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이: 90년대에 반성한 현대성

in #wanghui6 years ago (edited)

1998년 4, 5월 사이, 나는 계몽의 운명에 관한 세미나에 초청받았다. 늦게 도착하여 들어가려는데 리션즈 선생이 마침 내 글을 비평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작년, <<천애>> 잡지의 다섯 번째 호에 발표된 글이 있는데, 요약하면 인류가 300년간 밟아온 공통의 길을 중국이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작가는 바로 현재 <<독서>> 잡지의 편집장입니다. <<독서>><<천애>>, 남북이 호응하여 만든 게 바로 신좌파의 대본영입니다!"
회의를 주재하던 정중빙 선생이 들어오는 나를 보고, 리 선생을 팔로 살짝 치는 것을 보았다. 리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정 선생은 어쩔수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왕후이, 앞으로 와서 앉게!"
나는 리 선생을 잘 아는 편이다. 그는 나를 보고는 부드러운 뉘앙스로 그의 의견을 말했다. 모두 나보고도 의견을 발표하라고 했다. <<독서>> 에는 사실 어떤 관점과 입장의 글도 모두 있지만, 편집인으로서 나는 <<독서>> 에 대한 비판과 제안은 항상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내 글에 대한 리선생의 비평에 관해서는, 이렇게만 말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에 반대하고 중국 발전을 모색하는 길을 떠나서, 어떻게 인류가 300년간 걸어온 공통의 길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난 리선생이 말한 것이 계몽적 이상임을 안다, 하지만 아편전쟁 때 중국과 영국은 공통의 길 위였는가? 흑인 노예를 팔 때 아프리카, 유럽 및 북미는 공통의 길 위였는가? 300년간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지금마저 모두 현대화 또는 "현대"의 이름으로 출현했다. 민족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반대로 "전-현대"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신-계몽 관점에서 말하는 "공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리션즈선생이 말한 글이 바로 1997년<<천애>>에 발표한 <<당대 중국 사상 상황과 현대성 문제>> 이다. 발표 후 큰 파장을 일으켰고, 후속으로 계속 이어질 여러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80년대 이래의 주요 사상 파벌을 모두 비평했다. 세 가지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형태인, "신-계몽주의" 사조, "유교 자본주의""마을기업의 현대화론"과, "중국 포스트 현대주의" 등에 대해 논술했다. 비평의 핵심이 그들 모두 각각의 정도와 방면에서 "현대성"에 대한 반성이 부족함이다. 중국의 지식계는 근대화 의식 형태에 휩쓸려, "중국/서구""전통/현대"의 이분법에서 나오지 못하고, 세계화의 새로운 라운드로 발생한 모순과 중국이 직면한 새로운 문제를 분석할 힘을 잃었다. 글의 말미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중국에 자본주의의 현대성이란 답을 제공한 일부 사람들을 비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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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가 지금은 새롭지 않지만, 90년대의 분위기에서는 약간 이상하게 들렸다. 리션즈 선생과 같은 구세대 계몽파 뿐만이 아닌 "자유파" 신세대도 나의 발언에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화"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으로 가득했고, 나는 근대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하여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그날 세미나는 아주 치열했다. 내가 말 할 때마다, 누가 마치 포위 공격처럼 끊고 말했다. 그래도 두 분의 노선생이 계셔 내가 이야기를 마치도록 주장했다. 리션즈선생은 나의 의견과 같지 않았지만 매우 솔직했다. 어떤 의견이든지 탁자 위에 놓고 말할 수 있었기에, 이 점에서 나는 그를 아주 존경한다.
