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심리학 개론

in #life7 years ago

“신경과학이 뇌 영상을 통해 칸트의 신, 자유, 영혼의 불사 같은 정신적 개념들을 가공해내는 신체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인 지금, 무엇 때문에 그런 환각들과 씨름하는가.”
-톰 울프

“제가 문제 삼은 건 철학이 아니라 거만입니다. 철학자들이 ‘내 생각에 이것은 이렇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것이 저렇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역시 훌륭한 생각을 했다.’ 고 말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들은 궁극의 근본입자가 없을 가능성에 매달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따위 연구는 그만두고 심오한 사고를 하라. 너는 충분히 심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내가 너를 위해 세계를 정의해 주겠다.’ 글쎄요. 저는 정의하지 않고 세계를 탐구합니다!”
-리처드 파인만


1. 햄릿의 진화론: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

현생 인류의 사회적 행동을 규정하는 유전 암호가 ‘키메라’가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집단 내 개인의 성공을 선호하는 형질들과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자기 집단의 성공을 선호하는 형질들을 규정하는 유전 암호가 동시에 복합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영토 침략을 비롯한 집단 사이의 경쟁이 벌어지는 것, 이주, 정복 등에 따른 집단 크기의 이점이 집단 내 침해 행위와 분열을 통한 신생 집단 형성의 이득과 충돌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집단이 조성되는 것, 명예, 의무, 미덕과 같은 집단 선택의 산물들과 이기심, 소심함, 위선 등 개체 선택의 산물들 사이의 영속적인 전쟁...우리 본성에는 최악의 것과 최선의 것이 공존한다. 그러나 최악의 것을 빡빡 닦아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냉엄한 법칙이 있다. 이기적 개인은 이타적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승리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 개체 선택만이 지배된다면 사회는 해체될 것이며 집단 선택만이 지배한다면 인류 집단은 개미 군체와 비슷해질 것이다. 이렇게 서로서로 상쇄하고 견제하는 이 두 힘들은 불가피하게 인간 개인의 마음에 ‘영구적인 모호함’을 빚어낸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유대를 맺고 사랑하고 사귀고 배신하고 공유하고 희생하고 훔치고 기만하고 보복하고 처벌하고 애원하고 심판하는 방식에 관한 무수한 시나리오를 낳는다. 각자의 뇌에 고유하게 새겨진 이 갈등은 인문학의 수원(水源)이다. 가장 재미있는 생물학의 ‘문화 지능 가설(cultural intelligence hypothesis)’에서 연구한 <인간의 작업기억에서 나오는 지향성(intentionality)에서 기인하는 ‘마음 읽기’ 능력>을 설명하려면 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기에 다음기회에.
본능의 명령을 통해 얼마 없는 감정들을 펼쳐내는 개미 세계의 셰익스피어는 승리의 희곡과 멸망의 비극 한 편밖에 쓸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끝없이 창작할 수 있다.
이 개인과 집단 사이의 다수준 선택이 일으키는 영구적인 불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역할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자연 과학의 역할이며 설명이 송공적이라면 자연 과학이 나서서 이 세 거대한 학문 분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근접원인(인간의 느낌과 생각이 외부로 표현된 현상)에 몰두한다. 즉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상자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감각과 생각은 인간 본성에 지배되고, 인간 본성도 하나의 상자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즉 근접원인이라는 상자 내에서 벗어나 궁극원인을 탐구하고, 그 둘을 결합시켜야 인류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궁극원인을 어떻게 탐구하냐고? 당연히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이다. (물론 인류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논의도 다음에.)

2. 빈 서판: 포스트모던의 오류

생물학적으로 성은 X염색체를 2개 가지는지, X와 Y 염색체를 지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젠더에 관한 이야기로 빠지면 ‘성’이라는 단어는 얼버무려진다. 왜? 바로 성이 염색체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젠더를 고집하는 것에는 ‘어떤 무언가가 우리를 결정해서는 안되며’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빈 서판> 논리가 깔려있다. 그렇기에 젠더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낸다. 남성성을 띠는지 여성성을 띠는지 제 3의 성을 띠는지 말이다. 이는 훨씬 더 주관적이며, 생물학적 성이 고정되어 할지라도 사람들이 문화를 바꾸듯이 젠더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포스트모던과 분석철학은 최근 수십년간 학술전쟁을 펼쳐왔는데,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경우 일부 개념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수 있고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한 점에서는 옳았지만, ‘모든 개념이 그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틀렸다. 그렇지 않은 개념들도 무수히 많으며 우리가 살펴봤듯이, 우리의 공통된 체화물-유전자/환경 공진화-의 전형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의 문화들에서 반복하여 출현한다. 포스트모던은 통속적인 ‘본질론’이 들어맞지 않는 영역이 많다고 간파한 점에서는 옳았으나, 이것이 우리 개념 체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저질렀던 것이다.

