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도시계획가의 판타스마고리아

in #urban-planning7 years ago

Intro

도시는 성장해야 한다. 도시는 집단성과 익명성이 공존하고, 단순한 정주공간을 넘어 이상을 추구하고, 사회·경제·문화 등의 무형의 힘이 작동하는 실제의 공간이다. 도시계획은 도시 성장을 위한 계획이고 Parxis로서 실천적 학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으며,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계획하고, 관리하는 도구로서 도시 공간을 조정하는 장치이다. 반면 도시계획가는 과거의 도시관리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며, 도시민의 형평성을 보장하고자 노력하고, 나아가 균등한 참여의 기회와 고른 분배를 추구하는 등의 도시계획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기술자의 특성을 갖고 있다. 도시계획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시대상을 반영한 물적·비물적 공간의 변화를 조정하고 다루는 하나의 장치이고, 도시계획가는 도시라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루는 기술자라면, 응당 도시는 인간이 거주하기 좋은 환경을 위한 노력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대응에 유연해야 함이 그 기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일텐데, 지금 우리의 도시는 과연 그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e)는 1908년 프랑스의 에밀 콜(Emile Cohl)이 만든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다. 어두운 방안 환등기를 통해 움직이는 환상적인 빛의 마술은 최면을 걸듯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애니메이션은 이처럼 유럽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정작 그것을 산업으로 꽃피운 것은 거대 미국의 자본시장이며, 이에 판타스마고리아는 곧 환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현대도시에서도 판타스마고리아는 여전히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도시의 밤은 마치 마술환등처럼 싸이키델릭한 불빛을 내뿜으며 불야성을 이룬다. 밤샘 영업을 하는 편의점의 네온사인과 조명 광고판의 찬란한 불빛, 아케이드의 화려한 전광판과 그 안에 진열된 번쩍이는 상품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밤을 삼킨 환상에 의해 도시의 몽환극이 펼쳐진다. 필자는 이처럼 눈부신 환상과도 같은 판타스마고리에 빠져 본래 갈 길을 잃은 어린 양과 같은 처지에 놓인 도시계획(양립할 수 없는 성장과 분배라는 특성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계획)과 마돈나 콤플렉스에 빠진 도시계획가들(모든 분야를 통섭하고 조율하는 것이 도시계획가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도시계획 이론은 Thoeria가 되어가고, 도시계획 실무는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쓸쓸하다. 지붕은 내려앉고 도로는 잡초로 뒤덮인다. 학교가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은 거리, 그 곳에 파멸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미스테리 소설 속 한 장면과도 같은 이 모습은 현재 전국 곳곳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지방소멸이라는 섬뜩한 용어를 선보인 마스다 히로야는 일본의 896개 지자체가 소리 없이 증발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일본 전체 지자체의 절반이 소멸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일본의 상황을 뒤쫓아 가는 모양새다. 오히려 두 나라 간의 경제적 격차나 인구사회현상을 보면 더욱 심각하다면 심각하지 덜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인구 절벽이라는 현실이 점점 다가오고 있은 지금 나아가 멀지 않은 장래에 인구 제로(0) 마을과 지자체가 나타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즉,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던 유령 도시의 출현이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말한다.

