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부천 IC 회군 - <서울의 봄> 보기 전에 필독
역사를 바꾼 부천 IC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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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이 엄청난 화제다. 웰 메이드 정도를 넘어 인생작이라는 평가도 여러 개 보이고, 압도적이라든가 숨도 못쉬고 보았다던가 하는 감상들이 즐비하다. 결국 내가 판 우물이라고 12.12와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로 이어지는 뼈아픈 현대사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나의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호평의 홍수에 허우적거리다가 아내에게 주말에 꼭 보자고 제의를 해 놓았다. 영화를 기대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교차하다보니 전에도 떠올린 사건 하나를 복기하고 싶어졌다. 부천IC 회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군(回軍)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일 것이다. 5백년 묵은 왕조는 이 회군으로 결정적으로 허물어졌고 새 왕조의 문이 열렸다. 가히 순간의 선택(꼭 순간은 아니었겠으나)이 수백년을 결정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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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회군으로는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 있겠다. 서울의 봄,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서울역 앞 광장을 가득 채운 대학생 대군은 “군의 개입 명분”을 우려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 등의 주장으로 해산을 결의한다. 서울역 회군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학생 시위가 군의 개입 명분을 준 게 아니라 ‘회군’이 전두환의 청와대행의 오프닝 세레모니가 돼 버렸지만.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회군, 역사를 바꿀 뻔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좌절했던 회군도 있다. 1979년 12월 12일 밤 9공수여단의 부천IC ‘회군’이 그 한 예다.
9공수 여단 휘장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 사조직 하나회 출신의 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을 견제하는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제거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12월 12일 저녁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합동수사본부 (박정희 암살 사건의 수사본부) 요원들이 연행하면서 반란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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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의 신병은 확보했지만 반란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건 아니었다. 보안사령부 이하 국군의 정보망은 반란군측이 장악했고 국가와 상관보다 하나회 조직에 충성하는 장교들이 한통속으로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육군본부의 지휘체계도 살아 있었고, 반란군측의 삽질도 없지 않았다. 일례로 정승화 납치는 성공했지만 공관 경비를 맡았던 해병대가 반격에 나서면서 상황은 어지러워진다. 반란군이 된 33헌병단의 일원으로 상관의 명령에 따라 총장 공관 초소를 점거한 박윤관 일병이 해병대의 반격에 목숨을 잃었고, 납치조에 따라붙은 반란군측 지원 병력은 총장 공관에서 공관 경비병력에 포위된 채 버스 안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그날 밤을 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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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과 총장 납치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란군과 국군 지휘부 양측의 대응이 빨라졌다.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병력을 동원하고 육군본부측도 이에 대응하는 가운데 반란군측은 최악의 수를 감행한다. 현직 사단장으로 반란에 가담해 있던 노태우가 전방을 지키는 자신의 9사단 병력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력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 적어도 9사단 예하 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린 순간 노태우 소장의 이름은 권력 쟁취를 위해 휴전선의 군대를 뺀 최악의 졸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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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중
육군본부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휘하 경비단장들이 (장세동이 수경사 경비단장 중 하나였다) 전두환측에 붙어 버린 수경사령관 장태완이었지만 그는 휘하 기갑부대를 동원해서라도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노호를 터뜨렸고 역시 휘하 공수여단장들이 전두환에게 붙은 가운데 특전사령부에서 홀로 저항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전두환측에 가담하지 않은 갑종출신 (하나회는 육사 출신만 가능했다) 여단장 윤흥기가 지휘하는 공수 9여단에 출동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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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단은 인천 부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2.12 반란 당시 치명적 결정을 내린 노태우도 9여단장을 지낸 바 있고, 휘파람 잘 불기로 유명했던 그는 9여단가를 작사 작곡한 장본이이었다. 이 9여단은 경인고속국도를 타면 1시간 이내에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육본의 명령에 따라 출동을 개시한다 . 