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교회, 용서.
온누리교회가 이럴줄 알았다.
레토릭의 천박함인가, 아니면 인격의 천박함인가.
아니면 이 종교의 천박함인가.
믿고 거르는 사람들이 있다.
여검사 성추행하고, 그로 모자라, 좌천까지 시켜놓고.
사과한마디 없이, 교회에서 돈뿌리고 안수받고, 회개했다고.
그 회개하니 맘이 편해졌다느니 뭐니 하는 간증을 하고 다녔다.
다윗이 그랬으니 됐다고.?
다윗은 그 사건이후로 영적 고자가 됐다. 그 뒤로 골골 거리다 기도 몇번하고 그의 권위를 상실한다. 물러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쥐를 씻김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권력암투로 치닫는다. 아들들이 눈앞에서 살인을 해댄다. 이를 다윗은 슬퍼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벌려놓은 일의 대가이기에.
그래, 하나님이 용서하시니 되었는가? 그래 천국한번 가보시라. 그런데 천국은 이곳에서 당신이 누릴때에 의미가 있다. 자기가 강간한 것과, 자기가 강간한 여인의 아내를 죽이기에, 그는 사랑하는 아들들이 자신의 앞에서 서로 살육전을 치르는 것을 본다. 죄는 제대로 털고 넘어가지 않으면, 눈앞에서 지옥도를 언젠가 펼쳐지게 만든다.
안태근이 요놈도 지옥도를 경험하게 되리라, 검사의 손에 묻은 피가, 그것들을 부른다. 이렇게 뉴스에 나와서 증언당하고 개쪽 당하는것은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죄인은 3대까지 저주를 받는 다는 성서의 말을 빌리면, 너가 권력으로 성추행했다면, 이 권력의 남용의 대를 끊지 못한다면, 결국 니 딸이, 니 손녀가 똑같이 그 위험에 처할 것이란 거다. 애써봤자 대한민국 검사가 손녀까지 책임질 수 있겠냐, 그렇지 않더라도, 저 '더러운'자 라는 정체성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더 치열하게 사과하고, 대책을 만들고, 재발을 방지하기위해 애써야 한다. 신에게 당신의 아들 딸을 건드려 죄송하다는 회개와, 신의 자녀들이 또다른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회개하고 그들의 편에 서야한다. 이게 회개다.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정체성이 "날나리 사이비 기독교인에서" "진짜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녀"로 변하는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 오명을 씻기엔 부족했고, 시편51편에서 질질 짜고 난 후로도, 그뒤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까지 큰 공백을 갖는다. 신이 용서했다고 한들. 인간성 안에 한번 파고든 잘못은 정말 고통스럽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이다. 실로 인간은 관계적이다. 자신의 정체성은 관계안에서 정립되는데, 자신이 자신의 죄값을 늘 마주하는 고통을 느낄수록 자기의 영혼과 자기의 정체성의 관계를 잘 맺고 있는 것이며(정직), 이 정직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그 피해자의 용서와, 신의 또다른 용서와 부르심 안에서, 이 정직을 위한 근력을 얻어 갈 수 있다.
용서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뻔뻔한 바보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는 잘못한 자의 정체성을 감당할 정도로, 자신의 자아가 단단하지 못함을 반증한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존심이 세다.
그런데 또 한 일면, 용서를 받는 행위는, 자신의 자아가 정체성을 감당할수 있는 힘을 주는 사건이기에, 어쩌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일일 수 있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오해와 또다른 자기 중심성이 개입하는데, 나는 용서를 '구했다' 라는 사실만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드려는 욕심이다.
이는 절대로 '정직'한 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욕심'이고, '자폐'다. '죄'다.
정직은, 나앞에 정직하고, 이웃앞에 정직하고, 신 앞에 정직하는 것.