마을과 도시가 사라지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고, 이러한 상황에 도시계획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일자리 소멸’을 첫 째로 꼽는다. 산업의 쇠퇴 등 도시 성장 동력의 붕괴에 따른 일자리 소멸과 그에 따른 젊은 인력의 유출이 도시 쇠퇴를 촉발하는 것이다. 도시는 원론적으로 인구가 밀집되고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중심이 되는 장소이며 인적·물적 자본이 집약되는 곳으로 기본적으로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시의 성장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가속화 되었으며, 다양한 도시문제의 발생으로 자연적이고 자가 치유적인 도시공간관리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 나타나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으로 인해 주택문제, 전염병 등 다양한 도시문제가 나타났고, 부르주아 계급의 공간 분리 욕구로 결국 공중위생법이라는 주택법 제정이 되어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결국 도시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고, 계획은 그러한 욕구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도시는 이처럼 인간이 계획이라는 통제 장치를 통해 관리해왔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예측한대로 발전하며 통제 되어오지는 않았음은 분명하다.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도시계획이 도시를 온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례는 일본의 유바라시와 미국의 디트로이트, 한국의 탄광도시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1960년대 인구 10만 명을 자랑했던 유바라시는 석탄산업 사양화와 함께 지금은 단 9000명의 인구만 거주하고 있다. 그것도 65세 고령인구가 절반에 달한다. 자동차 산업이 쇠퇴한 디트로이트도 마찬가지다. 태백시와 정선, 삼척도 같은 운명이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주민의견을 반영하는 등의 자구노력을 펼쳤지만 반전의 기미를 찾기는 어려웠다. 끝없는 인구감소와 경쟁력 상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산업도시라는 계획된 도시(혹은 계획되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도시일지라도)는 관리 없는 성장의 이카루스 날개만 믿고 끝없을 줄 알았던 비상과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날개의 밀랍이 녹는지도 인지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단순히 산업의 쇠퇴와 그에 대한 변화와 대응의 실패 등 경제적인 원인으로 탓을 돌릴 수 있겠지만, 과연 도시계획이 이러한 결과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의 도시계획 이론들을 살펴보면, S.Fainstein의 Just City를 비롯하여 참여와 균등한 기회라는 도시민의 형평성에 대한 계획이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는 것이 계획가의 역할로 대두되고 있고, 도시 사회의 생활에서 보다 많은 사람 혹은 권력구조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진보적인 계획 수립의 과정을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흐름 속에 R.Beauregard와 같은 학자들은 Thoeria를 추구하는 듯한 현대의 도시계획을 비판하면서 도시계획은 Parxis와 같은 실천적 학문으로 접근해야 함을 비판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도시계획가들은 과연 시민들에게 보편적이고 형평성 있는 계획의 수립을 통해 도시의 쇠퇴를 막고, 대응해나가자고 한들 과연 그것이 효력이 있을 지는 미지수라고 생각된다.

대개 진보라고 불리는 움직임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유토피아를 쫒아가기 보다는 실패한 유토피아로부터 달아나려는 노력, 예상만큼 좋지 않던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는 것, 미래의 행복보다는 과거의 좌절로 인해 자극을 받은 결과였다.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고 선언된 현실은 꿈꾸던 낙원이 아니라 꿈의 조잡한 모사에 불과했다. 다시 돛을 올리는 압도적인 이유는 앞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꿈의 유혹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2010)

지그문트 바우만은 진보라는 것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꿈이라는 혹은 다소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비전, 성장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혐오스런 상황들의 개선이 진보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다소 소극적이며 열려있지 않고 갇혀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생각하는 진보라는 것이 과연 도시의 미래에 적합한 개념일까. 도시의 본능이 성장이라는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또 계획이라는 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사회 변화를 공간이라는 한정되고 전문화된 시각으로 예측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라면, 지금 도시계획가들이 행하고 있는 것은 진보라는 틀과 매끄럽지 못한 홈 패인 공간에 스스로 갇혀 도시의 본능을 억제시키고, 더욱이 어떠한 경우에는 정치권력에 굴복하여 시민의 표를 얻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서 계획을 꼭두각시처럼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는 5년간 50조원의 공적재원이 투입되는 도시재생뉴딜사업의 밑그림을 내놨다. 첫 시범 사업지 68곳을 선정하였고, 이 사업은 철거와 정비방식이 아니라 주민들이 원하는 마을 도서관, 주차장 등 소규모 생활편의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정책의 실현에 앞서 계획의 내용을 보면 기우일지는 몰라도 우려가 앞선다. 진보를 대변한다고 일컫는 정권과 이에 단지 한 정권의 정책적 기조에 부합한 도시계획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뉴타운 사업 등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바우만이 주장하는 진보와 다를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재생에서 사람은 없고 돈만 퍼붓는 사업 중심의 정책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에서 두 가지 핵심적인 측면인 자본가와 노동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의 기본 조건 충족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장소의 제공이 공간의 재생산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재생(再生)이 아닐까.

왜 각국 정부와 지자체는 ‘도시 소멸’을 막지 못하고, 도시계획가들은 도시재생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대학교 마강래 교수는 <지방도시 살생부-‘압축도시’만이 살길이다>는 저서를 통해 지금까지의 노력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서 1장2절)”라는 성경구절로 설명한다. 마강래 교수는 “모든 곳을 살린다는 건 환상”이라며 축소를 받아들이고 압축을 통해 질적 체질개선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 권력의 약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있기 때문에 각 지자체가 동의하기 쉽지 않겠지만,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도시계획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비판하며 그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함을 주장하는 듯하다.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가, 깨지 못한 오이디푸스 징크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변증법적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영위하고 바꾸고자 했던 도시 공간 자체에는 어떤 문제가 없을까. 다음 아래의 벤야민의 글을 살펴보자.

