말고. 가서 PD나 데려오고. 펑크나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
“하지만-그치만-”
“눈 가리고 귀 막아. 들려도, 보여도 아무것도 담지 마. 그게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니까.”
“....”
실랑이하는 사이 광고가 끝나가고, 서진누나는 다시 부스로 들어섰다.
쾅- PD가 문을 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방송은 다시 이어졌다.
그런 누나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건가요. 설령 누나가 진짜 그렇다 해도, 저는 아니에요. 그렇게는 안되겠어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온 민서진씨 매니저 김태윤입니다. 혹시 고성하씨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 다름이 아니라……”
하.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른들의 세계는 너무 어렵다. 비상계단 문을 열고 스튜디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분명 복도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데, 신발 밑에 진득한 타르같은 게 붙어 놔주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겨우겨우 스튜디오로 돌아갔을 때, 서진 누나는 4부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었다.
“아 맞다. 방송국 앞에 베이커리가 있는데, 그 아티 어쩌고 저쩌고 하하하.... 제가 그 가게 단골이거든요. 오늘따라 그 집 타르트가 먹고 싶네요. 저번에도 누가 저보고 거기서 보자고 했는데, 못 갔어요. 바빠서. 여러분들도 그런 단골 가게가 있나요? 안 가면 허전하고 막 생각나고. 제게 여러분은 그런 존재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는 여러분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하하. 막상 말하려니 쑥스럽네. 앞으로도 계속 저 많이 사랑해주세요. 제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지막 곡은, Ariana Grande의 breathin입니다. 새벽 한 시, 서진이었습니다. 은하수를 건너 별자리를 헤아리는 밤. 내일도 다시 찾아올게요.”
written by witz-z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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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https://steemit.com/kr/@witz-baldr/witz-shop
1화 - 비의 이야기: https://steemit.com/kr/@witz-baldr/witz-shop-1
2화 - 설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2
3화 - 서진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3
4화 - 성하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4
5화 - 비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5
6화 - 설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6
8화 - 성하의 이야기: https://steemit.com/witzshop/@witz-baldr/witz-sho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