温铁军|生态文明与比较视野下的乡村振兴战略 원톄쥔 - 생태문명과 비교관점으로 보는 향촌진흥전략 part 1

in #wentiejun7 years ago (edited)

역자:
작년에 번역했던 글이, 원톄쥔 선생님의 한국 방문/강연 이후 ‘녹색평론’지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evernote.com/l/AamgODfSDwxIZ5XpeO8roB5LGEGq4IT6-kc

한살림과 행복중심, 두레생협이 주최한 원선생님의 강연에 김종철 선생님이 참석하셔서, 원선생님의 허락을 득하고 게제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셔서 번역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올해 초에 원선생님이 상하이대학학보에 기고하신 글을 읽어보니, 작년 글의 후속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여기 나오는 많은 내용은 문명사를 포함하여, 작년 방한 당시 강연과 별개로 한국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구두로 나누셨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도올 김용옥 선생님). 저는 통역겸 수행으로서 배석했기에 인상깊게 들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외부 기고를 하셨기에 번역해서 관심있는 분들과 나눕니다.

중국어판 백년의 급진에도 기후변화와 인류문명의 변천 관계에 대한 초기 생각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번 내용은 이를 더 구체화시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명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이런 분석과 주장을 어떻게 판단하실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주제 넘게 몇가지 제가 느꼈던 단상을 나누어 보자면....

  1. 시진핑이 이끄는 현재의 레짐이 과연 진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나라가 될 것인가 상당히 궁금합니다. 사실은 후자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2. 또, 원선생님이 주장하시는 향촌자치의 치리, 즉 협치모델이 (저는 한국적 맥락에서 그렇게 읽었습니다.) 적절한 민주주의의 훈련 없이 중국의 향촌에서 혹은 도시의 공동체에서 어떤 방식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지 꽤 궁금합니다. 이와 별개로, 연합사라고 불리는 종합형 마을 협동조합의 예가 있기는 한데, 오히려 요새는 중국적 맥락에서의 사회적 기업 이야기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선거와 같은 정치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경제, 복리, 문화의 영역에 국한된 논의입니다.
  3. 이원적 정치구조를 말씀하시는 원선생님의 주장과도 상당히 일맥상통하는 칭화대학 대니얼 A. 벨 교수의 ‘The China model’이라는 책이 김기협 선생님의 한글판 번역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중국어 판은 없습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시립대학교의 하남석교수님께서 중국어판을 찾아 주셨습니다.
https://www.amazon.cn/dp/B01KWH4A7O/ref=sr_1_1?ie=UTF8&qid=1519999841&sr=8-1&keywords=daniel+bell
매번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시고, 오류도 잡아주시는 하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중국어판이 없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친구들과 빨랑 공유해야겠습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다다가 저렇게 나오는데 이게 다 공염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ㅎ "

  1. 이글에서 자주 언급하는 ‘19대’ 항촌진흥과 생태문명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지지합니다. 올해, 중앙의 1호문건도 바로 향촌진흥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다만, 중앙내에서도 이해 관계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를 수 있고, ,또 각급 지역에서도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르고, 실천 단계에서는 더 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글에서 원교수님이 언급한대로 중국의 신농촌 건설 정책을 위해서 중국 관리들이 한국 농촌을 방문해서, 새마을 운동의 성과를 공부하며, 동아시아의 전통적 소농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역설이 그런 겁니다. 우리가 알기로 새마을 운동은 바로 그런 소농 마을 공동체를 파괴한 주범중의 하나인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는 원교수님을 포함해서 중국분들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중국이 부러워하는 한국, 일본, 대만의 농협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2번으로 돌아가서, 만일 향촌의 자치가 성숙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는 중국 정부의 정책들은 현장에서 왜곡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향촌진흥에 대한 문건과 주장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장에서의 실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판적 글은 여지없이 삭제되어 버리더군요. 그래서, 원교수님 조차도 자신이 모르지 않는 문제점을 언급하기 보다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실천 내용만 강조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2. 또, 작년 한국에서의 강연과 토론에서 지적되었던, 이글의 주장처럼, 농촌의 자연자원을 금융자산화하여 시장 경제안으로 끌어들이는 문제점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게임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씁쓸하게 답변하십니다. 가능하면 도시민들과 청년, 지식인들이 자본보다 선제적으로 귀촌하고 농민과 연대하여, 국가가 투입한 재원이 인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기를 바라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농촌 타오바오가 국가나 향촌의 기능을 상당부분 대체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본을 꼭 나쁘게만 볼 건 아니겠습니다만, 그 속성상 글쎄요...
  3. 각설하고, 현장의 활동가로서, 여하튼 저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봐야겠죠 ^^.

*이글은 제가 원선생님 허락을 득하지 않고, 무단히 번역한 글이므로 링크 공유외에 배포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温铁军|生态文明与比较视野下的乡村振兴战略 원톄쥔 - 생태문명과 비교관점으로 보는 향촌진흥전략

《上海大学学报》(社会科学版)2018年01期
상하이대학학보 (사회과학판) 2018년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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摘要:全球气候变化是影响人类社会变迁的重要因素。从比较视野出发, 把气候变化导致的农业稳态社会和游牧流动民族之间的长期互动、亚洲大陆气候地理的多样性等因素纳入思考, 可以更深刻地理解中国的国家政治形态、文化延续性、乡土中国的低成本自治等的内在逻辑, 从而更充分地把握生态文明战略与乡村振兴战略的历史意义。对于当下中国而言, 只有通过补短板、再平衡, 全面贯彻生态文明、乡村振兴等国家重大战略, 加强中央政府逆周期的综合协调能力和基层政府夯实乡土基础应对软着陆的能力, 才能使作为最大发展中国家的中国在全球化过程中保持平稳。

개요: 전지구의 기후변화는 인류사회변천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친다. 비교관점으로부터 기후변화가 초래한 농업기반 정착사회와 유목민족간의 오랜 교류와 상호영향을 살펴보고, 아시아대륙의 기후와 지리의 다양성등을 고려하여, 중국의 국가정치형태, 문화연속성, 향토중국의 저비용 자치 등의 내재적 논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전략의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의 중국은, 부족한 곳은 보태주어, 재평형을 이루고, 전면적으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 등 국가의 중대전략을 관철하고, 중앙정부 주도로 시장의 방향에 역행할 수도 있는 종합조절 능력과 지방 기층정부 주도로 향촌의 인프라 다짐을 통해 연착륙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으로서, 세계화의 흐름속에서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中共“十九大”之后, 海内外都在讨论关于生态文明与乡村振兴的一些新提法, 本文主要对两者内涵及其相关性做出阐释。
중국공산당 19대 당대회 이후, 국내외에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의 새로운 독법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이 글은 주로 이 양대 전략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상호 관계에 대해서 논술하고자 한다.

