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독후감
서평이라기엔 너무 허접하니 독후감이라고 하자. 앞으로도 읽는 책이 있다면 여기에 독후감을 올리도록 하겠다. 취향이 굉장히 편중된 사람이므로 감안하고 읽어주었으면 한다.
필립 K. 딕, 줄여서 PKD의 장편선 12권을 샀고, 그 중 첫번째로 읽은 작품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출판사는 폴리북스, 박중서 선생님이 번역하셨다. 읽는 데에는 대충 3일 정도 걸렸고, 어제는 새벽 5시까지 읽으면서 독파했다. 덕분에 오늘은 오후 4시에 일어났다.
일단 작품 외적인 이야기 먼저 해보자면,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직전에 읽은 테드 창의 단편짐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비하면 굉장히 번역이 별로다. 예를 들어 32페이지에 "국방부와 독선적인 가신 랜드 연구소의 용감한 예측에도, 그 전쟁은 무척이나 값비싼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쓰고 있는데, 전쟁이 값비싸다는 것이 그 전쟁에 든 돈이 많다는 것인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전후 맥락으로 따져봤을 때, 원문은 "the war has been found to cost a lot" 정도가 아닐까 싶으며, 올바른 번역은 "전쟁은 값을 많이 치렀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개념과 사상 자체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사상도 지금의 기준에서 상당히, 소위 말해서, "빻았다." 같이 PKD의 작품을 읽고 있는 선배의 말에 의하면 단편집에서 자신은 낙태에 반대한다던가, 여성혐오적인 묘사가 등장한다던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당연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것은 1968년 작으로 옛날 소설이니 당연한 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어슐러 르 귄의 1969년 작 <어둠의 왼손>이나 1974년 작 <빼앗긴 자들>이 얼마나 진보적인가를 고려해보면 상당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일단 작품 외적인 이야기이다. 작품 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줄거리는 영화와 비슷한데, 현상금 사냥꾼인 데커드 릭(영화와 이름이 같다)가 6명의 안드로이드(영화에서는 레플리컨트)를 뒤쫓다가, 여러가지(레이철에 관한 일을 포함한) 일을 겪으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게 되고, 결국 안드로이드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다. 주제 의식은 일단 인간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뒤에 해설을 읽어보니 PKD의 작품의 주된 주제 의식이 이것인 것 같다.
작품 전체에서 인간성의 주요한 지점으로 꼽히는 것은 '감정이입'이다. 인간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지만, 안드로이드는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안드로이드는 다른 동물을 배려하지 않는 본질적인 살해자이고, 그러므로 주인공 릭 데커드는 본질적인 살해자인 안드로이드를 죽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감정이입 장치는 개인적이면서도 모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장치로 묘사하는데, 이 장치를 사용하면 모든 사람들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나누면서, 또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는 손잡이를 잡으면 감정이 공유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또한, 사치스러운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인간성의 증명 자격으로 등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동물을 기를 수 있는 것이 동물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로 된 동물이 판매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양을 기르다가 죽어버려 전기양으로 대체했다. 그러므로 작품 초반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은 기계에는 감정이입하지 않고 동물에 감정이입한다. 이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검사하는 방법으로서 동물에 제대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보이드 캄프 검사'가 쓰인다. 이는 영화의 묘사와 거의 동일하다. 안드로이드가 감정 표현에 서투르며 감정이입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소설 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관념을 주입하는 것은 머서교라는 종교이다. 윌버 머서라는 가상의 인물이 사람들이 감정이입하고 서로 연결되는 데에 중요한 매개물이 된다. 그 반대에는 TV쇼인 버스터 프렌들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머서교가 허구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설정이 등장하는지, 왜 종교와 미디어가 대립하고 경쟁하는지는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소설을 다시 좀 더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문제는 '넥서스-6'라는 새로운 안드로이드 기종이 인간과 너무 닮아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에 감정이입하기 시작한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로봇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멀지 않은 과거에, 페이스북에 개 모양의 로봇이 나오고 이 로봇이 스스로 균형을 잘 잡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사람이 옆을 발로 차는 영상이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영상에 대한 덧글 대부분이 "로봇이 너무 불쌍하다." 였다.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거나 할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로봇 청소기를 물건이 아닌 애완동물처럼 여긴다는 것을 또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릭 데커드는 점점 안드로이드에 감정이입하게 되고, 그의 직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 외에도 작품 내에서 계속 사람들이 로봇과 동물을 착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릭 데커드는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즌 사에 갔을 때, 로봇 올빼미를 진짜 올빼미로 착각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존 이지도어는 죽은 진짜 고양이를 로봇 고양이로 착각하여 고치려고 한다. 이처럼 로봇과 생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가는 인간성, 감정이입의 영역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나 소설이 말끔한 대답을 주면서 끝나지는 않는다. 머서교의 구원자격인 윌버 머서는 허구의 인물이었음이 드러나고, 사람들은 머서교를 믿지 않게 되며, 그 와중에 안드로이드에 감정이입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스스로를 윌버 머서의 현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대중소설의 영역으로서도 충실한 소설이다. 플롯도 괜찮고, 나름 반전인 부분도, 복선을 던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영화를 보고 읽으면 약간 실망할 수는 있다. 영화와 다르게 릭 데커드 스스로가 안드로이드인지 고민하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고 읽으면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로서 플롯을 존중했을 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뿐이지 읽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술술 읽히니 시간 내서 읽을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