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꿈의 해석 - 5

in #kr6 years ago


[중편소설] 꿈의 해석 - 5

우리 동네에는 유적지라 불릴 만큼 낡은 가게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내 방 창으로 보이는 거리 건너편에 정면으로 늘어선 태양이발관과 행복상회, 그리고 비둘기 식당은 가장 대표적인 가게들이라 할 수 있다. 여자의 집과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한 구역 떨어져 있다. 태양이발관은 내가 다락방에 기거하기 전에 가장 자주 애용하던 곳으로, 마치 박물관을 방불케 할 만큼 오래된 물건들 천지다. 40년이 넘은 고철 가위와, 130년 된 스페인산 칼, 흰 석고 같은 것들로 얼룩진 푸른색의 물뿌리개, 낡은 세면대, 도저히 작동이 안 될 것만 같은 철제 난로 등은 태양이발관의 세월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물건들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미용실에서 머리 다듬는 것을 매우 수줍어했다. 미용실 가는 것이 수줍었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하면 친구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를 늘어놓느냐는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것에 대해 수줍음을 느낀다. 미용실 가는 것과 옷을 사러 가는 것, 병원에서 간호사 앞에 엉덩이를 내미는 것, 이런 것들이 나에겐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내 또래들이 이용하지 않고 사람이 별로 없는 우리 동네의 낡은 가게들을 많이 이용했다. 무엇보다 머리를 다듬는 일은 머리가 길 때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태양이발관 이발사가 추구하는 스타일대로 내 머리 모양은 결정되었다.

그래서 내 머리스타일은 언제나 앞머리만 길게 놓아두고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추어올리는, 이른바 상고머리다. 사실 나는 그 상고머리가 마음에 들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발사가 ‘자 다 깎았습니다.’ 하고 나서 낡은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면 내가 내 모습을 보고 입가에 조소를 머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거울을 통해서 비치는 이발사의 자라가 수조 속에서 고개를 내밀 때면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지저분한 머리를 정리할 때면 태양이발관을 고집했다. 머리스타일 보다는 좀 더 마음 편하게 머리를 다듬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유행이나 보기 좋은 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연예인들은 아무리 바보 같은 머리를 하고 아기들한테나 크기가 맞을 축소형 니트 조끼와 더불어 민망한 스키니 진을 입고 나오더라도 팬들은 멋있다고 따라 하기 마련일 테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실제로 연예인 스스로 패션을 선도하는 주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테고, 언젠가 내게도 팬이 생긴다면 태양이발관의 상고머리가 유행을 선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식판을 씻기 위해 다락방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 뭉치와 수염의 길이를 확인하고자 몇 달 동안 보지 않았던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 아저씨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이건 그야말로 크로마뇽인에 가까웠다.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머리를 깎은 뒤로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으니 2년 반이 조금 넘었다. 게다가 그동안 제대로 목욕한 번 하질 않아서 그런지 얼굴주변이 거무스름하고 상체에 걸친 흰 러닝셔츠가 누렇게 변해있다. 문뜩, 어젯밤에 앞집 여자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던 게 내 꼴이 말이 아니게 우스워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졌다.

그럼, 그동안 여자는 도로 건너편 정면의 붉은 벽돌집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 마리의 유인원을 보고 웃었던 것일까.

나는 당장 내 머리를 답답하게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들과 지저분한 수염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에겐 조금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태양이발관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내게는 거대한 물살이 흐르는 강과도 같은 도로를 건너야 한다는 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창틈에 팔을 괴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앞집 여자에게 유인원으로 인식되는 삶의 굴욕보다는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한 번 감수하는 편이 낳겠다는 나는 결론이 섰다.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5년 만에, 아니, 더 세부적으로는 2년 반만의 외출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쓸모없는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나름대로 계획을 적어 보았다. 최대한 사람들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집과 이발관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너가는 게 주된 목표였다.


1. 이불로 얼굴과 몸을 가린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나를 경멸하듯 비웃을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2. 1층 TV 선반에 있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어 호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이발 값은 만 원을 넘지 않는다.)

3. 집을 나서면 대문 앞 담벼락에 숨어 거리의 상황을 주시한다.

4. 거리에 사람들이 최대한 줄어든 틈을 타 재빨리 도로를 가로지른다.


아무리 치밀하게 머리를 굴려보아도 계획은 4가지를 넘지 못했기에 나는 그냥 4단계 계획에 만족하기로 했다. 종이를 구겨서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1층으로 내려왔다. 집은 고요했다. 나는 TV 선반에 때마침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는 만원지폐 석 장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내가 다락방에 기거하면서부터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돈을 숨겨 두지 않았다.

나는 만원 뭉치를 집어 들면서, 가져가는 김에 두 장을 가져갈지, 그냥 한 장만 가져갈지를 고민했다. 행여나 앞집 여자와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하게 되더라도 돈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가 무일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앞집 여자를 비롯한 그 어떤 여자도 나와 데이트를 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만 원을 한 장만 가져가기로 했다. 겨우 돈 한 장과 여자와 같은, 세속적인 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예술가로서의 기거생활이 무색해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혹시 바지 호주머니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는지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해 본 다음, 만 원 한 장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가지고 내려온 이불로 얼굴과 몸을 감쌌다. 그렇게 두 눈만 세상 밖으로 남겨둔 채 나를 밀폐시킨 뒤,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모슬렘의 여인이 차도르를 걸치고 경계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퍽 재미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거울 비추기 놀이를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발하는데 시간이 꽤 소모될 테고 부모님께서 언제 집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깊이 내쉬고 마음을 고요하게 비운 다음, 조심스럽게 현관문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다. 현관문은 미닫이문이다. 미닫이문은 옆으로 밀기만 하면 열리는 아주 간단한 원리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현관문을 여는 게 무척이나 어렵고 난해한 일이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는 열고났을 때 펼쳐질 바깥세상에 대한 온갖 환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날뛰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더구나 5년만, 아니, 2년 반 만에 다시 현관문을 여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 했다.

나는 조금씩,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이윽고 바깥세상의 환한 빛이 내 눈을 한꺼번에 찔러댔다. 나는 마치, 유명 인사들이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부셔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드는 빛으로부터 얼굴을 차단했다. 나는 눈이 서서히 빛을 인식하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집 마당을 둘러보았다. 집 마당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주 좁은 화단에 어머니가 취미 삼아 심어 놓은 상추들, 흙속과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개미떼들, 하늘색으로 페인트칠 된 금이 난 벽, 사방의 건물들 때문에 잔뜩 그림자가 드리워진 회색 바닥.

나는 대문을 열어 집 밖으로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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