3. 예술로 보는 본성 대 양육 논쟁

중요한 능력일수록 이른 시기에 그에 대한 뇌 발달을 완성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인간의 아이들은 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언어의 논리를 ‘획득’해 대부분의 구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뇌가 활발하게 성장하는 시기에 게놈이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문화 획득 장치’를 온라인 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일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음악도 타고났다. 어린아이들은 음악이 주는 환희를 즉각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분석수학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가? 물론 느낄 수는 있지만, 이는 훨씬 더 뒤에, 훨씬 더 느리게 찾아온다. 음악은 초기 인류에게 사회를 통합하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수단이었지만 수학은 그런 적이 없다.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만이 본능적인 사랑을 위한 기본 욕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흔히들 설명하는 음악이 느낌과 감정을 일으키는데 있어 언어보다 더 좋은 도구인 이유는, 언어는 어떤 필터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반면 음악과 시각 예술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한다는 이야기와 이어진다.
즉 다음의 논리가 성립한다.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마음 차원에서’ 매우 즐겁고 강력하게 감정적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우리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면, 그 감정 상태는 그것이 어떤 면에서 분명 생물학적 생존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즉, 우리가 생존에 필수적인 일들을 하게끔 자연이 보장해 준 방식들 중 하나가 바로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술과 아름다움 역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어떤 것을 특별화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인상적이고, 심금을 울리고, 만족을 주는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좋은 예술을 정신적 노력과 물질적 노력이 합쳐진 것으로 정의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의미 있거나 타당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인상적이고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는 데에는 문화적으로 획득한 것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단지 변덕스러운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가 짝을 고를 때 선택하는 형질 중 상당수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고른 것이나 무작위적인 것이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번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강력한 지표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건강과 번식력의 지표다. 친절, 따스함, 창의성, 지능, 상상력 등 심리적 매력을 풍기는 많은 형질들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는 물론 사회적 세계에서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능력의 지표이다. (사람들이 짝을 고를 때 남녀 관계없이 꼽은 가장 중요한 특성 부동의 1위가 ‘친절함, 착함’ 인 이유기도 하다) 이런 심리적 특징을 토대로 짝을 고름으로써 건설적인 관계를 맺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평균보다 더 나은 유전자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상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비록 ‘예술’이란 개념은 상업적인 사회에서 태어났고 그 사회에 의해 유지되었기에 2백년밖에 안되었으며, 그렇기에 상대적이고 폐기될 수 있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 예술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사랑, 죽음, 기억, 고통, 힘, 두려움, 상실, 욕망, 희망과 같은 인간 조건의 진리들과 더불어 미, 숭고, 초월의 개념들도 항상 그렇게 존재해왔다. 이 개념들은 인류 역사의 전 기간동안 예술의 주제이고 근거였다. 현대 이론이 예술은 우연적이고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해도, 우리는 인간의 영속적 관심사들 그리고 그 관심사들에 수반하고 그것들을 구현해온 ‘예술 자체’가 우연적이고 의존적이라고 가정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분 좋게 느껴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다. 어떤 특별한 자극이 없으면 인간은 생존에 꼭 필요한(유리한) 생물학적 활동을 하고, 그런 환경을 찾는 것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긍정적 힘을 얻는다(먹기, 휴식하기, 친숙하고 안전한 곳에 머물기, 섹스와 출산과 친구 사귀기, 노래, 춤, 시적 언어, 음악, 신체 장식, 개인적/공적 인공물 꾸미기 등...) 물론 새로운 물건과 경험을 끊임없이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이런 오래된 만족들이 덜 명확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도 이것들을 쉽게 완전히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 오해: 자연선택과 성선택

진화론, 그 중에서도 자연선택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성선택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다. 만약 인류가 수만년간 진화해왔다면, 정말 중요한 인간의 본성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형질임이 분명하다. 분명 ‘생존을 위한 적응’은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이다. 그러나 구애에서 건강, 지능, 적응도의 개인차를 과시하기 위해 진화한 성 선택된 요소들은 이 생각에서 배제된다. 성선택은 짝 고르기에서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개체들간의 형질 차이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미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예술을 진화상의 적응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불성설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피카소와 같은 미술적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면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짝 고르기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능, 언어능력, 도덕성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역시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가 무조건 유용하며, 어떠한 이익을 ‘가지기 때문에 진화한다’ 라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역사라는 특수한 우연 때문이다. 언어와 창의성처럼 인류가 우연히 진화시킨 특성들은 농업, 건축, 글, 금속세공, 의학, 아이폰 등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생존이익’들을 선사했다. 이런 발명품들의 유용성은 인간의 마음이 어떤 일반적인 생존이익을 위한 것인 양 믿게 만들었다. 즉 이런 특수한 경우들로부터 마음이 포괄적인 생물학적 이익을 준다고 추론해 버린 것이다. 진화는 비록 지금 에너지가 많이 드는 큰 뇌로 인간을 진화시키면 수만년 후에 문명을 발달시켜 보상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의 지능, 상상, 공감, 예견 능력은 문화와는 상관없이 점진적이고 냉혹한 진화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이는 문화의 형성 요인이었지, 문화의 산물은 아니었다. 인간은 말을 하거나 도구를 만들기 전부터 놀이, 음모, 계획에는 지금과 거의 똑같이 능숙할 것이다. 이는 나중에 ‘고삐 풀린 뇌 이론‘ 이나 데닛의 <자판기> 논증에서 자세히 논해보자. (결론을 스포하자면, 자연도 ‘선택’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아니, 선택하는 것이다)

