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지워지지 않는 말

희년을 돌아 새로 시작된 시즌의 첫 번째 미션은 엉뚱하게 외국어였다. 영어 공부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직관어는 해석할 수가 없다. 경험할 뿐. 그러니 닥치고 일단 시작해야 한다. 뭐부터 해야 할까?
상식을 따라, 공인영어시험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관련된 표지들이 등장하고 이런 건 속전속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평생 영어 점수 따위는 따지 않을 거라고. 꽤나 비장한 맹세를 하고 살았다. 나는 직관어연구소 소장이니까. 직관어를 익히기에도 인생이 부족해. 원 없이 지구를 쏘다녔지만, 영어는 젬병이다. 그래도 여행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사색을 하고 직관어를 떠올리려 가는 거지, 친구를 사귀러 가는 게 아니니까. "Do you have~?", "How Much?", "Yes" or "No", "Thanks" and "Excuse me" 그리고 "Sorry"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극 내향형 마법사는 어차피 하루 종일 침묵모드인데.
반발심 같은 것도 있었다. 아마도 스펙 문화의 시작점이었던 나의 20대에, 극 직관형 마법사는 '놉! 그건 아니지, 삶은 스펙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야!' 선언을 했다. 노 영어 라이프! 그리고 그건 자존심으로 굳어버렸다.
후회도 없고 자부심까지 있는데 갑자기 외국어라니? 알 수 없는 미션이 수도 없이 주어졌지만, 역주행 같은 이 미션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길에는, 외국어 공부에는 왕도가 있을 거라. 모두들 그 방향으로 달렸으니 거긴 탄탄한 정답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 그랬나 보다. 그러면 뭐, 답은 당연하다. 남들이 간 그 길을 가는 것. 부랴부랴 공인영어시험을 알아보았다. 말도 못 하고 쓰지도 못하니 선택지는 하나뿐. "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가장 빠른 일정으로 시험 접수를 하고 남은 시간은 3주. 빨리 내 위치를 파악해 보자. 이 길에는 정답이 있으니 몇 번째 계단인지 확인하면 견적이 나올 거야. 그런 다음엔 성실을 무기로 기어오르면 되겠지. 늘 하던 대로. 그래도 그냥 보긴 뭐하니 그들의 교과서를 일순(一巡)하자. 그게 예의니까. 하루에 100단어씩 외우고 기본 인강 세트를 3~4개씩 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뜨고 잠들 때까지 영어 공부를 했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기억에 남든 안 남든. 그러자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평생 아파본 일 없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야. 특히 좌뇌가. OMG! 어른들이 머리가 썩었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방치된 녹슨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면역반응이었다는 걸, 애써 무시했다. 의도적 오독의 역주행을 몸이 강력히 거부하는 걸 알면서도, 제발 이번에는 날 좀 냅두렴. 나도 좀! 남들처럼, 정해진 길 쫌! 가보자! 밀어붙였다. 그리고 3주 뒤.
새파란 청춘들 사이에, 사춘기 아이들의 교실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듣기평가를 봐야 하니까. 조급한 마음에 배속으로 듣던 강의를 정속으로 줄이자 제법 들리더라고. 어쨌든 지구를 쏘다닌 시간만큼 듣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좀 낫겠지 기대를 한 거야. 그런데, '어라, 뭐라는 거야?' 첫 문제를 놓치자 멘붕에 빠져 버렸다. 웅웅웅웅 영어냐? 방언이냐? 게다가 속도 싸움이라는 독해는 "딩동댕, 15분 남았습니다." 세상에, 30문제를 내리찍어보긴 처음이다. 국룰 3번으로.
새파란 아이들의 퇴실 행렬에 떠밀리며 건널목 신호등 앞에 서자, 현실감이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뭐 하고 있는 거지? 나 뭐한 거지?'
하필 레드문 시즌과 겹쳐, 좀처럼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둘로 나뉘어 격하게 싸워댔다. 뭐 하는 짓이냐며, 이제 시작이라며. 오기 같은 것이 생기고 절박함 같은 것이 피어 올랐다. 사막에 길 내기, 밀림에서 길 찾기로 점철된 인생에 왕도라는 것을 드디어 만난 것 같았으니까. 남들세계 입장권을 받은 것 같았으니까. 그런 마음이 처음으로 든 거야. 전혀 부럽지 않던 그 세계, 심지어 경멸하던 그 세계. 지루하고 지겨워도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면 끝이 보인다는. 시작을 만난 것 같았으니까. 정답이 있는 길이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어. 이 길에도 왕도는 없어. 없었다. 그 왕도.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나. 18년을 공부해도 심지어 토익 만점을 맞아도, 외국인 앞에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우리네 영어 실력.
"언어는 습득하는 거예요."
멘탈이 붕괴된 마법사에게 존쌤이 말하고 바나나쌤이 말했다. 이미 크라센 박사가 40년 전에 밝혔다는 그 '습득이론'이 알고리즘을 타고 마법사에게 도착했다. 누가 뭐래니. 직관어도 그런 것을. 누가 직관어를 어떻게 배우냐고 물으면 '습득'해야 한다고, 내 답도 그것뿐인데. 영어도 외국어도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몰랐을라고. 외면하고 싶었던 거지. 3주 만에, 한달 만에, 3개월 만에 완성! 할 수 있다는 그것들이, 너무 달콤하게 들렸던 게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야. 지쳤으니까. 이번 시즌은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를 했던 거야. 지쳤으니까. 그러나 본질이 어디로 갈까. 본능이 사라질까. 영어도 언어라고. 태어나면 걷는 것처럼 듣고 말하게 되는 그것. 배우지 않아도 하게 되는 그것은. '습득하게' 되는 거지 '공부하는' 게 아니라고. 들리는 것,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것부터라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이들이 직관어를 저절로 익히는 것처럼.
누가 뭐래니? 그게 고달프니 도망치고 싶었던 거지. 지쳤으니까. 역주행을 해서라도 지름길 따위를 찾고 싶었던 거지. 지쳤으니까. 조도 클레멘타인도 그랬어. 서로에게 지쳤으니까. 그래서 기억을 지웠지. 하지만 어떡하니, 몸이 기억하는걸. 뇌의 정보는 지워도 몸에 각인된 운명은 다시 반대편 플랫폼으로 달려가게 하는걸.

