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2] 한 수 배우다

in #sct5 years ago (edited)

연어입니다. 요새 저를 진료하고 있는 한의사 분에게서 배우는 바가 큽니다. 진료를 마치고 결제를 할 때마다 진료비나 치료비가 아닌 수업료를 내는 기분이네요.


■ 좋은 의사

제가 생각하는 '환자 입장에서 좋은 의사'는 많은 어르신들이 추천하는 '용한 의사'와 많이 다릅니다. 주변에서 '그 의사, 참 잘한다'고 소개 받아 본 의사들에게선

  • 의사스러운 복장에 근엄한 표정
  • 척 보면 다 안다는 듯한 진료 스타일
  • 나만 믿으라는 듯 후다닥 적어주는 진료 차트
  • 주사와 잔뜩 약을 퍼붓는 처방

과장 살짝 보태서 위와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환자 입장에서 좋은 의사'는

  • 의사와 환자가 병과 통증을 함께 의논해 나가고
  • 충분한 문진과 검진을 통해 상태를 파악해 나가며
  •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원인과 진단을 내리고
  • 하나씩 검증해 가며 병의 근본 원인에 접근해가는

태도를 갖춘 의사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했다간 병원을 말아 먹거나 실력없는 의사란 소문만 퍼지기 십상이죠.

이쯤되면 우리가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고치기 위해 의사를 만나는 것인지, 점쟁이에게 묻듯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아맞추라고 몸을 내미는 것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 의외로 헛점을 보이는 병의 진단

병원을 찾게 되면 대부분 병을 고치고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 의학에 집대성 된 지식, 노하우, 시스템은 대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 맹점도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한 번은 잔기침의 원인을 알 수 없어 이비인후과, 내과, 내분비과, 한의원 등등 온갖 병원과 의원을 돌아다녔음에도 4년이 지나서야 어느 한 의사분의 끈질긴 문진 덕분에 저에게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글에서 한 번 남긴적도 있었지만 부비동염을 알아내기까지 근 한 달 이상을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그 사실을 알아낸 계기는 병의 가능성을 리스트화 하고 장기 플랜으로서 하나씩 확인하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 한국의 의료 체계에서는 환자를 충분히 살피고 병의 원인을 차근차근 캐며 접근해 들어가기 보다는 뭔가 때려 맞추기 식의 급처방이 훨씬 인기도 많고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 이상한 한의사

그런 점에서 여태껏 만나본 그 어떤 의사-한의사보다 마음에 드는 한의사를 만난 듯 하여 진료를 정말 마음 편하게 받고 있습니다. 이건 말이 진료지 그동안 제가 살아온 생활 방식과 관리해 온 몸 상태에 대한 거국적인 진단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나이는 제 또래 쯤? 일반적인 의사나 한의사라기 보다는 흡사 공대 출신의 연구원 같은 풍모와 스타일이 보입니다. 아마도 동네 어르신들이 처음 보면 '뭔 의사가 이리도 카리스마가 없누.. 이래서 병이나 고치겄어?'라고 하실법 합니다.

왠지 한의원에 가면 당할 듯한 침 세례, 보약 짓기 등도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

  • 어떻게 하면 최소한으로 몸을 건드려(치료) 최대의 효과를 낼까?

이런 명제를 갖고 있는 듯한 치료 방식이네요. 그리고 당장 치료해야 할 부분 보다는 뭔가 한 단계씩 근본적인 질문을 하거나 상황을 얘기 합니다.

이번에 한의원을 찾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어깨가 아파서인데, 정작 치료 과정에서는 저의 숨쉬기를 계속 체크하는 식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평소 건강하다가도 컨디션이 떨어지면 앓게 되는 부분들, 언제 부턴가 복식 호흡이 힘들어 진 것, 코가 막힌 듯한 증상(비중격만곡증 수술을 받기도), 거북 목, 딱딱히 굳은 목과 등근육, 최근에 시작된 어깨 통증, 거기에 역류성 식도염이 있는 것까지 크고 작은 모든 내용을 다 (알아 맞추거나) 확인해 가며 그 모든 원인이 크게 보면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도 완벽히 또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증상에 대한 제 스스로의 확인 방식이 있었던 터라 한의사 분의 얘기를 조금만 들어도 이해가 팍 되며 여러 연결고리가 이어지고 답답함이 뻥 뚤리는 기분이 들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뭐 수업을 받는 기분이랄까.