사람의 정체성은, 늘 흔들린다. 이를 자신의 힘만으로 세워나가는 자는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것이고, 그 흔들리는 정체성을, 타인들과의 관계안에서 확립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자존이 약한 것이 아니라. 1:1, 대등한 관계안에서의 민주적인 절차이며, 선량한 피해자가 당신의 괴로워하는 자아를 용서합니다. 당신의 '정직'함을 보고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가 되는 것이다.
신은 그의 정직을 보고, 그를 용서한다. 그 누구가 정직하겠냐만은, 정직하게 털어 놓을때에, 실제로 자신의 영혼과, 비슷한 경험이 있는 공동체가, 탄식하고 위로한다.
기독교안에서 '용서'가 값싼것이 되어버린것은, 영화 <밀양>에서도 그리듯이, 이 용서를 철저히, "피해자"를 배제하고, 자신의 "영혼의 정직"도 배제하고, 이를 오로지 "신과의 관계" 안에서만 용서를 논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위의 종교인 기독교안에서 용서함은, 신이 만들고 사랑한 이 땅을 회복시키기 위한 '명령'이다.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욕구 말고, 단지 신앞에서 샀을때 끊임없이 정직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의 계획안에서 무릎꿇고 용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런데 이를, 죄값 치르는 것을, 용서하고 받는 것을 단지 '신과의 관계' 아 신과의 관계는 1도 관심없이, 자신이 복받고, 자신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교회는 은연중에 가르친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병신같은용서가 이 세상에 판을 치게 된 데에는, 자기 중심적, 자기애적 인간들이 판을 치게 된 일련의 사회적 상황들도 존재하게되었지만, 하나님 나라, 이땅에서의 하나님 지금 여기에 함께 울며 고통받는 그러나 회복시킬 하나님 나라는 무시하고, 좋은게 좋은 것이지 하며, 천국과 지옥, 찐따같은 예수, 사회에는 관심이 1도 없이, 예수의 사랑만을 외쳤던, 보수적이지만 수구적인 대형교회의 영향이 매우크다 고 생각한다.
저 안태근이란 놈이, 그 중 하나인 온누리 교회에서 저 짓을 할 수 있는 것이 놀랍지 않다.
이를 실드하기 바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적어도 그런 신학을
재정립하지 못한채, <예배와 예배자>만을 신성시하고, 이미 망조가 가득한 기독교에서 사람들이 실망해 떠나는 것을, <동성애>니 <이슬람> 때문이니 이야기하고 있다. 근래의 마커스도 너무나 실망스러웠다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다가. <예배자>를 강조하는 가사가 나왔을때 나는 어라 이거 위험한데. 싶었더니 역싀, 예배만 드리면 세습이건 뭐건 상관없는 정신승리였다.
이들은 '정직'하지 않다. 스스로에게도, 타자에게도 '신'에게도, 아아 우리는 죄인이다. 나를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스스로를 한동 갓즈 유니버스티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아했던 한동대학교.
스토리가 있어서일견 이해가 가지만, 너무하다 싶었다. 그래서, 갓즈 유니버시티라서 우리가 뭐하는데.?.. 창조과학 수업은 충격과 공포였다.
그래, 차라리 정직을 가르친 부분은 좋긴했다. 인정. 그렇게 한동대에 다니던 2010년도, 분명 괜찮은 훌륭한 교수님과 학생들도 존재했지만, 어느지점에선 기독교가 기독교 놀이로 전락해 있었다. 기독교 놀이를 하던 그들의 출신은 거진 자랑의 교회와, 존망교회, 그리고 온누리교회였다. 나는 일단 믿고 이들을 거른다.
그런데...
교회에 새로오신 청년부 전도사님이 <온누리교회>출신이다. 내가 예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이 사건이 더 직접적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인지 모르곘다. 부디. 부디.. 괜찮은 분이시길 바라는데, 그분이 예배를 강조할때, 위로를 강조할때 나는, 많이 두렵다. 과연 무엇을 위한 예배인지, 자신만을 위한 예배라는 단어가 아니길. 부디... 온누리 스러운 레토릭이 단지 레토릭 뿐이길.
기독교에 당한게 너무 많나보다. 괜히 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