사실, 그 글은 1994년에 이미 완성되었다. 1993년 말, 하버드 대학에서 방문 학자를 마치고 귀국하니, 마침 베이징에 있던 한국 친구 이욱원이 한국에 들고 가 발표하게, 내게 중국 현대 사상의 상황을 소개하는 글을 적어달라고 했다. 응답하고 나서, 생각했다, 어떤 당대의 문제에 대해 적는 게 좋을까?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3~4년은 우리 세대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내가 처음 베이징, 다음 내려간 산시성 상뤄, 1991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학인>> 잡지를 만들고, 1992년 미국에 방문학자로 가 멀게도 가깝게도 중국과 세계의 극렬한 변화를 관찰했다. 어떻게 이 모든 걸 이해해야 하나? 그 글은 그 몇 년 동안의 간헐적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학술 논문이 아닌 아이디어 메모이다.
중국 국내의 큰 사건 외에도 그 몇 년간 국제적으로 극렬한 변화가 있었다. 80년대 말, 많은 중국 청년의 심리상태는 멀게는 미국을 우리의 미래로 인식하고, 가깝게는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정치 개혁 중의 소련이었다. 하지만 불과 2, 3년 만에 상황이 급작스레 나빠졌고, 우리가 믿고 희망하던 동소련의 개혁은 빠르게 무너졌다. 동소련과는 다르지만, 중국도 마찬가지로 경제 분야에서 세계화의 과정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었다.
기억하기로 1993년에, 우리 중 일부는 회의가 끝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놀러 갔다. 리저허우, 리우짜이푸와 같이 네바강을 따라 걷는 중, 정박 항구에 "10월 혁명"의 첫 총성을 울린 "오로라" 순양함이 있었다. 짜이푸가 감격하길:"10월 혁명이 이렇게나 많은 문제를 불렀고, 20세기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재앙을 가져왔다." 이는 당시 많은 이들의 느낌이었고,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의 경과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에 대해선, 내 마음속에 성숙하지 않은 다른 의견이 있었다.
나는 1911년 신해혁명에서 1976년 "문화대혁명"의 종료는 20세기의 핵심이고, 이는 더딘 혁명이자, 촉박한 세기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80년대는 이 "짧은 20세기" 의 끝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90년대는 진정한 반전이다. 혁명의 20세기는 끝났지만, 단순히 부정당할 역사는 아니다. 만약 고별이 반복불가를 의미하면,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고별이 부정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 조건을 무시하는 선언이다.
90년대, 새로운 세계 질서가 도래했고, 우리는 점점 명확해지는 불평등의 구조뿐만 아니라 불평등 관계가 완전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돌아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바퀴의 부정을 거쳐서, 마치 20세기가 돌파하기를 원했던 19세기가 되돌아온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 같이 러시아 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가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심지어는 파리보다 훨씬 웅장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도시는 어두워졌다. 경제가 좋지 않아 전기가 부족했다. 우리는 세계 일류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러 갔는데, 암시장 표가 13달러로, 미국 표준보다 매우 저렴했다. 다음날 매표소를 지나 물어보니, 모든 "백조의 호수" 실제 표 가격은 55루블이고, 당시의 환율은, 1달러에 1300루블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속상하지 않을 수 있나? 예전엔 모든 사람이 안 좋은 소련을 바꾸면 되겠지,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사회 변화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여행을 마치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먼저 시카고에 도착했는데, 이웃에 옐친의 고문 두 명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분열에 대해 그들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고, 러시아가 마침내 러시아인의 민족공동체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점에 나는 매우 의아했다. 그런 다음 하버드로 돌아가, 또 곧 떠나기 전 "모스크바 10월 사건"이 발생했다. 옐친은 국회 건물을 탱크로 포격하여, 대통령과 국회 간의 권력 투쟁을 종식했다. 미국의 언론과 국가 정책은 완전히 옐친의 편에 서 있었다. 명확하게 폭력을 지지했고, 옐친이 "전-공산주의 분자를 청산"하고 있다고 했다. 왜 미국의 이번 반응이 중국에 대한 반응과 그렇게 다른가? 미국 대외정책의 실용주의가 한눈에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런 일들이 차례로 일어나, 내게 사회주의 실천과 새로운 세계화 질서를 반성하도록 재촉했다. 그 메모는 또한 자기반성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욱원이 초안을 받기 위해 왔고, 나는 이 메모를 하나의 글로 완성하여, 먼저 한국에서 발표하고, 다음 홍콩에서 발표했다.
