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부장의 라떼]009. 스펙에 대하여
패션 업계 진로를 희망하는 취준생들의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이미 취직에 성공하였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커리어를 더 잘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묻는 후배들도 많이 있다. 특히,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을 하기 위해, 자격증을 따야할지, 영어공부를 해서 시험 점수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소위 스펙을 더 쌓아야 하냐는 것이다.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본인이 꿈꾸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아무래도 하루하루 업무를 하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나중에 나의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모호해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가 매일을 쏟아 노력하고 있는일이 헛수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니까.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하는 후배분들에게 나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내가 첫직장에서 3년차 쯤 되었을때, 나는 여전히 우리팀의 막내였다. 막내의 일이란 어느회사나 같다. 복사, 심부름, 회의에 들어가면 속기. 엑셀 데이터 정리. 거기에 덧붙여 패션회사의 막내는 샘플 정리와 택배, 퀵, DHL도 도맡아야 한다. 재미가 있을리가 없다. 지루했다. 내가 이런 일이나 하려고 대학나왔나. 이런 일로 승진을 할수는 있나? 이런게 커리어에 무슨도움이란 말인가?
때 마침 그때 우리 브랜드의 본부장이 바뀌었었다. 새로 오신 본부장님은 직원 한명 한명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스타일의 상사셨다. 중간매니저들 뿐만 아니라 나와같은 말단 사원들과도 일일이 일대일 면담을 하며 직원들이 의견을 수집하고 회사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많은 시간을 쓰시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일대일 면담 순서가 돌아왔다. 본부장님은 "본인의 5년후에는 뭐가 되어있길 바라세요?" 라고 물으셨다.
나 따위의 막내급에게 이런 관심어린 질문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듯 가볍게 대답했다.
"회사 그만두고 MBA에 입학해 있을 거 같은데요"
어려서부터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매우 전형적인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가고,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은 회사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성공에 이르는 방법 또한 매우 전형적인 것이었다. 공부는 잘하고, 성적 잘 받아서, 좋은 회사 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돈 많이 버는것.
그리고 더 빨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부족한 스펙은 계속 해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유명 해외 대학 유학파, 석사, 박사, MBA 이런 타이틀의 스펙들은 성공으로 가는 기본 덕목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유학파도 석박사도 아니니까, 회사 경험을 어느정도 쌓고 나면, 5년차 정도에는 퇴사하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해외 좋은 MBA를 가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계획은 내 마음속에 너무 당연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나는 회사를 5년만 다닐 생각이라고 쉽게 말하고 다닐 지경이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단순업무만 맡아서 하고 있던 처지였으니, 아마도 회사에서 배울 것이란 이런것들 뿐이라면 5년이면 충분히 다 배우고도 남겠다고 생각도 했던 것이다.
잠시 빙그레 웃으시더니 본부장님께서는
“MBA에서 배울 것 내가 다 가르쳐 줄게요. 우리 회사에서 오래 같이 일하면 좋겠네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내 이력서상의 개인적 특이사항 등에 대해서 몇가지 더 물으신 후 면담을 마쳤다.
참 묘한 면담이었다. 나의 미래 진로에 관심 가져주는 상사는 처음 이었을 뿐더러, 내가 뭔가 잘못한거 같은데(그땐 뭐가 잘못인지도 몰랐음) 분위기가 그냥 나쁘지 않게 흘러간게 이상했다. 야망있는 직원이라고 귀엽게 생각해주셨으려나...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열심히 샘플을 까고 나르고 택배를 싸고, 엑셀에 수식을 읽고 숫자의 의미를 찾아내고, 매장을 쫒아 다니고, 여기저기서 소비자를 만나고 상품에 대한 불만을 듣고 조아리고, 매출이 떨어질때마다 긴급 대책을 세우고, 전산에 상품정보를 등록하고 수정하고 오류를 발견하면 IT팀과 싸우기도 하고…
MBA고 뭐고 매일매일 닥치는 일을 처리해대느라 정신없이 시간은 흘렀다. 종종 말도안되는 실수를 해서 팀장님께 불려가서 내 실수로 발생한 재무적 피해가 얼마인지 소명해야하는 일도 있었지만,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완성해나가면서 작은 보람들도 누적되어 갔다.
실수들과 성과들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리고 그 것들은 나를 만들어 나갔다. 나는 이제 열번 고민하던 일도 한번 생각해서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고, 두세번 할 일도 한번만에 완성시킬 수 있는 정확도도 가지게 되었다. 팀장님과 선배들에게 내 의견을 설득시키는 방법도 대충 눈치껏 알게 되었고,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 것인지 어느정도의 감도 기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에게 맡겨진 업무의 중요도도 커졌다. 혼자할 수 없는 양의 일이 맡겨지자 아래 직원을 붙여주며 팀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리고 옆팀과의 중요한 소통의 대표가 되었다.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데에 발언권이 있는 사람이 되었고, 한국을 대표하여 글로벌과 소통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직도 하게 되고, 한국을 떠나 한 브랜드의 아시아 상품기획자가 되기도 했다.
회사의 일이라는 것은 늘 그 자리에, 바위처럼 변하지 않고 지루하게 있는 것 같더니, 지구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시간도 체감하지 못하는 새에 천천히 어느새 꽤 흘러 있었다.
내 커리어 7-8년차 쯔음 되었을때, 앞서 말한 본부장님과 면담으로 부터 딱 5년이 지난 시점이었던 것 같다. 한 회사를 퇴사하고 여유가 생겼던 나는 다시한번 MBA 진학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쉽게 결정을 했다.
굳이 MBA에서 비지니스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학교라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 학생이 되는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 이 산업의 현장에서 내가 해야될 일이 너무 많았다.
내가 다음시즌 시도해보고 싶었던 그 상품, 그 타겟 고객들을 대상으로 내가 테스트 해보고 싶었던 마케팅 전략, 조금만 바꾸면 바로 매출로 연결될 것 같은 그 유통구조.. 등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시장 상황 속에서 바로바로 시험해보고 배울 수 있는데, 몇년 전의 성공사례 등을 요약해서 간접 경험으로 학습하는 학교로 간다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또한, 배움의 목적이 아니라 스펙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도 나에게 이제 MBA는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나의 스펙이라 부르는 조건은 신입사원때와 동일했지만, 이제 내 경험치 만큼 내 이력서에 기술할 내용은 자연스럽게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번도 스펙 때문에 이직을 하는데 부족함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쭉... 나는 현장에 있다.
나의 매일은
고객을 만나고,
매장에 나가고,
매출을 돌려보고,
대안을 세우고,
회의를 하는.
지루한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내가 고객을 기쁘게 하고,
회사에 기여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 시간들은 부지런히 쌓여서,
미래에 나를 멋지게 설명해 주는 최고의 스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