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 엔딩 노트(Ending Note), 2011 >

in #kr6 years ago

<본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음 그 아득한 슬픔에 관하여"

영화 '엔딩노트'는 암에 걸린 한 인물이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제작을 맡아
꽤 유명해진 영화로 내용뿐 아니라
연출에서도 강점이 돋보인다.

전체 스토리 상 마지막 장면인
장례식부터 영화가 시작되는 구성,
중간중간 삽입된 과거 영상과,
일본 도심의 풍경들은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또 담담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스나다 도모아키'씨의
과거와 손녀들이 의미하는
새로운 '삶' 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 역시 이 영화의 연출 포인트다.


엔딩노트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다. 이 작품의 나레이션으로 등장하는
그의 딸 '스나다 마미'씨는
아버지의 엔딩노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버지가 생전에 작성한 엔딩노트를
딸이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하며
이야기의 전개가 이루어진다.

엔딩노트라는 소재는 매우 독특한 소재다.
우리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기로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버킷리스트에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로
젊었을 때 꼭 보고 싶은 일들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나다 씨의 엔딩 노트는
버킷리스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노트에는 삶을 마무리하는
지금 현재 해야할 일이 적혀있다.

노트에는 손녀들과 놀기, 장례식에 올 친구 명단
만들기 등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적혀있다.
버킷리스트에 비해 매우 사소해 보이기도 하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버킷리스트가
아직 남아 있는'삶'을 전제로 작성된 것인 반면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는 '죽음'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거창하지 않고 소박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일까.


죽음과 삶이 드러내는 것

누군가는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것을
까먹고 산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라고 말한 적 있다. 이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는 평소 여러 종류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게 되지만, 그 죽음에서 직접적인
감흥은 별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결국 죽음의 대상을 '제3자'화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에 대해
공감을 한다는 것도 때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스나다 씨는 죽음에
초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농담을 하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자신의 장례식에는 자신이 메인 게스트라는 말과
생전 자신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뒤에 숨겨진 많은 고민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는 성당에 찾아가 자신이 신을 믿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잠시 위안을 얻기 위해 왔기 때문에 좀 미안한 점이 있다고
신부님께 고백한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남겨진 자들을 걱정하고,
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는
그를 보며 그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 없이, 떠나는 순간까지 남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에게서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이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과연 스나다 씨처럼
세상을 떠날 준비를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가는 것 보면
스나다 씨는 나보다 성인(聖人)임에
틀림없다.

스나다 씨와 그의 '암'이 죽음의 메타포였다면
영화에서는 생명의 메타포가 등장한다.
바로 새로 태어난 스나다 씨의 손녀다.

스나다 씨의 장남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스나다 씨의 병세가 점점 심각해질 무렵
새로운 손녀가 출생했다.

새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손녀들의 모습과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스나다 씨의 대조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형이상학적 현상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
성스럽고 고귀한 것이듯
인간의 생명이 멀어져 가는 과정 역시
성스럽고 고귀하다.

스나다 씨와 손녀들로 대표되는
생명과 죽음의 만남은 비극적이거나
어둡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행복한 나날들을 보여주며
그것들이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영화 속 BGM들이 어둡지 않고
밝은 음악들이 많다는 점도
이를 더욱 드러내고 있다.


일상과 기록하기

영화 속 스나다 씨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세일즈맨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다.

이렇듯 그의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평범한 일상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고,
누군가의 아들,딸,엄마,아빠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들이 모여
우리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처럼
스나다 씨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역시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해 온 아내에게
사랑했다고 고백하기,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기,
손녀들과 많은 시간 보내기,

그의 엔딩노트는
우리에게 '일상노트'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단지 이를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다.
평소 카메라를 가지고 자신의 영상을
남겨주던 그의 딸과,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남겨진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노트와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것,
내 흔적들을 어딘가에 남긴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죽음 그 아득한 슬픔에 관하여

결국 스나다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

세상에는 그를 기억할 많은 사람들이
남았고, 그를 떠나보낸 슬픔 역시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스나다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엔딩노트는 영원히 필름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映畵)라는 존재 속에서
그의 영혼은 영화(靈畵)로
계속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그 아득한 슬픔을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노트를 잘 써내려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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