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 100주년. 100년을 얼마나 헛되게 보냈는지 한탄한다.
3.1 독립선언에 대한 끔찍한 주장이 있습니다.
3.1 독립 선언은 기생집에서 한량들이 모여서 흥청망청 놀다가 한 객기이므로 무시하라는 매우 황당한 주장이죠.
사실 3.1독립선언을 한 장소는 태화관이라고 하는 기생집이 맞긴 맞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유명한 민족대표 33인 사진은 태화관이 아닌 전날 만해 한용운의 집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민족대표 33인. 출처 구글 이미지>
태화관은 원래 이완용의 별장이었으나 이사를 떠난 후, 당대 최고의 요리집이던 명월관이 분점하면서 생긴 집입니다. 자꾸 "기생집"이라는 명칭만을 강조하는데 명월관은 원래 궁중요리사이던 "안순환"이 1903년 강제 한일병합으로 인한 왕조의 몰락 이후 나와서 개업한 요리집이었고 당시 각계에서 인정받는 분들의 사교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부자나 정치인,군인,문인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교류하던 곳이었죠. 물론, 몸을 파는 창기도 있었지만 노래와 춤을 선보이거나 연주를 하는등 기예인들도 많았습니다.
드라마와 만화로 유명한 식객에서 '대령숙수(왕의명을 기다리는 요리사)' 라는 관직(최고위 숙수는 정3품)으로 소개된 바로 그사람의 스승인셈이죠. 그리고 그 직함의 이름답게 숙수의 요리는 왕족과 기미상궁정도 외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습니다. 그런 현재로 치면 미셰린5스타에 +를 좀 붙여야할 요리가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니 세간의 관심도 대단하고 영업매출도 굉장한 곳이었겠죠.
<태화관 정문. 출처 오마이뉴스-설민석인터뷰>
3.1운동은 대중에 의한 운동이며 33인의 민족대표라는 자들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고 후일 그 33인중의 일부가 변절하여 친일로 돌아선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 누구도 태화관(명월관)의 희생을 이야기 하지 않는 점은 아쉽습니다. 명월관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이후 탄압 받았고 그해 5월 일제의 소행이라고 추정되는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당시 태화관은 앞서 말했듣이 굉장한 업소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던 천대 받던 상인, 그리고 기생들이 독립선언을 위해 큰 희생을 한 것입니다. (나라에 우환이 있을때 이부진씨와 그 임직원이 모두 신라호텔을 포기할수 있을까요? 태화관은 자의건 타의건 그런 희생을 한겁니다)
요즘에는 그런 업소들이 많지 않지만 오래된 화류계 업소들은 그래서 3.1절에는 반드시 영업을 쉬었습니다.
이번 촛불집회때도 정작 정치인 지식인들은 매우 소극적이다가 많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보고 나서야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3월에도 아마도 그랬으리라 봅니다. 이 33인중에 당시에 옥고를 치룬 사람은 없지만 대중들은 일제의 총칼에 많은 희생을 당했고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유관순 열사는 형용 할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습니다. 반면 이 33인의 민족대표라는 분중 상당수는 변절하여 친일활동을 하기도 했죠.
저는 솔직히 33인의 대표라는 인사들보다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맨몸으로 일제의 총칼과 탄압을 받아내며 태극기를 흔들던 수많은 민초들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광장에서는
<민중의소리 3.1절 집회 관련기사중>
버젖이 일장기가 등장하는 현수막을 들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주장하는가 하면,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사람들까지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인이 7.4일 인디펜던스데이에 영국의 국기 유니언잭을 흔드는 것 같은 일이죠. 어쩌면 일제시대와 6.25 전쟁 통에 진짜 보수 세력들은 전부 돌아가시고 기회주의자들만 살아남았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일이 어떻게 생기죠?
첫 보팅 드렸습니다. 첫 사진을 보고 인증샷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