一、全球气候变化对人类农业文明演化的决定性影响
전세계 기후변화가 인류농업문명의 진화에 끼친 영향

近年来的科学研究表明, 人类社会的变迁主要受到气候冷暖变化的制约。
竺可桢是民国时期学业有成的科学家, 新中国就任中国科学院的院长, 他在半个世纪之前中国人普遍相信“人定胜天”的时候就提出过历史沿革受气候变化直接影响的论断。他提出的朝代周期理论在当时还未得到充分论证, 但却被近年来世界上对全球气候暖化高度关注从而促进了科学技术的发展所证明, 人们已经研究出了气候变化的长周期。只要把气候变化周期和人类发展变化周期结合起来就能发现, 今天的很多说法几乎都可以作为“八卦”来看———比如说商朝的陷落是因为商纣王宠幸妲己的荒淫无道。那么, 历史真实是什么?

최신의 과학연구결과를 통해, 인류사회의 변천이 주로 기후의 냉온 변화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됐다.
쥬커전 竺可桢 (CHU Kochen)은 민국시기의 저명한 과학자이고, 신중국에서 중국과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반세기전 중국인들이 보편적으로 믿기 시작한 人定胜天 즉, 인간이 자연을 초극할 수 있다는 사상이 만연할 무렵, 인간의 역사가 기후변화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당시 제출한 왕조주기이론은 당시에는 충분히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가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이를 증명하고,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장주기를 연구로써 밝혀냈다.
기후변화주기와 인류발전의 변화주기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다면 오늘날의 수많은 주장들이 거의 모두 “뜬소문”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상(商)왕조의 몰락은 상나라 주왕이 미인 달기에 홀려 주지육림에 빠진 탓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짜 역사적 진실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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竺可桢 쥬커전

人类在漫长的农业文明之中, 气候只要变暖, 就会导致农耕文明向北扩张;相反, 气候只要变冷, 就意味着游牧民族全面南下。人类不同生存方式的向南和向北的移动, 带来了人类社会的根本性变化。
인류의 유구한 농업문명역사를 살펴보면, 기후가 따뜻해질 때는, 농경문명이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반대로, 기후가 추워지면, 유목민족이 전면적으로 남하했다.
인류는 다른 생존방식에 따라서, 남으로, 북으로 이동했고, 이 이동이 인류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农耕文明在亚洲是灌溉农业, 人们要聚落而居, 需要大量劳动力共同劳作, 因此多子多福, 安土重迁。这本来不是一个负面的概念, 而是一种生态、生活、生产三位一体的农耕文化存在的方式。而北方的游牧民族在宽阔的草原上一定是移动的, 逐水草而居就不能常住。一旦北方变冷, 地面冰雪覆盖的时候, 北方游牧民族就得全面南下, 抢掠农耕民族贮藏的粮食———同时还砍人, 把地留下来放牧牲口。不过, 由草原而来的游牧文化到山边就不走了。中华民族的农耕社会为什么能够长期存在?因为游牧民族南下挤压农耕社会, 逐渐向南进入山区, 中原大族举家南迁, 进山进沟, 躲开了杀戮灾难。所以南方的大姓, 如广东的陈姓源于陈县, 福建林姓源于林县, 都能在中原找到根。
아시아의 농경문명은 관개농업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부락을 형성해서 함께 거주하고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함께 노동한다. 그래서 자손이 많을 수록 좋은 것이고,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안정된 생활을 희구한다. 이는 원래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생태, 생활, 생산'이 삼위일체가 되는 농경문화의 존재방식이다. 하지만, 북방의 유목민족은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면서 반드시 이동해야 하고, 물과 풀이 자라는 곳을 따라서 이주한다. 한곳에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북방기후가 추워지면, 눈이 내려서 지면을 덮을 때, 북방유목민족은 남하해서, 농경민족이 저장해 둔 식량을 약탈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사람을 몰아내고, 그 땅에서 목축을 행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온 유목문화가 산간지역에 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중화민족의 농경사회가 왜 이렇게 오래 지속할 수 있었나 ?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농경사회를 제압함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고 산지에 들어갔다. 중원의 일족들이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 산이나 계곡으로 들어가서 살육과 재난을 피했다. 그래서 남쪽의 많은 성씨들 중, 예를 들면 광동의 진陈씨는 진현陈县에서 유래했고, 복건성의 임林씨는 林县에서 나왔다. 모두 중원에 그 뿌리가 있다.

客观地看, 农业稳态社会和游牧流动民族之间是一个长期互动的过程。每当气候暖化, 农业社会也会发生对游牧民族的驱逐。比如汉武帝逐匈奴于大漠以北之后, 匈奴部族事实上沿着亚欧大陆往西边去, 把欧洲北方部落向西南部不断地挤压, 进而西欧北方的日耳曼人被挤压进入了意大利半岛, 成为病入膏肓的罗马帝国灭亡的“最后一根稻草”。演化出东西两大文明早期互动的起因, 在于气候变化造成南北两大文明的互动从而导致世界发生了结构性改变。这些随着气候变迁研究而提出的人类历史演变的新假说, 仍然需要大量研究来证明。
为什么说气候冷暖变化与人类社会变迁的研究和生态文明相关?因为, 生态文明本身就是由气候变化所形成的人类社会结构变化而引起的生态变迁。中国东部的农业如何由原生农业不断拓展, 最后演变成了东北亚和东南亚的次生农业?原因就是生态条件:人类最早是在亚洲大陆的两端形成早期农业的生产方式。
在亚洲西端是两河流域 (幼发拉底河和底格里斯河) 约10000年前形成的原生农业, 伴随气候暖化而向欧洲拓展成为次生农业。因为西亚两河流域面积狭窄, 所以形成的是以单一作物小麦为主的食物体系。今天这个世界上, 由于西方殖民化扩张, 造成整个北美、南美乃至于整个澳洲、大部分非洲, 都以小麦粉为主食, 其根源就在西亚两河流域原生的小麦农业。

