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 산다는 것
현재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으며,
서울에서 이 곳으로 이사온지 6개월 정도 되어간다.
스코틀랜드에 살면서 느낀 점 몇 가지.
1 날씨... 하 날씨...
평생 스코틀랜드에 산 사람도 여기 날씨가 적응이 안 된다고 하는데
겨우 5개월 차인 내가 날씨를 논할 수 있겠냐마는.
놀랍게도 이것은 아침 10시이다.
생각 이상으로 해를 못 보는 것이 정신 육체 건강 모두에 영향을 많이 끼친다.
내내 어둡고 흐린 날씨 탓인지 평생 살면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요상한 생각들을 하는 스스로가 가끔 무서울 때도 있다.
비타민 D 태블릿을 먹는 것은 플라시보효과조차 1도 주지 않을 만큼 내내 흐린 날씨의 힘이 강력함.
가끔씩 하늘이 이러면 더 불안하다.
갑자기 어떻게 역변하려고 이렇게 밀당을 하는 거지...
그래도 한국 미세먼지 + 영하 18도 콤보를 보면서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아무리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낮아도 영하 18도보다는 낫겠지.
2 놀게 없다.
프린지 페스티벌로 대표되는 도시고 한 해에 열리는 자잘한 페스티벌의 개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심지어 치즈로도 페스티벌을 만든다...
술 종류별로 페스티벌이 다 있고 음식마다 별 희한한 페스티벌이 다 있다.
사실 가 보면 티켓 가격에 비해서 운영이나 퀄리티가 그리 좋지는 않다.
물론 좋지 않은 날씨의 영향도 있을 테고..
워낙 놀 수 있는 공간이 한정적이라서 그런지 클럽에 조금이라도 유명한 디제이가 오면 클럽이 이 모양이다.
한국이면 아무리 길어도 30분 안에 다 정리될 줄인데 2시간씩 밖에서 떠는 것은 기본에
이제까지 가 본 여러 나라 클럽 중에서 관객 매너나 질서가 가장 안 좋은 곳이 바로 에든버러.
얼마 전에는 글래스고에 Jackmaster 보려고 2시간 갔다가 줄이 잘려서 다시 돌아온 경험까지 있었다.
오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시간이 슝 가버린 기이한 경험.
3 좋아하는 것들이 단순화된다.
안 좋은 날씨에 놀 게 없다 보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좋아할 만한 것들이 한정된다.
집착적으로 짐과 GX를 가게 된다.
스쿼트하고 오늘 궁딩이가 얼마나 올라갔나 확인하는 것이 하루 중 가장 기쁜 일.
예매해놓은 공연의 DJ 보일러룸 돌려 듣기.
음악 취향이라도 유럽이랑 잘 맞아서 다행이라며...
진토닉 마실 준비하면서 얼마나 청량하고 맛있을지 기대감 폭발하는 것이라든지.
집착적으로 컵을 사 모은다든가-
주둥이는 하난데 컵이 왜 20개나 필요한가...
하지만 이렇게 깔 맞춤으로 술 마시면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을 어찌함... ㅠ_ㅠ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던 손 많이 가는 음식들을 굳이 만들어 먹으며 뿌듯해 한다든가... 뭐 이런 것들.
심지어 동그랑땡도 빚어먹는 열정.
4 스코틀랜드에서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딱 3가지.
서비스 수준이나 공공기관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있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 업무에 있어서 책임 의식이 상식 이상으로 없는 편이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한국 사람들에게는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거나 서비스가 답답할 때
너 왜 아직 이걸 처리 안 해줬어?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네가 잘못한 게 이거였는데부터 매번 다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정말 큰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믿을 수 있는 것 3가지는.
술도 배송이 되는 아마존. 토요일에도 배송 오고 당일 배송이 될 때도 있다.
칼같이 배송 오는, 혹시 타이밍 안 맞아서 못 받으면 담당자한테 칼 메일 오는 아마존 프라임 사랑해요.
날씨에 상관없이 지정된 약속은 꼭 지키는 테스코 홈 딜리버리 사랑해요. 22
아묻따 브루독 사랑해요. 333
이 셋은 나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고 한다.
5 영어가 늘지 않지만 영어를 잘 못해도 석사를 할 수가 있다.
캐나다에서 7년 차로 거주 중인 호적 메이트가 석사는 영어 못해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뭔 소리야 하고 잔뜩 쫄아있었는데 진짜 할 수가 있네...
한 학기가 지났지만 놀랍게도 아직까지 수업에서 많이 알아들어봤자 5-10% 정도 알아듣는다.
심지어 이번 학기에는 케미컬 엔지니어링이 포함되어있어서 대환장 파티임...