1996년 말에서 1997년 말까지 나는 홍콩중문대학에 1년을 내내 살았다. 홍콩에 오기 전, 나는 이미 <<독서>> 잡지의 편집장 임명 요청을 수락한 상태여서, 글이 발표되고 일어날 수 있는 논쟁을 고려하여, 먼저 필명으로 <<홍콩사회과학학보>>에 기고했다. 그러나 나는 필명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항상 이상하게 느꼈다, 뭔가 내가 말한 것에 책임을 져야지 피하고 숨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한사오공이 하이난에서 <<천애>> 잡지를 만들었는데, 몇 번 기고 요청을 받아, 나는 그냥 이 글을 보냈다.
사오공은 나에게 긴 답장으로, 지금 이와 같은 글이 절실하다고 적었다. 그는 매우 용감하고, 또 극도로 신중했다. 글에 필요한 기술 처리를 한 후, 1997년의 <<천애>> 의 다섯 번째 호에 실었다. 매우 빨리 예상대로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 글은 예전에 또 하나의 제목이 있었다, <<시장사회의 탄생과 사상의 붕괴>> 인데, 90년대 사회의 변천과 시장의 탄생으로, 지식인이 비판적으로 세계화를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함을 암시했다. 일부 지식인은 "자유주의"로 자처하고, 일체 현대성의 반성을 거부하고, 계몽적 교조로 세계화의 진행을 장밋빛 이상화로 서술했다.
이 글에서 여러 사조를 검토했는데, 사실 스스로에게도 자아비판과 같았다. 왜냐하면 내 생각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자신을 그 시대의 심판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글을 되돌아보면, 현대화 과정에 대한 나의 반성의 시작이었고, 당대 사상의 토론에 대한 하나의 개입이었다. 나는 현대화 과정을 총체화하고 재고하기 위해 있었다. 이런 추상 이론은 매우 현실적인 가치가 있다. 내 기억에 <<독서>> 잡지에서 과학주의와 환경문제의 토론을 주최한 적이 있는데, 위광위엔 선생이 내게 말하길, 생태환경 이런 것은 선진국에서나 하는 토론이지, 중국은 지금 이걸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어떤가?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일정한 이론적 시야가 필요하다. 그래야 아직 문제가 되지 않은 문제를 문제화시킬 수 있다. 역사를 재해석하고, 쉬운 전통/현대의 대립구조를 파괴하고, 현대성의 반성부터 출발하여, 발전주의와 이와 관련된 생태, 평등 등의 문제를 깊게 탐구 하는 것이 조리 정연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글이 형성되기 전후에, 지식계에서는 이미 다른 목소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또한 이러한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내 글이 역사분석과 종합서술의 특성을 가진 계기로 지식계의 끝없이 지속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어떤 사람은 이를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분쟁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눈에 "신좌파"의 대표가 됐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자칭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표식화도 모두 문제를 간단하게 축소하고,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진영 간 승패의 다툼으로 발전해, 더는 사상과 이론의 토론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사상논쟁은 개인의 의지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어서, 한번 발생하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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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쟁의와 논쟁을 해왔으며, 계속해서 한 번 다시 한번 공격 당했다. 처음에는 매우 불편했지만, 점점 안정되었다. 논란이 가치가 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천천히 재인식하겠지만, 안타깝게 양질의 비평이 매우 적다. 내게 이 글은 시종일관 한 편의 메모였다, 나의 더 많은 작업은 <<현대 중국사상의 굴기>> 책의 연구와 집필 과정에 집중되었고, 이 4권의 책이 발표된 후, 나는 다시 20세기의 여러 가지 주요 사건과 사상에 대해 비교적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나의 당대 문제에 대한 사고와 개입은 대부분은 역사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번역: Swain
글 원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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