객관적으로 보건데, 농경사회와 유목민족은 장기적으로 상호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겪어왔다. 기후가 변화할 때마다, 농경사회가 유목민족을 몰아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무대제가 흉노족을 사막의 북쪽으로 몰아내자, 흉노족이 사실상 유라시아대륙의 서쪽으로 이동하고, 유럽의 북쪽 부족민들을 계속 서남쪽으로 밀어냈다. 서유럽 북쪽의 게르만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밀려나면서, 이미 쇠퇴하고 기력을 상실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최후의 잽’이 된 것이다. 즉, 동서양대문명 초기의 상호관계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기후변화가 초래한 남북양대문명의 상호영향은 전세계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후변화가 인류 역사의 변천에 영향을 끼쳤다는 새로운 가설은 물론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기후의 변화와 인류사회의 변천연구가 생태문명과 연관이 있는가 ? 왜냐하면, 본래, 기후변화가 초래한 인류사회 구조변화가 생태의 변천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중국 동부의 농업이 어떻게 본원농업을 발전시켜서, 결국 동북아와 동남아의 파생농업형태로 진화되었는가 ? 이것은 생태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인류는 최초에 아시아대륙의 양끝에서 초기 농업생산방식을 만들어 냈다.

아시아 서쪽끝의 양대강 유역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에서 약 일만년전 형성된 원시농업은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유럽으로 전파되어 이 지역의 파생농업형태가 되었다.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은 면적이 좁아서 단일 작물인 밀이 주가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서구 식민화를 거쳐서, 북미,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이 밀가루를 주식으로 삼고 있는데, 그 근원은 바로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에서 출발한 밀농사의 본원농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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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강 유역

在东亚则是四河流域, 即江淮河汉, 也可以用“四河文明”的稻、黍、豆、桑四大作物来代表东方对人类农业文明的四大贡献。这主要是因为东方四河流域面积宽广, 又是沿着三级地理台阶而下, 且被五大气候带所覆盖, 所以东方农业在距今12000年前的起源之初就是多样化的。原生中国的农业品种占全球20-25%。但在向东北亚和东南亚拓展出去的次生农业地区, 则是稻米为主。
亚洲大陆之所以长期是多神崇拜, 多教融合, 可能与气候复杂变化之下农业资源丰富, 家庭男耕女织种养兼业, 村社能工巧匠、十业并举的多元化生存方式相关。例如, 重庆市北碚区有“巴渝农耕文化陈列馆”, 这个陈列馆创办人家里有座小庙, 庙里面什么神都有。这个西南地区的情况, 与十多年前在河南看到的情况一致。这些现象说明本来具有多样性的农耕社会的民间信仰就没有西方一元论宗教所具有的那种极端排斥性。长江上游的巴渝山区如此, 长江下游的“天下第一村”华西村也如此。村内的公园也是什么神都有, 耶稣和穆罕默德在农民那里不对立, 都同样可爱, 这就是与自然界多样性协调一致的农耕文化中的多元崇拜。在亚洲东部儒家文化地区, 至今都是儒道释不分家, 与各方面的神都和平共处。
农业社会的多元性, 决定了人们精神信仰的丰富多彩。伴随近代西方殖民扩张, 单一神教强势传入中国, 内在地排斥民间多元信仰, 不断引发“教案”, 恐怕也有东西文化差异的因素。从万年农业的根上看, 人类文明大致分为两大类:西方是一元论的, 信奉一个绝对真理;东方是多元论的。
我们所讲的生态文明之多样性内涵, 正来源于在早期人类告别蒙昧进入农业的生存方式初立之时, 东亚多元化的气候地理环境派生了农业社会的多样性。这与西方文明在根源上就不同。
동아시아의 4대강유역, 즉 장강, 황하, 회하淮河, 한수汉水, 다시말해서 '4대강 문명’은 쌀, 기장, 콩, 뽕나무 등 4대작물을 대표선수로 삼아 인류농업문명 발전에 기여했다. 동아시아 4대강 유역이 워낙 광대하기 때문에, 서고동저의 삼단계 해발고도지형, 오대 기후대를 모두 포함하며, 그래서 이곳의 농업은 12,000년전에 시작될 때부터 다양성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본원농업 생산물의 품종이 당시 전세계 품종의 20-25%를 점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농업이 전파되면서 모두 쌀이 주식이 되었다.

아시아 대륙은 장기적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 볼 때, 다신을 숭배하고, 복수의 종교가 융합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도 기후의 복잡한 변화속에서 농업 자원이 풍부하기도 하고, 가족을 이루어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고, 채소와 가축을 키우는 겸업을 하고, 마을 공동체는 수공업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직종을 통해, 다원화된 생존방식을 키워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예를들어, 충칭重庆시 베이베이구에 가면 “빠위巴渝(역자주: 충칭지역의 옛이름)농경문화 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을 만든 이의 집에 가면 작은 암자가 있는데, 암자안에는 각종 신이 모셔져 있다. 중국 서남부의 이런 모습은 십수년전에 흐어난河南성에서 볼 수 있던 광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본래부터, 다양성을 갖는 농경사회의 민간 신앙이 서방의 일원론적 종교가 흔히 갖게 되는 극단적 배타성을 갖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장강 상류 충칭의 산간지역이 바로 그러하다. 장강 하류의 ‘천하제일의 마을’이라는 쟝쑤성江苏 화시춘华西村도 그러하다. 마을내의 공원에 가보면 없는 신이 없다. 예수와 무하마드가 농민들 눈에는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 귀엽게 보일뿐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의 다양성이 농경문화안에서 다원적 숭배를 탄생시킨 예이다. 아시아 동부의 유교문화권에서는, 지금까지도, 유불선이 딴살림을 차리지 않고, 함께 평화공존하고 있다.