외국어에 왕도는 있었다. 좋아하는 걸 계속 보고 듣는 것. 반복해서 보고, 이것저것 보라고. 저절로 입에서 말이 터져 나올 때까지. 입력이 채워지면 입이 내뱉을 거야. 그게 인간 매커니즘이니까. 대신 머리로 읽지 말고, 몸으로 들으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면 입이 저절로 말을 하는 거야. 쏼라쏼라~
수많은 직관어를 입력했다. 좌충우돌 사방팔방 한계까지 달리고 달려서 입력을 채워나갔더니, 어느새 마법사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이 이끄는 것을 보고 들으면, 나의 입이 외국어를 내뱉고 있을 거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지쳤으니까.
영어 구루들의 가르침을 따라 100번 볼 영화를, 대사까지 달달 외울 만큼 보고 또 볼 영화를 골라야 했다. <이터널 션샤인 오브 더 스폿리스 마인드> 직관이 대뜸 20년 전 그 영화를 내밀었다. 대사도 많지 않고 발음도 잘 안 들리는 이 영화를 봐야 할까?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알아들은 문장은 'I'm so tired.'였다.
지쳤어도 지울 수 없다. 몸이 기억하고 운명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직관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마법사 역시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일지언정, 우리의 운명은 인연은,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지난 생에도 그 지난 생에도, 반복되었으니까. 반복될 거니까. 너를 습득하려고. 우리의 생을 내뱉으려고. 그게 인생어를 배우는 유일한 왕도니까.

이제 이들이 지운 기억을 나는 100번 보아야 한다. 달달 외울 때까지 보려면 1,000번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와 클레멘타인은 알아야 한다. 마법사가 둘의 인연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지워봐야 소용없고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 기록된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이니까.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지울 수 없는 블록체인 같은 우리의 마음이 흠 없어지려면 우리는 계속 기억을 만들어가야 해. 어두운 기억을 밝은 기억으로, 불안의 기억을 평안의 기억으로, 절망의 기억을 환희의 기억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햇살이 마룻바닥으로 밀려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처럼. 마침표 없는(the spotless) 이야기를,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가야 해. 어떠한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니까.
영어 습득 시작!
[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98. 이터널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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