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츠 샵(Witz Shop) 5화 - 비의 이야기
“얘들아, 우리 좀 조용히 해야되지 않을까..?ㅎㅎ”
그렇다. 우리는 조용히 해야 했다. 시내버스 안, 당장 우리를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는 서너 명의 눈빛들. 낭랑 18세 여학생들의 수다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건 맞다만 오늘따라 유독 이야깃거리가 많았단 말이지..
“아니 오늘 내가 간 카페에서 우리 오빠들 노래가 계속 나오길래 이건 누구 선곡이야 하고 봤더니 글쎄 그 언니가 있었다니까?? 거기 알바하나봐..진짜 급 반가웠자나 ㅋㅋ”
“그 언니가 누군뎅”
“아 왜 그..그 어제 우리 오빠들 보러갔을 때 쓰러졌었던..!”
“아..ㅋㅋ그 언니? 아 근데 그 언니 좀 이상하더라..그 정도까지 긴장할 일이었나”
“그러겡..내가 옆에서 엄청 심호흡 열심히 했는데 따라하지도 않더니!ㅠ”
“트라우마같은 거 아냐?”
“에이...트라우마는 무슨, 트라우마가 아무한테나 있냐ㅋㅋ심리분석가인줄ㅋ”
“아 왜ㅋㅋ 그런거 있잖아 무대공포증 그런거“
“몰라ㅋㅋㅋ 아무튼 중요한건 그 언니도 우리 비투비 7만 팬중 한 명이었다는 거지!!”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다 집에 도착했고, 난 그대로 침대에 퍼져 다음날 아침까지 꿀잠을 잤다.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느낀 건 내가 잠이 정말 많은 인간이었다는 점과 반면 나의 주변 친구들은 정말 잠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 그리고 주말에 집에 와서 그 누구의 방해도 없는 딥슬립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운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3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어서 일주일 내내 기숙사에 있어도 주말에 집 갈 생각에 그럭저럭 버틸만 한데, 지방에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주말에도 학교에 남아 있곤 한다.
‘윽..어떻게 버티냐..’
집이 가까운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그보다 더한 건 나의 부모님의 교육방식이시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는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해도 좋다’는 신념을 가지고 가끔은 학원도 빠지고, 숙제도 안하고, 잠도 참 많이 잤다..ㅋㅋ 그 덕에 지금의 잠순이 단비가 된것일지도..아무튼간에 요즘 주말에 와서 잠만 자는 딸을 나무라기보다 안쓰럽게 여기는 부모님께 감사하고 죄송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다..뭐 이런 얘기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엄마며 아빠며 다들 왜 이러지..이제 막 시험을 마친 딸에게 주구장창 시험 얘기만 꺼낸다.
“딸, 이번엔 왜 수학을 그렇게 봤어..우리 단비가 시험에 말렸나?” “아니..그냥 좀 어려웠어..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제일 속상한 사람은 난데..
주변에서 인생이 달린 시험이라는 소리를 워낙 들어서 적응될 법도 하지만 그 항상된 압박감과 시험이 끝난 뒤에도 따라오는 ‘남들이 말하는 나의 인생이야기’는 매번 새롭다.
그 새로움은 매일매일이 똑같은 삶, 그리고 그 무생물같은 삶이 당연시 되는 이 3년을 서서히 버겁게 만든다.
“아빠는 니가 한 과목에서 폭망하고 울지 좀 말았으면 좋겠어 항상. 그렇게 나약한 모습 보이면 안된다. 세상은 늑대의 소굴과도 같아서 니가 남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늑대들은 좋다고 물어뜯는거야. 아빠가 우리 딸을 아무리 사랑해도 지켜주지 못하는 때가 있잖아..그럴 땐 니가 스스로 강해져야 돼.”
“그리고..우리 딸 울면서 전화하면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아파..”
수십 번은 들은 말이다. 그치만 내가 우는 건 단순히 성적을 못 받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그 허무함과 억울함과 속상함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성적이 안 나오면 아무도 그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아니, 애초에 노력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난 그럼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거야..? 내가 한 노력들은 다 아무것도 아닌거잖아..그저 그 50분을 위해서 한달을 바치는 그 노력은..내가 감내하는 그 모든건 남들 눈엔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내가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우는 것 하나도 마음대로 못하면..그리고 내 나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엄마 아빠인데 그마저도 하면 안되는거면 나는..나는 어떻게 살으란거야 대체!! ”
“단비야.”
“...나 오늘 학교 일찍 갈게.”