농업사회의 다원성이 사람들의 정신과 신앙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근대서방의 식민주의가 확장되면서, 단일신 종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민간의 다원적 신앙을 배척하고, 계속 ‘가르침’을 제시한다. 동서문화의 차이가 보이는 것 같다. 일만년 농업근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문명은 크게 두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하다. 서방의 일원론, 즉 하나의 절대 진리를 따르는 사상과 동방의 다원론.

우리가 이야기하는 생태문명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고, 인류가 일찍부터 무지몽매에서 벗어나 농업의 생존방식을 만들어 나갈 때, 동아시아의 다원화된 기후지리환경에서 파생한 것이 농업사회의 다양성이다. 이것과 서방문명은 근본이 다르다.

二、世界农业的异质性在西方殖民化扩张期间发生突变
세계 농업의 이질성은 서방식민지의 확장기간에 발생한 돌연변이

欧洲告别蒙昧之初本来是在次生农业地区, 相比西亚, 形成的是次生文明———本来是在西亚两河流域周围形成的小麦为主的农业带, 随着气候逐渐暖化, 欧洲冰雪退去, 那里的次生农业文明逐渐形成。
此后, 罗马海盗文化长期捋掠财富形成的奴隶制的政治国家灭亡后, 欧洲经历了漫长的千年黑暗。其间没有完整意义的国家, 极易受到各种冲击。一场疾病或者北方维京人南下, 都意味着灭顶之灾。欧洲历史上多次出现大规模的人口减少, 因此把那段历史定为封建主义。我们19世纪被西方列强打得晕头转向之际错用了欧洲封建主义概念, 把自己辉煌的几千年文明也说成是中世纪。其实欧洲因为中世纪以来形成的贸易逆差一直没有缓过来, 所以在因互相战争而造成筋疲力尽之后去抢西亚北非, 接着往美洲去捋掠, 就把罗马奴隶制移植于殖民地大陆。
概言之, 欧洲因长期的贸易和财政双逆差导致贫困, 那就要走出去捋掠。这一跨越大洲的冒险所形成的是奴隶制三角贸易, 贵金属白银流入中国。

유럽이 문명사회로 들어선 기반은 서아시아가 아니라 원래 파생농업지역에서 만들어진 파생문명이다. 원래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 주위에서 생겨난 밀 위주의 농업방식이, 전세계의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유럽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이곳에 점차로 파생농업문명도 형성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해적문화가 오랜 기간 형성한 약탈노예제하의 정치국가가 멸망하고 유럽은 천년의 중세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이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세력간의 충돌이 여기 저기에서 일어난다.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가거나 북방의 바이킹이 남하할 때마다, 매번 멸망에 가까운 재앙을 겪는다. 유럽 역사상 가장 자주, 그리고 대규모로 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러한 봉건주의 역사 단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19세기에 서방열강의 침탈을 겪으면서 얼떨떨한 상황에서, 유럽의 봉건주의 개념을 빌어와서, 자신의 휘황한 수천년 문명 국가의 역사를 중세시기라고 부르곤 했다. 하지만, 유럽은 중세이래 형성된 무역역조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럽내부의 전쟁에 지친 연후에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침탈하고, 미주대륙을 약탈했다. 이 과정은 바로 로마의 노예제도를 식민지 대륙에 이식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하면, 유럽은 장기적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쌍둥이 적자에 의해 빈곤을 겪고, 그래서 유럽 바깥으로 나가 약탈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대양과 대륙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하고, 노예삼각무역을 성립시킨다. 이때 귀금속과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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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삼각무역

直到十八、十九世纪, 中国一直是第一经济大国、贸易大国以及第一白银储备大国———占有全球白银的百分之六十以上。殖民化形成了一个巨大的结构性变化, 即欧洲人到了美洲和澳洲, 把在欧洲形成的农业生产方式也带了过去。欧洲气候好、多雨, 基本上找不到灌溉农业的历史遗迹, 大多是“漫坡种地”。这种方式到了美洲和澳洲, 使得那里的早期殖民者占据的农场几乎找不到水渠灌溉模式。
所以, 亚洲的灌溉农业生产和聚落而居的村社制度, 在欧洲人复制的美洲和澳洲都不存在, 在欧洲人复制的非洲也不存在。当西方人占领了北美洲、南美洲以及非洲这些大陆的时候, 这些殖民地大陆主要采用了欧洲的生产模式, 开始了简单的生产力扩张, 即土地规模经营。

18세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무역대국, 은보유량 대국이었다. 전세계 은의 60% 이상을 중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식민지가 만든 거대한 구조적 변화중의 하나는 유럽인들이 미주대륙과 오세아니아로 이주한 것이다. 이곳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농업 생산방식을 가지고 갔다. 유럽은 기후가 농업에 적합하고, 비가 많다. 기본적으로 관개농업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이런 역사 유적도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이 완만한 경사면에서 작물을 재배한다. 이러한 방식을 ‘신대륙'에 도입해서 초기 식민지배자들이 만든 농장에서도 수로를 이용한 관개 시설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아시아의 관개농업생산과 취락주거형태의 마을 공동체 제도가 유럽인들이 자기 제도를 이식한 미주대륙과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인들이 북미대륙과 남미대륙, 그리고 아프리카를 점령할 때, 이곳은 모두 식민지 종주국인 유럽의 생산 모델을 차용했고, 간단히 생산력 확장을 개시했다. 즉, 토지규모화를 통한 경영이다.