■ 논리의 끝판왕, 플로우 챠트

몇 번의 진료를 거치면서 의사와 환자도 코드라는게 생기죠. 이 한의사 분과 저는 꽤 코드가 잘 맞는 듯하니 한의사 분도 진료와 치료 이외의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심지어 정치 성향도 ㅋ)

앞에서 제가 이 분이 마치 공대 출신의 연구원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는데, 오늘 이 분이 이런 얘기를 해주네요.

  • 저는 어릴 때 꿈이 셜록 홈즈 같은 탐정이 되는거였어요.
  • 왜요? 탐정 소설이 그렇게 재밌으셨습니까?
  • 늘 끝을 보고 싶었거든요. 원인을 생각하고 생각해 나가다 보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의 끝.

그러면서 본인의 학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후 몇 분의 좋은 스승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도 깨우치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도 넓혀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는데, 저를 진료 하는데 했던 모든 질문들이나 치료법을 선택하는데 내린 가설과 솔루션의 판단 근거 등을 떠올리며 이 한의사 분의 머릿 속에는 엄청난 양의 잘 정리된 플로우 챠트들이 그려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은 아마도 프로그래머를 했어도 대성했을 싶은 분이 아닐까 싶은데, 순간 처음으로 안철수란 인물이 의사 출신임에도 의학계 보다는 소프트웨어 업계에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키보드를 두드리던 안철수란 사람의 머릿 속에는 수많은 플로우 챠트들이 가득했겠지요.

한의사 분이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냅니다.

  • 제가 어제 생각해 봤는데, 지금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처방을 잘 못 내리고 있습니다.

수의사도 아닌 분이 뜬금없이 무슨 얘기를 꺼내는 것인가 했는데, 본인이 아프리카돼지열병에 대한 정부측 입장과 농민측 입장을 다 들어보았을 때 일단 문제의 원인을 잘 못 파악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짧게 나마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 해주는데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해 가는 사고 방식이 역시나 논리적이면서도 근본 원인을 캐기 위한 플로우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는 면이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 짧은 만남, 큰 교훈

제 몸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슨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치료는 가까운 시일내에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의사 분을 통해 알게 된 저의 건강에 대한 관리 지침은 매우 짧은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들어온 그 어떤 진단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지기에 납득이 됩니다. 납득이 되면 마음이 동하게 되고, 마음이 동하면 오랜기간 진지하게 지켜갈 수 있겠지요.

그리고 비록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났지만 진료에 임하는 자세와 프로로서의 연구 자세가 마치 학생과 선생님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할 정도이니 이 분에게 들이는 진료 시간과 진료비는 곧 수업시간과 수업료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 몸도 고치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네요.

특히나 근본을 향한 가정과 간결한 논리 전개가 매우 인상 깊어서 한 폭의 동양화, 아니 한 폭의 플로우 챠트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니, 이 분처럼 무엇이든 내용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마스터해 나가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사고와 정리 방식에도 대대적인 변화를 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연결해 나가는 활동은 오랜 기간 지속하다 보면 저도 언젠가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사족

오늘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 아이가 넘어져 팔이 부러졌습니다. 대개 엄마는 아이의 뼈가 약한지 걱정하지요.
  • 그럼 달리 걱정해야 할 부분이 있나요?
  • 아이의 눈을 걱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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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을 걱정해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네요 ㅎㅎ

네. ㅋ 왠만하면 아이들은 넘어져도 팔이 부러질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력에 문제가 생겨 넘어질 때는 크게 다칠 수 있나 보네요. 그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부러진 팔이 아닌 시력 쪽으로 갖고 가는 식이죠.

글정말 잘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얼른 완쾌하시길^^

감사합니다. ^^ 건강 회복에 신경 쓰고 있으니 금방 쾌차하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매우 공감입니다.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한 얘기겠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중요한 실생활 팁이기도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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