그런데 또 과제는 어떻게 다 해내고 성적이 개떡같지만 시험도 친다.
닥쳐서 해 내는 게 아니라 진짜 영어를 잘 못해도 언어 자체가 문제가 크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불편함과 시간 들임이 엄청나긴 하다만.
어학연수로 온 것이 아니라서 영어 공부에만 따로 집중을 해서 그런지 영어공부를 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서울에서 외국계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영어 적게 쓰고 그 때 보다 더 영어 못함. 하도 말을 안 해서 발음이나 억양 더 구려짐.
6 화재경보기가 평균 1주일에 두 번 이상은 울린다.
화재경보기가 정말 민감한지 거의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울린다.
10초 정도 윙윙하다가 멈추는 경우도 잦기 때문에 2-30초 정도 기다려보고 안 멈추면 침착하게 모이는 장소로 이동한다.
이 날도 눈이 이렇게 억세게 오는 추운 날 밤이었다.
화재경보기가 꽤 오랜 시간 울렸고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 모두 계단을 이용해서 내려가 뒷언덕에 있는 주차장으로 모였다.
기숙사 warden들은 바삐 뛰어다니며 상황을 파악했고, 모두 모임 장소에서 별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민소매 운동복을 입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짐에서 또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운동하던 사람들은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서 이동했고 떨고 있으니 스태프가 이불이라며 걸치라고 건네줬다.
(놀랍게도 저 은박이 이불임...)
이렇게 바로 이불부터 챙겨 나온 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매뉴얼 대로 교육 잘 받고 똑바로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태프들이 무전기를 들고 바삐 움직이고 상황이 정리되는 동안 다들 이탈 않고 기다렸다.
신기한 이불을 덮고 있으며 추운데 성가시지만 재미있는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러고 나서 몇 시간 뒤 밀양 병원 참사 기사를 보았다.
나는 한국을 정말 정말 좋아한다. 어딜가도 한국 보다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대 주의 같은 것도 없고, 아마 보통 한국 사람들 보다 국뽕 치사량이 몇 배나 크고 찐할지도.
그래서 외국에 여행을 가거나 살아도 항상 한국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저런 가슴 아픈 뉴스를 타지에서 보면 더 속상하다.
스코틀랜드 와서 단 한 번도 이곳이 한국보다 선진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안전 의식은 스코틀랜드 완승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에도 부엌에도 계단에도 엘리베이터 근처에도 이런 안내문이 꼭 있다.
기숙사 입주 처음에 오리엔테이션 할 때도 가장 강조되었던 내용은 화재에 관한 것 이었다.
이런건 진짜 배웠으면 좋겠고 더 이상 가슴 아픈 안전사고 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ㅠ_ㅠ
마무리를 어떻게 하지.
음. 두유노.... ?
해외에서 적응하는것도 힘든데 날씨도 별로면 확실히 더 우울해지는 면이 있는거 같아요.
특히 근처에 한인분들도 별로 없고 재미있는일도 없으면 취미가 자동으로 요리/운동으로 옮겨지는거 같기도 하구요 (제 친구들만 그런가요;;).
저도 미국에서 살면서 공감되는것이 여러개 있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보팅&팔로우 하고 갈게요.
미국에서 거주하시는 군요! 반갑습니다 :) 다들 비슷한가보네요 한국이 놀 게 참 다양하고 많긴 하죠! 한국에 있을 때도 알았지만 와보니까 더 잘알겠어요 ㅠ_ㅠ 그래서인지 소소한데 즐거움을 느끼는 건 좋은 것 같아요. 보팅 & 팔로우 감사합니다!
거리는 한산하고, 특유의 높낮이 없고 고풍스런 억양이 좋더라구요. 또 가고 싶은 에든버러인데, 소식 감사합니다.
에든버러 여행 오셨었나보네요. 다들 여행오시거나 살던 분들이 지나고 나서 오래 생각나는 도시라고 하더라구요 ! 억양은 아직까지도 신기해요 가끔씩 좀 가원도 사투리 같이 들릴 때도 있구요 ㅎㅎ 블로그 통해서 에든버러 소식 자주 전할게요 :)
에딘버러에 계시는 군요 ㅎ 저는 리버풀 근처 사우스포트란 곳에 있었는데 친구들과 렌트한 차에 텐트와 코펠싣고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녔습니다. 호수옆에 텐트치고 자기도 햇엇죠. 팔로 합니다~
반가워요! 사우스포트는 처음 들어보네요 아직 영국을 많이 안다녀봤어요 ㅠ_ㅠ 코펠 들고 다니며 렌트카 여행에 텐트 숙박이라니 낭만 넘치네요 ㅎㅎ 맞팔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