这套经验及其理论被我们照搬过来, 成为高校教科书。可中国出去得了吗?我在世界上考察了几十个国家, 开始去美国考察大农场, 没找到原住民做农场主。后来到了加拿大、墨西哥、澳大利亚, 哪儿都找不到。为什么没找到哪个殖民化国家的农场主是原住民?为什么全是外来殖民者当农场主?殖民政府不给原住民财产证书, 只让外来殖民者去抢地盘, 然后把所谓合法的土地证书发给外来殖民者。殖民地的白人政权不会给印第安人发任何资产证明。因此美洲就演变成西方殖民者的大农场农业。这是靠大规模减少原住民人口而形成的规模化农业。

지금 이러한 경험과 이론을 우리가 복사해와서 대학 교재로 활용한다. 이게 중국에서 과연 통할까 ? 나는 세계 수십개국을 방문하고 현지 조사를 해봤다. 미국의 대농장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그 어느 곳에서도 원주민이 농장주인인 곳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일까 ? 왜 모든 농장주는 외부에서 온 식민지배자들의 후손일까 ? 식민정부는 원주민들에게 재산증서를 준 적이 없다. 오로지 외부에서 온 식민지배자들에게 토지 강탈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합법적인 토지등기부를 쥐어줬다. 식민지의 백인정권은 원주민들에게 어떠한 재산증명서도 발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주대륙은 서방식민지배자들의 대농장 농업만이 살아 남았다. 원주민 인구가 대규모로 감소했고 그래서 대규모 농업이 성립할 수 있었다.

这种规模农业, 我称之为“农业1.0”。什么叫“农业1.0”?请问:在殖民化之前农业可曾被作为产业?什么叫做第一产业?没有殖民化, 哪有农业作为第一产业的历史?
欧洲农业的异质性, 其实也产生于西方人的殖民化。

이러한 대규모 농업을 나는 ‘농업1.0’이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 내가 거꾸로 물어 보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다. 식민지 형성 이전에 농업이 산업으로 간주될 수 있었나 ? 1차 산업이란게 무슨 뜻인가 ? 식민지 없이, 농업이 1차산업이라고 불린 역사가 있었던가 ?
유럽 농업의 이질성은 실은 서구인들의 비서구 세계 식민지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随着殖民化的扩张, 欧洲向外大量迁移人口, 从而形成欧洲自身土地资源的相对宽松, 就从过去的所谓田园诗般小农村社, 转变成小农场经济。欧洲就形成了典型的殖民地宗主国的小农场经济。因为没有办法与其派生的殖民地大农场竞争, 所以宗主国小农场经济变成了我们今天所说的绿色农业、市民农业、休闲养生旅游景观等农业。农业“三产化”率先在欧洲实行, 就变成了一种国际经验。又因为它是以市民作为农场主的一种农业, 也就是说农场不再由农民经营, 60%以上的农场变成了由市民经营。因此, 它的农产品消费者也会对外来农产品有强烈的排斥, 这是社会文化的保护, 而不是技术壁垒或是贸易壁垒。所以, 现在中国的农业生产尽管过剩了, 但凡向欧洲出口, 均遭拒绝, 因为他们认为中国整个发展都是一种不人道的, 所以他们认为中国农业也没有基本的道义, 就坚决不买我们的农产品。比如, 鸡本来是飞的, 非把它弄在笼子里, 不讲鸡道;猪是聪明的动物, 非弄在狭窄的空间里面催肥, 不讲猪道。这是欧洲的一种社会文化。一般而言, 莱茵模式比较讲社会性。因此欧洲的绿色农业、绿色政党, 变成了欧洲的一种社会趋势。

식민지의 확장에 따라서, 유럽 인구가 대규모로 외부로 이주하고, 유럽 자신의 토지자원이 상대적으로 넉넉해졌다. 그래서 과거의 소위 전원시가 묘사하는 작은 농촌 마을 공동체가, 소농장 경제로 이행하게 됐다. 이렇게 유럽은 전형적인 식민지 종주국의 소농장경제를 만들게 된다. 이 농장들이 자기에게서 파생된 식민지의 대농장과 경쟁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종주국의 소농장경제는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녹색농업, 시민농업, 레저형 관광농업이 된다. 농업의 ‘3차산업화’는 유럽이 이끌어 나갔고, 나중에는 일종의 국제적 흐름이 된다. 이 농업은 시민이 농장주가 되는 농업형태이므로, 농장은 더이상 농민이 경영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이 경영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비율이 무려 60%이상이다. 그래서, 농산물의 소비자도 수입농산물에 대해서 배타적이 된다. 이는 사회문화의 보호이지, 기술장벽이나 무역장벽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농업생산물이 아무리 과잉이 되어 유럽으로 수출하려고 해도, 늘 거절 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중국의 전체 발전 모델은 비인도적이고, 중국의 농업도 기본 도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생산한 농산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닭은 원래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하는데, 손바닥만한 케이지안에서 사육하는 것은, 닭에 대한 도의가 아니다. 돼지는 원래 영리한 동물인데, 옴쭉달싹 못할 작은 공간에서 재우고 살만 찌우는 것은 돼지에 대한 도의가 아니다. 이것이 유럽의 일종의 사회문화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라인 모델은 상당한 사회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녹색농업, 녹색당 등이 유럽에서는 일종의 사회적 경향이 된 것이다.

这个由西方推进的殖民化过程, 实际上已经把世界农业分化为三大类:一是殖民地农业, 二是宗主国农业, 三是原住民农业。三种农业的形成过程不一样, 各自的政策和理念、运作经验也都是不可转换的。中国农业发展过程中政策制定者不了解农业模式发展的文化内涵与历史意蕴, 很多人去美国回来就说我们什么时候能像美国那样实现农业现代化。真有本事你先把中国人口大规模减了?
东亚农业靠的是什么?靠的是小农村社制, 这种制度完整保持下来的是日本和韩国。中央刚提出新农村建设的时候, 很多官员到韩国去学习新村运动。其实学来学去, 学到的是我们传统的小农村社制度。因此还是要回到自己的历史文化传承来, 多一点文化自信———那一套本来是从我们这儿传过去的。中国的原生农业乃“江河淮汉”, 东北亚那儿叫做次生农业地区, 整个农业的演化过程晚于长江流域稻作农业。到后来, 政治、文化、社会教育等也对他们产生了重要影响。
由此, 可以丰富我们对华夏文明数千年的积淀成就了新时代中国特色社会主义思想这一论断的理解。

서방에서 출발한 식민화 과정이 실제적으로 이미 세계의 농업을 크게 세가지 종류로 분할 했다: 그 첫째가 식민지 농업, 둘째가 종주국 농업, 그리고 세번째가 원주민 농업이다. 세가지 농업형태는 생성과정이 다르고, 정책과 이념, 운영 경험도 모두 다르며, 모델간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중국농업의 발전과정중 정책제안자들이 이러한 농업모델발전의 문화적 함의와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해서, 미국에 견학 갔다 오고 나서는, 우리는 언제나 미국과 같은 농업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냐고 이야기 한다. 그러자면, 백인 이주자들이 미대륙의 원주민을 멸절시킨 것처럼 우선 중국의 인구를 대규모로 줄여야 하지 않나 ?

