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4가지 비밀 계획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상 성공한 기습작전으로 꼽힌다.
낙동강까지 진군한 북한군에 국토의 90%를 빼앗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적진에 뛰어드는 모험을 해야 했다. 그들은 최종적으
로 4개의 작전을 마련했다. 3개의 예비계획은 성공한 작전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다.
최초의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블루하트 계획’이었다. 전쟁 발발 불과 닷새 만에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은 처음부터 인천을 최적의 상륙지로 꼽았다. 그러나 다음날 전차
를 앞세운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했다.
맥아더장군은 결국 블루하트 계획을 접고 새로운 ‘크로마이트 계획’을 구상한다. 그는
그러나 난관은 또 있었다. 낙동강의 유엔군과 인천의 거리가 너무 멀다며 ‘전북 군산’을
대체지로 정했다.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미 합참
의 의견이 부분 수용돼 ‘군산상륙작전’은 예비계획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크로마이트 작전의 시행되지 않은 예비계획 ‘100-A다. 실제로 실행된 인천상륙
작전은 ‘100-B’라는 명칭이 붙었다. 인천 또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데다 서울에 대규모 북한군이 주둔해 있어 희생이 우려되었다. 미 합참은 ‘100
-C’, ‘100-D’라는 보조계획까지 마련했다.
100-C는 인천상륙과 동시에 군산에 1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계획이다. 낙동강 전선의 미
8군이 재빨리 북진하기 어려울 경우 ‘군산 상륙군’이 대전을 급습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
하는 작전이다. 100-D 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강원도 강릉~주문진 지역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보조계획이다.
결국 ‘100-B’가 단독으로 대성공하면서 예비계획인 100-A와 보조계획인 100-C·D는 실행
되지 않았다. 얼마나 속도가 빨랐는지 불과 1개월 뒤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까지 진격한다.
맥아더 장군은 미 지휘부와 ‘5000대1의 도박’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인천이 최적의 상륙
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이 아닌, 수도 서울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것이 6·25 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이다.
본문 이미지: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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