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머물게 만드는 조직직 세뇌
투자를 진행하면서, 실제로 경험해나가면서 정말로 "개인 투자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의 차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헌데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에 머물게 만드는 "조직적인 세뇌와 촘촘하게 설계된 가난의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속에 머물게끔 구조적으로 설계를 해 놓았다면 과연 어떨것인가? 이게 단순한 음모론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이야기 해 보고 싶다. 우리는 어릴때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접했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어릴때 "흥부와 놀부"이야기를 들으면서 단순히 흥부는 착한 사람이고 놀부는 악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강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나는 이 "흥부와 놀부"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함에 머물게 만들기 위해서 설계된 고도의 장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우선 놀부가 부모의 유산을 차지한 것이 놀부만의 잘못인가? 재산이 분배되는 일을 부모가 살아있을때 확실히 안 해놓으니, 놀부가 차지한 것이 아닐까? 놀부만 나쁜 놈일까?
흥부는 자식이 스무 명이었다(나무위키기준) 농경사회인것을 감안하더라도, 자녀가 20명이라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 지금같은 시대에 재력이 받쳐주지 않는데, 자녀를 많이 낳아서 키울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로 아이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다.
사람이 무능한데 착하면 악한것이 아닐가? "어설프게 착하려면 차라리 못되 처먹은게 낫다"는 말은 왜 있을까? 어떤 면에서 흥부는 "착하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대단한 고집쟁이"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착하다고 고집이 없는게 아니다. 나는 착한데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사람을 경험해보았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고집이 상상을 초월한다.
놀부 아내는 쌀이라도 얻으려는 흥부를 주걱으로 싸다귀를 때렸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정말 들어야 할 말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괜히 관계가 불편해질 일을 만들 필요가 없고 또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그 사람에게 정말 유익이 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부 아내가 황소고집인 흥부 정신차리라고 후드려 때린것이라면, 흥부에게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흥부가 구렁이에게 공격당하는 제비를 구해주고, 그 제비가 박씨를 떨어뜨리고 박씨를 심었는데, 거대하게 자란 박을 타니, 온갖 곡물과 금은보화 등등이 나와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나는 이 대목을 생각할때 "부자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이성적 판단과 수고와 땀흘림을 가려버리는 공상적인 요소를 넣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사고"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닐까?
흥부의 행동을 놀부도 따라했다. 제비 다리를 강제로 부러뜨린후 다시 고쳐주었다. 방법이 올바르진 않지만,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흥부를 벤치마킹하는 실행력... 이러한 것은 놀부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나 우화, 그리고 동화 같은 것들도 어릴적부터 오랜시간에 걸쳐 계속 들으면 "사람의 사고나 정서...특히 부에 대한 관점이 왜곡된다"는 생각이다.
과연 놀부는 나쁜 사람이기만 했을까?
과연 흥부는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대책없이 애만 낳는게 맞는가?
박씨를 심은 후에 부자가 되었다? 현실에 일어날 리 없으니 되도 않는 이야기나 들으면서 자위나 하고 꿈이나 꾸고 살아라...는 식으로 들린다. 이러한 식의 세뇌와 이성적 사고의 마비가 얼마나 많은가?
워낙 어릴적에 저러한 이야기나 우화들을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 형성되기도 전에 접하니, 부에 대한 사고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 가난한 의식이 자리를 잡고 가난의 사고방식이 뿌리를 내린다.
"어쩌면 주식을 공부하고 암호화폐를 공부하고 투자나 금융을 공부하기 이전에 우리의 무의식에 뿌리박힌, 저러한 이야기들로 인해 형성된 부에 대한 왜곡된 사고관과 가난 의식을 벗겨내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게 아닌가?"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