동아시아 농업의 기초는 무엇인가 ? 바로 소규모 농촌 공동체이다. 이러한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일본과 한국이다. 중앙정부가 막 신농촌 건설을 제안했을 때, 많은 관리들이 한국에 가서 새마을운동을 공부하고 왔다. 사실 거기에 가서 보고 온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농촌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국 중국 자신의 역사문화 전통으로 회귀하게 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좀 더 가지게 된다. 그게 원래 우리가 여기서 전해 준 것 아니었나. 중국의 본원농업은 4대강유역에서 기원한 것이고 , 동북아시아는 파생농업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곳의 모든 농업의 진화가 장강유역의 쌀재배농업보다 나중에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생농업이 그들의 정치, 문화, 사회교육등에 모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중화문명 수천년의 업적에 대해서 이해하고 나서야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논의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三、东西方国家形态的政治文明之形成及其演化
동서방국가형태 정치문명의 형성 및 그 변화

当人们思考东亚“四河文明”和西亚“两河文明”形成差异化的文化传承时会发现, 在以农业形成社会生存方式的四大文明古国之中, 只有中国的华夏文明一直延续着。相对而言, 古代埃及曾经是长期依存于多元化农耕社会而延续下来的, 但, 埃及作为国家形态延续了几千年之后, 还是中断了。
사람들이 동아시아의 ‘4대강문명’과 서아시아의 ‘양대강문명’ 형성의 차이와 문화전승에 대해서 고찰할 때, 농업이 형성한 사회생존방식 관점에서 4대 고문명국가중 오직 중국의 화하문명만이 지속해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고대이집트는 다원화 농경사회에 장기적으로 의존하면서 계속 살아남아 국가형태를 수천년 유지하다가 결국은 중단되었다.

其实, 应该讨论的是中华文明作为国家形态长期存续的原因到底在哪儿?
사실 우리가 토론해봐야 할 것은 중화문명이 국가형태로서 장기 존속한 원인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把与秦汉同时代的西罗马地图拿来比较, 可以看到那是沿着地中海形成的环状帝国, 因为罗马是一个以占有奴隶制劳动剩余为基础而形成的商贸帝国。它的所谓自由城邦周围地区都是奴隶地区。上层社会直接占有奴隶劳动贡献的最大化农业剩余, 通过控制沿海的商贸城市来形成收益。所以, 罗马的崛起在于打败了与之争夺地中海贸易航路控制权的埃及和迦太基。这两个背后被广袤沙漠包围、人民根本无处逃生的国家逐渐失去了优势。罗马人首先征服埃及, 因为那是一个沿着尼罗河、靠绿洲农业生存的条状国家, 没有形成广大地域纵深防御的条件。后来征服了半岛型的迦太基 (现为突尼斯) , 这个国家也没有防御纵深。罗马人这才完全控制了地中海的商路, 达至鼎盛期。
진한秦汉 동시대의 로마제국 지도를 중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중해 연안에 형성된 고리모양의 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는 노예제에 기반한 노동잉여점유를 기초로 형성된 무역상업의 제국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소위 자유도시국가의 주변은 모두 피지배 당하는 노예지대였다. 상층사회가 직접 점유하는 노예노동에 의해서 생산되는 농업잉여를 최대로 늘리고, 연해의 무역상업 도시를 통제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그래서 로마의 굴기는 이집트, 카르타고와 지중해 해상무역 항로의 통제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두 국가는 배후의 거대한 사막에 둘러싸여 있다. 그 밖으로는 벗어날 도리가 없으니 국가는 점점 쇠락할 수 밖에 없다. 로마인은 먼저 이집트를 정복했다. 왜냐하면 길이 방향으로 나일강 강안을 따라서 농업지대에 의존하는 선형 국가이기 때문이다. 광대한 토지와 그 종심을 이용해서 방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반도형의 카르타고 (지금의 튀니지아)를 정복한다. 이 국가 역시 종심을 이용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해상무역로의 통제권을 쥔 연후에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罗马人最难征服的是迦太基, 历史上有名的“汉尼拔东征”, 其名将汉尼拔率领迦太基军队曾经跨海打进了西班牙, 再翻过阿尔卑斯山, 进入意大利半岛, 就差不多要灭亡了罗马。但最后还是罗马打败了迦太基, 屠城之后70万人仅剩3万!
로마인이 카르타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한니발의 정벌’이 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넘어서 스페인에 들어갔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했다. 거의 로마를 멸망시킬 뻔 했다. 하지만 최후에는 로마가 승자가 됐고, 대학살을 벌인 끝에 70만의 카르타고 인구는 3만명 밖에 남지 않았다.

罗马帝国完成了对跨亚欧非大陆的环地中海周围的完全控制, 建立了因控制地中海商贸航路而形成的环形帝国。此后, 罗马因为再也没有敌人, 内部明争暗斗、骄奢淫逸而逐渐没有战斗力了;加上环形国家缺乏地域纵深, 没有防御条件, 加之其周边都是奴隶占据的地方, 奴隶不可能替罗马人打仗, 于是最终被蛮族从罗马核心区给灭亡了。从此, 欧洲长期没有大一统国家, 进入成千上万个小邦林立的“千年黑暗”的所谓封建制时期。