그렇게 격한 감정을 내뱉고 어찌어찌 집을 나오긴 했는데…
‘꼬르륵--’
생각해보니 밥먹다 나왔지..이 와중에도 내 위장은 너무나 정직하다. 인체의 신비.
‘아..밥은 마저 먹고 나올걸..역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까ㅠ 돈은 있겠지이…?’
다행히도 얼마 전에 받은 용돈이 남아 있었다. 투벅투벅 주변에 보이는 가까운 카페에 들어왔다.
[오늘의 추천 메뉴 ‘햄에그 파니니’]
마침 눈에 띄는 가나슈 타르트. 기분이 우울할 때 달달한 걸 먹으면 좀 나으려나..평소엔 간식으로 먹는걸 끼니로 때우려고 하고 있다. 아무튼 포장된 가나슈 타르트 한 개를 골라 계산대 앞에 가져갔더니 점원이 나온다. 어라..? 낯익은 얼굴..또 그 언니?!!
‘허..똑같은 카페에 들어온 내가 용하다..ㅋㅋ’
“영업 시간 아닙니다.”
단호하시네요 이 언니?
“아이..언니이ㅎㅎ”
“9시 오픈입니다.”
언니의 단호함에 눌려 반가운 마음도 잊고 금세 뾰루퉁해진 나는 카운터에 팔을 걸치고 투덜투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아니 뭐..내가 일찍 온건 맞는데 가나슈 하나 계산을 못해주나..밍..”
“...”
“아 사실은 제가요오..오늘 아침을 못 먹었거든요..ㅠ 아니 왜 그렇게 부모님들은 고등학생을 배려 안해주는지 몰라..!”
“...”
“나 오늘 부모님이랑 싸우고 나왔거든요..우는 것도 내맘대로 못울게해. 언니도 고딩때 그랬어요?”
“...”
그렇게 내가 대답없는 대화를 하는 동안 언니는 쓰레기 봉투를 갈아 끼우고, 기계를 닦고, 오븐을 데우고, 가게를 오픈했다. 그리고 가나슈 타르트를 계산했다.
‘보기보다 원칙주의자네..’
할일도 없겠다 계산대에서 아그작 아그작 소리를 내며 바삭한 타르트와 쫀득한 가나슈를 즐기고 있을때 즈음, 아까 들어올 때 봤던 오늘의 추천메뉴가 떠올랐다. 아는 맛이 무서운 거라더니 정말 무섭게도 순식간에 내 배고픈 뇌가 햄에그 파니니를 떠올리며 사고를 정지해 버렸다.
“저..언니 햄에그 파니니도 주문할게요.”
“점심 메뉴라 안됩니다.”
“에??! 아니 저거보고 들어왔는데 점심메뉴라니ㅠㅠ나 아침도 못먹고 나왔는데..ㅠ”
“...”
“아아..그냥 데워주기만 하면 되잖아요ㅠ 우리 아빠는 3분도 안 돼서 만들더만!”
“...”
“언니이..한 두번 본 사이도 아니고 이 정도는 해주죠 좀?”
“점심 메뉴라 안됩니다.”
“아니 그보다 진짜 왜 쓰러진 거예요??”
“...”
“내가 그때 이후로 친구들이랑 추리하느라 애먹었잖아요..ㅎㅎ”
“남의 일에 관심 꺼.”
“...어..혹시 트라우마..그런거에요?”
언니는 순간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찰나였지만 나한테는 분명히 느껴지는 놀람과 상처가 담긴 눈빛으로..
“진짜예요…?”
“...”
“...”
한참의 이상한 정적이 흐르고 허공을 가르듯이 한 마디가 툭 내뱉어졌다.
“왕따. 예전에. 그래서 사람이 싫어.”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시 흠칫하며 언니가 나를 노려봤다. 놀람도 슬픔도 어느 한 쪽도 아닌 미묘한 눈빛이었다.
‘딸랑’
나의 말과 동시에 카페 문에 달린 작은 벨이 울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렇게 두 번째 손님이 계산대 앞에 서고 밀려난 나는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되게 한가하네..’하는 생각과 함께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항상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조용한 곳을 찾던 내 습관이었다. 노트북을 꺼내 자연스럽게 유투버들의 영상을 보다가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탁’
“몇살이야 너..?”
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데워진 햄 에그 파니니를 들고 친절하게도 이 구석진 자리까지 와서. 이번엔 상처뿐인 눈빛으로..
잡념이 시작됐다. 내 두려움, 내 공포. 마주하기 싫은 순간이 드디어 다시 찾아왔다.
written by witz-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