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
사람마다 시기마다 상황따라 꽂히는 책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 국민서관에서 나왔던 60권짜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유독 표지가 해질만큼 마르고 닳도록 본 것이 있었는데 그게 ‘대장 불리바’ (부리바라고도 하고 원래 발음은 불바라고 하는데, 그냥 불리바라고 부르겠다)였다
.
그 책은 성미 급하고 술 좋아하는, 그러나 용맹스러운 코사크 (책에서는 카자흐로 나와 있었지만) 불리바가 키에프에 유학가 있던 오스타프와 안드리의 귀환을 수선스럽게 환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
불리바는 두 아들을 이끌고 코사크들의 집결지인 세에치로 간다. 이 무렵 폴란드는 중부유럽에서 꽤 힘을 쓰는 대국이었고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코사크들은 오스만 투르크와 맞서면서 폴란드와 손을 잡기도 했지만, ‘원수 같은 가톨릭 놈들’ (폴란드는 가톨릭, 코사크들은 그리스 정교)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불리바와 오스타프, 안드리 삼부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가담한다.
.
승승장구하던 코사크 군대는 두브노라는 곳에서 폴란드 군에 가로막힌다. 악착같은 코사크 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두브노 성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폴란드 증원군이 도착하고 그때부터는 공성전이 아니라 야전이 펼쳐지는데 전쟁 영화 좋아하던 초딩이어서 그런지, 그 전투 장면들이 그렇게 멋있고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다.
.
용맹한 쿠쿠벤코, 백전노장 보브듀크, 폴란드 귀족과의 1대1의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쉴로, 오스만 투르크를 탈탈 털었던 해적 출신의 바라반. 그들은 죽어가면서 한결같이 부르짖었다, “더 용맹한 코사크가 더 많이 태어나기를. 코사크에 영광을.”
.
이 소설에 등장하는 타타르인들은 몽골의 후예들이 세운 크림 타타르 쪽 사람들인 것 같은데 타타르인들이 코사크의 본거지를 기습하면서 불리바의 부대는 둘로 나뉜다. ‘단장’ (코사크 말로 헤트만이라 하는데 전시의 총사령관)은 돌아가자고 했고 불리바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
두브노 앞에 남은 이들의 단장은 불리바가 맡는다. 하지만 반쪽이 된 코사크 부대는 폴란드군의 맹공에 밀린다. 한편 두브노 성 안에 있던 폴란드 사령관의 딸 메쩰리는 키에프에서 봤던 불리바의 둘째 아들 안드리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고 불리바는 폴란드 군복을 입고 멋지게 머리칼 휘날리며 코사크들을 쓸어버리는 아들을 보게 된다.
.
불리바는 안드리를 숲으로 끌어들였고 그의 말고삐를 잡아챈다. 그리고 아들을 험악하게 꾸짖고 총을 들이대는데 그때 안드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코사크의 영광’이 아니라 메쩰리였다. 불리바는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겨 버린다. 그리고 묻어 주지도 않는다.
.
마지막 전투에서 맏아들 오스타프는 사로잡히고 불리바는 평소 경멸하던 유대인 얀켈리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둘째 아들을 서슴없이 죽여 버린 불리바지만 맏아들에 대한 부정(父情)은 간절해서 폴란드 깊숙이 들어가 코사크 포로들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자 한다.
,
오스타프는 코사크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당당하게 고문을 받는다. 신음 한 번 내지 않던 오스타프는 등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순간 “아버지!”를 부르짖는다. 그때 불리바는 절규한다. “오스타프야 내가 여기 있다.” 오스타프는 죽어가면서 그 비명을 들었을까. 처형장을 빠져나온 불리바는 곧 코사크 12만 대군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다. 책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소규모 집단의 약탈이 아닌 코사크 전 민족의 봉기”
.
불리바의 복수가 시작됐다. 그에게 ‘악마같은 가톨릭 놈들’은 누구든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수녀원 문을 못질하고 불태우면서 수녀들의 비명을 들으며 저주를 퍼붓는 불리바에게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아들의 최후를 본 아버지의 심경도 이해가 갔다. 불타는 적개심으로 폴란드인들을 몰살시키려는 불리바는 단장과 내분을 겪고 결국 코사크 군은 폴란드 군에게 격파당하고 불리바는 포로가 된다.
.
폴란드 군은 불리바를 화형대에 걸고 불을 지른다. 그런데 화형대에 매달린 불리바는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것보다 코사크군의 후퇴 경로를 보며 거기가 아니야!!!!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겨우 길을 찾는 것을 보며 환호한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다.
.
이 대장 불리바의 주요 무대가 우크라이나였다. 불리바 이하 코사크군들이 그렇게 함락시키고 싶어했던 두브노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다. 코사크들의 본거지라 할 자포로제는 오늘날 친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져 있는 지역에 해당한다. 대장 불리바를 쓴 고골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러시아 어로만 작품을 발표했지만)
.
17세기 폴란드의 압제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킨 코사크가 모스크바의 차르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그를 군주로 인정하는 것을 댓가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의 자유와 자치를 얻을 목적으로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지만, “이 조약이 우크라이나 역사의 전환점이 되어 그 이후 러시아에 병합되는 첫걸음이 됐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구로카와 유지로 저)
.
우크라이나라는 땅도 있고,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라가 없었다. 불리바가 이끈 것이 나라의 군대가 아니라 코사크 ‘민족’의 군대였듯이. 11세기 키에프 공국이 몽골에 무너진 후 근 천년 동안 그랬다. 그들이 독립을 성취한 것은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머리”라던 레닌의 공산주의 나라 소련이 망한 뒤였다.
.
그들이 독립한지 30년.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독립적인 역사와 전통 없이 소련의 은혜로 탄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국의 역사는 몰라도 독립적인 전통과 역사가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건 푸틴도 즐겨 읽었을 것이고 나도 탐독했던 ‘대장 불리바’만 봐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
자기네 선거 이용하자고 전쟁 맞은 나라 국민과 대통령을 두고 “방송 프로그램 보고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멍청한 국민들”이라는 저질스런 조롱이 난무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그 ‘아마튜어’ 대통령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선 모습 앞에서, 전쟁나자마자 저 혼자 토껴 버린 대통령의 역사를 지닌 나라 국민으로서 부끄럽다.
.
더하여 신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두고 “핵무기 포기할 때 NATO 가입 했어야지!”라고 말하는 무지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활보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무력감을 느낀다.
.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천년만에 찾은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내기 바란다. 지혜로운 선택으로 가능한한 피와 눈물을 아끼되, 과거 코사크를 억압하던 폴란드처럼 러시아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온다면 대장 불리바와 그 아들 오스타프. 쿠쿠벤코, 쉴로, 보브듀크, 스테판 쿠스카, 바라반, 내 어릴 적 책에서 만났던 코사크의 영웅들처럼 싸울 수 있기를. 그들의 건투를 빈다.
.
덧붙여 우크라이나 국기는 참 잘만든 국기라고 생각한다. 광활한 밀밭과 푸르른 하늘. 한 나라의 특징을 이렇게 단순하게 하지만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