로마제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지중해 유역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중해를 둘러싼 고리모양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에 로마는 외부에 적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고, 사치향락이 극에 달하여 사회문화가 타락하며 천천히 전투력을 상실한다. 또, 고리모양 형태인 로마 제국은 종심을 이용한 방어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주변은 모두 피지배 노예 노동 지역. 노예가 로마인을 대신해서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후에 로마에 침략한 야만인에 의해 로마의 핵심부가 멸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에는 오랜 기간 하나의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소규모 영주국들이 난무하는 천년의 암흑기,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在东亚, 国家基本制度不同于欧洲:一方面是农业立国;另一方面秦汉帝国是饼状的, 有用于防御的地域纵深。
现在我国提出重新认识小农经济, 因为小农村社制将长期存在。历史上的小农村社制度是和东部太平洋季风降水的不平衡从而迫使中国人建设水利系统高度相关的。中国地处多个复杂气候带, 要想形成农业的长期生产, 就一定要有水利。没有灌溉便不叫做田———也就是一块地上面有纵横的渠道, 由干、支、斗、毛构成的渠系而产生社会结构的复杂性。于是, 村社的自治是以水利共享而形成聚落而居, 这与间作套种的农业管理又是高度相关的。几千年来, 我们不仅有因水利成村的聚落, 我们还有以水立国的德治传承。中国人都知大禹治水的故事, 大禹因治水有功而成为部落首领, 之后便把国家政权传给自己的儿子, 由此禅让制转变成了父子相传的皇权体系。

동아시아는 국가의 기본제도가 유럽과 달랐다: 우선 농업입국, 또 한편으로 진한제국은 호떡 모양의 국토 때문에 종심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다시 소농경제의 가치를 인식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농촌 마을 공동체가 지속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상 소농촌 마을 공동체 제도는 동부의 태평양 계절풍과 강수량의 불평형 때문에 중국인들이 부득불 수리 시스템을 건설한 것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중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후대에 놓여 있다. 그래서 장기적 농업 생산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리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관개시설이 없으면 밭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즉, 한뼘의 땅위에도 종횡의 干、支、斗、毛로 구성되는 수로가 있고, 다양한 단위로 구성된 수리 시스템을 통해서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마을 공동체의 자치는 수로를 공유하고 취락을 형성하면서 생겨났고, 이러한 점과 사이짓기 (간작) 농업관리는 또한 깊은 관계가 있다. 수천년에 걸쳐, 우리는 수리를 통한 취락의 마을을 만들고, 또 수리를 이용한 입국의 덕치를 전승해왔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우왕의 치수사업 이야기를 알고 있다. 대우는 치수의 공적을 통해서 마을의 지도자가 됐고 그래서 국가의 통치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황권을 계승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农业社会延续到春秋战国时期, 为什么北方诸侯都得修长城?因为那时气候冷化, 长城是当年的信息传输系统, 所传递的主要是游牧部族骑兵南下的攻击信息———烽火台一路放烟火传递军情, 这才来得及利用地域纵深的条件组织抵抗。有人说, 为什么中国古人那么蠢?劳民伤财修长城挡得住敌人吗?这恐怕是不太了解古代社会。为什么秦要为全国郡县修驰道?那是便于调兵协防郡县政权。据此看, 世界上第一套对开双车道的高速公路, 即驰道, 就是在秦朝建立起来的。接着, 为了对开就得“车同轨”, 得罪了一大批“大马宽车”的旧贵族。为了从内地到边关都认识官方文件, 就得“书同文”, 也就引起了全国知识分子的愤怒, 于是秦始皇杀了一批文人。为了货畅其流就要“统一度量衡”, 那又得罪了商人……再加上大规模征集徭役修长城, 势必得罪老百姓。社会各阶层都被得罪了, 这是秦朝不仅“二世而亡”, 而且还至今被痛骂几千年的重要原因。

농업사회가 지속되어온 춘추전국시대에 왜 북방의 제후들은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왜냐하면 기후가 추워질 때, 장성이 당시의 정보전달 시스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정보는 유목민족의 기마병이 남침한다는 소식이었다. 즉 봉화대의 기능이 있다. 불과 연기로 군사 소식을 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단시간내에 내륙까지 정보를 전달하여 대항군을 조직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왜 이리 미련했냐고 이야기한다. 민중의 노동력을 조달하고, 재화를 낭비해가며 장성을 쌓아서, 정말 적을 막을 수 있나 ? 고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왜 진은 전국군현의 도로 역참 시스템을 만들었나 ? 그것은 각 군현정권의 군사력을 쉽게 동원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세계에서 최초로, 양방향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셈이다. 이러한 도로는 진나라 시대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수레의 규격을 통일했다. 이러니, 말이 끄는 큰 수레를 몰던 옛귀족들이 분개했다. 내륙에서 연안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공문서를 이해하기 쉽도록, 문서 양식을 통일했다. 지식인들이 당연히 분노했다. 그래서 진시황이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물자가 쉽게 유통되도록, 도량을 통일했다. 이번엔 상인들이 반감을 품는다. 거기다 장성을 쌓겠다고 민중을 노역에 동원했으니, 끝으로 백성들을 성나게 한다. 사회 각계각층의 불만을 산 결과, 진황조는 2대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천년간 욕을 먹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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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但是, 接着秦亡而发生的却是“汉承秦制”, 汉朝继续完成这个大饼状的、有战略纵深的帝国。历史上只要有大一统, 就能够抗击北方的游牧民族南下, 遇到气候暖化时, 农耕社会还能不断向北反扑。所以有当年汉武帝击匈奴, 把匈奴压到欧洲去了。而到唐代, 则先后灭了两大突厥。南匈奴和北匈奴是在汉代被消灭的, 东西突厥是被唐代消灭的。突厥哪儿去了?突厥西进形成著名的“突厥走廊”, 其中的一支向西南经略, 攻入了君士坦丁堡, 导致继承东罗马的“拜占庭”走向灭亡。东罗马及拜占庭不曾经也是横跨欧亚非的大帝国吗?却是被唐代打出去到了中亚、再转向西亚的突厥部族中的一支军队所击败, 最后走向灭亡。