5. 진화심리학의 감정

의식은 희귀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얻어낼 방법을 고안하는데 필요한 신경계 연산의 표현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굶주림을 느끼고, 음식을 즐기고, 수많은 맛을 분별하는 것은 진화의 역사가 진행되는 대부분의 기간에 음식을 얻기가 그토록 힘들었기 때문이다. 산소가 생존에 필수적이라 해도 평상시 산소에 대한 갈망이나 기쁨이나 매혹을 느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과 친구에 대한 감정도 이와 같다. 우리 마음속에 풍부하고 강렬한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삶 속에서 그들과의 결속이 얼마나 귀중하고 깨지기 쉬운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만약 그렇게 강렬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가족과 친구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고통의 가능성이 없어진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조화롭고 완벽한 행복이 아니라 의식의 결핍인 것이다.

6. 원시 ‘인간 본성’의 존재론(스포일러 주의: 그런건 없다!)

본성과 환경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인성의 비유전적 부분은 우연적인 신경 발달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행동 유전학의 방정식에서 ‘유전’에 해당하는 변은 반드시 유전이 아니며, ‘환경’은 반드시 환경적이지 않다. 가소적인 뇌 조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들은 이는 부모와 사회의 통제를 벗어나 생물학적으로 성격과 정신을 결정한다. 이것은 현대 생물학에서의 ‘운명’이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미래 말이다.
모든 문화가 평등하다는 포스트모던에서의 주장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는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지만 인간 본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마가렛 미드는 젊은 여자들이 성적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찾기 위해 미드는 남태평양에서 인간 본성의 ‘원시성’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애초에 원시적인 인간 본성이란 없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문화의 발생은 사회적 활동이다. 고립된 인간의 마음은 문화를 분비하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은 언어를 학습하고, 신념을 공유하고, 의식을 거행하고, 집단적 경험을 공유한다. 마음은 둘 이상의 개인이 있어야지만 형성된다. 우리가 서로(와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화)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는 깃털이 새를 위한 것이고 털이 동물을 위한 것인 것처럼 인간을 위한 적응적 기제이다. 같은 종의 동물조차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적응하기 위해 매우 다채로운 관계의 양상을 보여 준다. 워싱턴 주에서는 질이 좋은 늪지를 점유한 긴부리굴뚝새 수컷 한 마리가 여러 암컷들과 짝을 짓고 나머지 수컷들은 혼자 지내지만, 조지아 주에서는 일부일처제의 양식을 보여준다. 이는 조지아 주가 신앙이 두터워서가 아니라 모든 습지의 질이 유사해서 각 수컷들이 똑같이 암컷들을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외적 조건만으로 볼 때 인간 사회는 일부일처제인데,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기술 사회에서 편리한 합의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일부일처적 성향을 타고 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부일처제를 따르기를 ‘원하는가’ 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이러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자녀양육의 고생이 클수록 한 성이 다른 성에 일을 떠넘기려는 동기가 강화되고, 양육의 책임을 버리는 데 따른 이득도 커진다. 그러나 부모가 모두 이 전략을 택하면 아이는 죽고, 게으른 부모의 유전자도 함께 죽는다. 그래서 각각의 종은 나름대로 남녀 분업 체제를 진화시켰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생물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균형을 향해 진화한다는 것이다. 180만년 전 쯤 호모 에렉투스가 배우자결합으로 진화하면서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채집하는 특유의 성별 분업을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자결합은 인간 버전의 사랑-낭만적 사랑과 애정을 진화시켰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식을 위해 적어도 세 가지의 주요한 신경계 진화를 거쳤다. 1.성적 충동: 한정된 수의 파트너들과 성적인 합일을 추구하도록 진화. 2.낭만적 사랑: 자신이 더 좋아하는 파트너에게 구애 에너지를 집중하도록 만들어 짝짓기 시간과 정력을 절약하도록 진화. 3.애정: 남녀가 함께 유아기에 아이를 양육하도록 진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개인의 성 경쟁 본능으로부터 최대한의 사회적 이익을 이끌어내는 사회제도를 구상하는 것이다. 게임이론에서 자주 쓰이는 말대로, ‘우리는 짝짓기 게임의 경기자들이 이기적인 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종류의 짝짓기 게임을 할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과시적 자선도 과시적 소비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리 사회에서 어느 쪽을 더 높이 사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유전자와 본능을 깊이 이해할수록 그 필연성은 더욱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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