대도시 속에서 어린아이는 꿈이 좌절되고, 전도되고 왜곡되는 공간 속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물이다. 대도시는 현대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장소이다. 대도시 속에서 놀이는 노역으로, 호기심은 물신성으로, 상호성은 횡포로, 즉흥성은 고역으로 변모한다. 인간 주체의 자연사는 부정된다.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은 부르주아의 실내로 자물쇠가 채워진다. 죽음은 제거되어, 특별한 장소에 한정된다.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2005)

벤야민은 현대성의 신화적 형식을, 상품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현대의 소비자 자본주의의 조건하에 상품이 물신화하는데 초점을 두면서 드러내야 했다. 상품은 내부에 19세기 파리 사람의 사회적 삶의 모든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게 상품은 현대 문화 형태라는 총체성을 파악하는 열쇠를 포함한 단편이었다. 어린아이는 마치 오늘날의 도시계획가와 같고, 상품 물신성은 꿈꾸고 있는 도시 집단의 특성을 의미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유행은 집합체가 살았던 순간의 어둠 속에 있다. 19세기의 유행과 건축은 집단의 꿈 의식에 속한다. 사람들은 광고에서처럼 깨어 있으면서도 꿈 의식을 추구한다.” 19세기 산업 복합체의 산물과 사치품 그리고 이국적 물품 속에는 제국의 경계와 야망의 확장이 들어 있다. 또한 거기에는 과거의 구원을 요구하는 현재의 순간과 도시적 공간의 물신적 성장이라는 유토피아적 충동에 대한 밀착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꿈꾸는 공간을 현대의 도시들은 도시의 재생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방향키를 놓친 채 바다 한가운데를 방황하고 있는 것과 같다.
1930년대, 독일의 저주받은 사유가 발터 벤야민이 거닐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도시 근대화의 산실이었다. 자본과 자본의 운동법칙이 공간 속에 물화되어 배치되던 시절이었고,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이 새롭게 사유되던 시기였다. 그 공간을 산보했던 벤야민은 시대적 우울함을 읽어내었고, 근대성의 사유를 근심하기 시작하였다. 도시는 이제 단순히 삶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명체였고,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의식과 시선,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쳇바퀴 같은 삶을 강요당하거나 주입당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지금의 현대도 마찬가지이고, 도시 공간 자체는 1930년대의 파리와 2010년대의 서울 다를바 없이 느껴지고 있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상품 물신성의 공간이자 유행의 중심이다. 상품세계는 한계 없는 다양성의 원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상품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취향과 스타일, 혁신적인 형식과 디자인의 집중점이다. 파리는 마치 지금의 서울과 같이 가장 새롭고 좋은 상품들의 장소이다.
대도시 환경의 경험은 새로울 것이 없는 중단 없는 반복과의 끝없는 조우이다. 새로움은 “유행이 부단한 대리인인 잘못된 의식의 정수이다. 새로움의 환영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처럼 영원한 동일성의 환영을 투영한다. 이러한 투영의 산물이 부르주아가 허위의식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문화사’의 판타스마고리아이다.” 대도시 환경의 경험은 새로울 것이 없는 중단 없는 반복과의 끝없는 조우이다. 이것이 현대성의 신화적 성격의 바탕이다. 상품 물신화와 유행의 매혹은 현대 대도시를 반쯤 잠든 지루한 노에 상태로 마법을 거는 핵심 요소들이다. 이 상품 물신화에 근거한 도시 공간이 바로 지금의 도시 쇠퇴를 초래한 근원인 것이다. 가장 거대한 상품으로 치부되는 도시는 자본가들에 의해 분열되고, 왜곡되는 것이며, 이에 공간의 불균형으로 인한 낙후와 쇠퇴로 죽은 공간이 탄생하고 비민주적인 공간 계획 수립으로 재생산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계획이라는 학문이 Theoria의 영역으로 변화해가고, Just City라는 도시 이론이 주목받는 지금의 상황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을 타개하고자 진보를 추구하고, 유토피아라는 나아갈 방향을 잃은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가들은 재생이라는 과거의 실패를 덮고, 벗어나기 위한 노력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Outro(재생이 아닌 재생산을 위한 도시계획)

결론적으로 우리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가들이 나아가야할 길은 그 본질을 되짚어 보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계획은 왜 필요한 것이며, 미래 비전은 어떻게 설정해야하며, 지금의 도시문제는 어떠한 방향으로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등. 본 글에서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가들의 방향이 무엇인지 뚜렷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금의 재생이라는 늪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향은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혹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 사이에서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미래를 위한 도시계획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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