12.12를 진압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출동한 유일한 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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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단도 제대로 된 출동을 한 건 아니었다. 1개 대대는 지방에서 훈련 중이었고, 출동 가능한 건 1개 대대였는데 그나마 차량이 부족했다. 여단장 윤흥기는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 교통체증이 없을 때 출동할 생각이었지만 육본의 명령은 다급했다. 마침내 여단장 윤흥기 이하 대대병력이 서울로 출동한다. 어떤 심경들이었을까. 일반 병들과 하사관들이야 내막을 몰랐을 것이고, 그저 서울에 공비라도 침투했나 싶었을 것이다. 트럭 안에서 그들은 노태우가 작사 작곡한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며 전의를 다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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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기 장군이 여단장이 될 때 견장을 달아 준 사람은 전임 여단장 노태우와 특전사령관 정병주였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9여단의 출동 소식이 전해지자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반란에 가담한 공수여단장들은 부대장악을 위해 복귀 중이었고, 9사단은 아직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여단이 서울 시내 진입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반란군들은 일망타진될 수도 있었다. 9여단 출동 소식에 전임 9여단장 노태우가 자살을 뇌리에 떠올렸다고 회고할 정도니 그 ‘충격과 공포’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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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단을 막아라! 방해 공작이 총동원됐다.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은 육본측에 신사협정(?)을 제안한다. “우리도 더 이상 무력 동원 안할 테니 9여단을 철수시키라. 국군끼리 피를 볼 수는 없지 않겠나.” 마치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면 물러가겠다고 설레발 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반란군들은 온갖 인맥을 동원해 9여단을 회유하려 들었다. 9여단 참모장 신수호 대령은 엄청난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갑종 출신으로 반란군과는 거리가 있었던 신 대령은 차량 지원이 오는 대로 여단장 부대에 합류할 요량이었다. 그런나 여기서 윤성민 참모차장의 전화가 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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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육군참모차장이다. 9여단을 복귀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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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체면도 있으니 형식적으로 오사카 성의 해자만 메우면 철군하겠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을 믿고 제 손으로 해자를 메워 버린 순진하고 멍청한 도요도미 히데요리처럼 육본의 장군들도 반란군측의 신사협정(?)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총장을 납치하고 아군에게 총질한 놈들이 “서울 시내에서 국군끼리 피를 볼 수는 없지 않냐.”고 말하는 자체가 우습긴 하지만, 지휘할 실제 병력이 없는 상태에서 “국군끼리 피 보지 말자.”는 얘기는 꽤 그럴 듯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바라는 바대로 믿는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지만. 당연히 반란군들은 신사가 아니었다. 윤성민의 명령 이후에도 반란군측 1공수여단은 진격을 계속했고 노태우 소장은 최악의 벙크를 지속하여 그 직할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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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 전개된 전방 사단 병력과 장비
거기다가 공수특전사령부를 담당하던 보안사령부 요원들도 발바닥에 불이 나게 움직였다. 그들은 9여단에 가짜 전통문을 보낸다. “9여단 복귀하라.!” 참모장 신수호 대령에게는 보안사에 근무하는 갑종 동기의 전화가 걸려왔다. 구구한 설득 끝에 신수호 대령이 남긴 한 마디. “이미 여단장에게 복귀 명령을 전했다.” 이것으로 전세는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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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단이 서울에 진입해 수경사령부에 모인 진압군의 무력이 됐더라면, 기세를 몰아 경복궁의 전두환 이하 반란군들을 체포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9여단은 가장 빨리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고 반란군의 입김이 들어먹지 않는 부대였으니만큼, 그들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키운 부대에게 체포당할 위기에 놓인 전임 여단장은 경복궁 어딘가에서 이마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르고, 전두환은 대머리 죄수로 수인 번호를 피로 물들이며 총살당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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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이었던가 부천 IC를 지나면서 여기서 12.12 때 9여단이 회군을 했겠구나 하는 무심한 생각이 들었었는데 12.12 얘기가 나온 김에 그날의 회군이 아쉽게 떠올라서 되돌아봤다. 다시금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가정법을 불사하는 건, 그만큼 역사가 남기는 아쉬움이 크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부천IC회군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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