그러나, 진이 멸망했어도 한이 진의 시스템을 계승했다. 그리고 한왕조가 거대한 호떡 모양의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이 제국은 이제 종심을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상 한번 대통일을 이루고 나니,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침했을 때 효율적으로 방어 할 수 있게 된다. 기후가 따뜻해졌을 때는 오히려 농경사회가 북에 반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밀려난 흉노가 유럽을 제압하게 된다. 그리고 당제국에 이르러서는 양대 돌궐을 차례로 멸하게 된다. 남흉노와 북흉노는 한대에 멸망했고, 동서돌궐은 당대에 소멸했다. 돌궐은 어떻게 됐나 ? 서역으로 이동하여 터키회랑을 완성하게 된다. 이중 일부는 계속 남서방향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동로마를 계승한 비잔틴을 멸망시킨다.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은 역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당이 중앙아시아를 공격하고, 다시 서아시아로 진격하자 밀려난 돌궐의 일족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中国以国家形态存在的传统文化之所以能够不中断, 取决于秦始皇当年构建的一个大饼状的、有地域纵深的、能够防御北方骑兵南下的广大空间。因此, 对照环形国家罗马的灭亡, 汉唐以来的中国统治阶级无不试图追回大一统, 形成一个地域纵深广大的国家。如果没有形成大国, 就会出现乱世, 乱到什么程度?西汉最强盛的时候人口达九千万, 到东汉末年三国两晋战乱之后, 只剩下三百万。

중국은 국가형태를 유지하면서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속해왔다. 진시황이 만든 큰 호떡 모양의 지형으로 종심을 갖기 때문에, 북방에서 기마병이 남침해도 거대한 국토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리모양의 국가인 로마가 멸망한 반면, 한과 당이래의 중국 통치 계급은 늘 대통일을 이뤄서 종심의 거대한 국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중시했다. 만일 대국을 이루지 못하면, 바로 난세를 경험한다. 어느 정도 난세인가 ? 서한이 가장 강성했을 때, 인구가 9천만이었다고 한다. 동한이 말년에 삼국과 양진의 전란에 휩싸인 후, 그 인구가 삼백만으로 줄게 된다.

纵看历史, 没有一个广大的地域纵深的国家, 就没有不中断的历史文化传承, 农耕民族人口众多, 但分散的小农村社无法保护自己。亚洲大陆气候地理的多样性, 决定了中国的国家政治形态, 国家也是社会文化的多样性传承的载体。

역사를 돌아 보건대, 거대한 종심국가가 없으면, 역사문화의 계승도 불가능하다. 농경민족은 인구가 많지만, 분산된 소농촌 공동체는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 아시아 대륙의 기후, 지리의 다양성이 중국의 국가형태를 결정했고, 국가는 사회문화의 다양성을 전승하는 그릇으로 작동해왔다.

我们认识到, 由气候和地理所决定的生存文化内在的差异性, 在中国的经济、政治、文化乃至于精神信仰方方面面都有表现。据此可知, 中华文明数千年传承说明一个新时代的转型概念:坚持生态文明, 是中国五千年来历史演变的客观结果, 不是主观选择, 中华民族几千年来拥有多样性的生存方式, 包括社会方式、经济方式、文化方式。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기후와 지리를 통해 결정되는 생존문화에 내재한 차이성이고 중국의 경제, 정치, 문화는 여전히 정신과 신앙의 모든 면에서 표현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중화문명 수천년의 전승이 설명하는 하나의 신시대 전환개념이다. 즉, 생태문명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5천년 역사의 진화가 가져온 객관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선택이 아니라, 중화민족이 수천년간 지켜 온 생존방식이다. 사회방식, 경제방식, 문화방식 모두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进一步看, 战国时期的长城主要是沿着四百毫米等降水线修的。为什么?因为四百毫米等降水线以南以东, 是典型的农耕区域, 往北往西, 就是半农半牧区, 再往北, 则属干旱游牧带。所以, 从气候带所决定的两条线, 促使中国早期大一统国家的形成。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면, 전국 시대의 장성은 주로 강수량 400밀리미터 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이 선의 남쪽과 동쪽만이 전형적인 농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으로 서로 더 가게 되면, 반농반목축 지역이 된다. 거기서 더 북으로 가면, 건조한 유목지대가 된다. 그래서, 기후대가 두개의 선을 만들고, 중국의 초기 대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한 것이다.

国家 (state) 是什么?首先要有一个足够调控社会资源的权力, 其次就是对外作战的军队。战国时期, 六国都要防御北方游牧民族的南压, 而在周朝封建制之下, 诸侯有私家军而没有国军。可是, 北方六国修筑长城必须调度人力和资源, 强大些的就自立霸主, 演变为封建诸侯, 因建立早期国家形态而自发地告别所谓封建制。

국가(state)란 무엇인가 ? 우선 사회자원의 권력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기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대외적으로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다. 전국시대에 6국은 모두 북방유목민족의 남침에 맞서야 했다. 주나라의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제후가 사병을 갖고 있을 뿐, 주나라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방의 6국이 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고, 강대국은 스스로 패주가 되었다. 그래서, 봉건제후들이 쟁패하는 가운데, 국가형태를 만들고 결국, 스스로 봉건제에 고별을 고하게 된다.

所谓封建制是什么?主要是分封, 帝王把自己的族人亲友全部封出去做诸侯。中国自秦汉以来实现的主要是郡县制, 也早就不“封建”了。当然也有个别朝代实行分封, 但是每次分封都会带来灾难性的后果。所以在秦朝郡县制以后差不多经过上千年的完善, 到宋代最终改为三权分立、科考取士, 形成以郡县为基本政权框架的、中央集中管理的国家体制。

봉건제란 무엇인가 ? 분봉제가 핵심이다. 제왕이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봉하여 제후로 삼는다. 중국은 진한시대 이래 군현제를 실현하고 일찌감치 봉건제를 마무리한다. 물론 특정 왕조에서 분봉을 실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분봉을 할 때마다,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한조이래 군현제는 천년에 걸쳐 개선이 되다가, 송대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삼권분립 형태를 갖추게 된다. 과거로 벼슬을 얻고, 군현이 기본 정권 프레임이 되는 중앙집권제 형태의 국가체제이다.

据此, 我们认为, 中国并没有漫长的封建社会。只有夏商周约两千年是部落联盟过渡而成的封建制, 而到了周代晚期、秦汉大一统国家组建之后, 就已经告别封建进入统一, 成为了权力统一于中央的郡县制国家。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로, 중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봉건사회를 유지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하상주夏商周 약 이천년은 부족연맹의 과도적 봉건제였고, 주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진한이 대통일 국가를 이룬 후에, 일찌감치 봉건제를 졸업하고, 통일된 중앙군현제 권력 국가를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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