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꿈의 해석 - 4

in #kr6 years ago



[중편소설] 꿈의 해석 - 4

내가 이불 속에 드러누워 마음속 공허함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문틈으로 반찬이 담긴 식판이 스윽 하고 들어왔다. 점심이다.

“점심 먹어라!”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바닥에 누운 벽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침은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내가 느낀 시간에 비해 억울할 만큼 시간은 빨리 흘러가 버린다. 나는 마치, 어떤 암흑의 존재가 자신의 시간을 벌기 위해 우주에서 가장 여유로워 보이는 존재인 나의 시간을 빼앗아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음식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나는 나른해지는 정신을 주체할 수 없어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오후의 태양이 가장 밝게 떠오르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는 나무와 같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잠을 청했다. 세상은 아주 평온하다. 이번에는 앞집 여자가 꿈속에 나와 주길 기대하며 자의적인 상상 속에 내 정신을 내맡긴다.

앞집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막 단꿈에 빠져들려는데, 과일장수가 우리 집 바로 아래에 트럭을 세워놓고서 확성기를 틀어 소음을 냈다.

“쌉니다. 싸요! 꿀 사과! 꿀 사과! 소백 산 싱싱한 사과. 밀감도 있어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표정을 찡그리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후의 나른함을 깨는 장사꾼의 확성기 소리는 앞집 여자와의 로맨스를 떠올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도무지 장사꾼의 호객행위와 남녀 간의 로맨스는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어 재치고 장사꾼을 냅다 쏘아 보았다. 아쉽게도 장사꾼은 내 창과 반대되는 방향을 보고 서있어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장사꾼이 나의 신경질적인 얼굴을 보았다면 트럭을 다른 동네로 옮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시 문을 닫고 대신 두꺼운 이불 하나를 창에 덮어 놓았다. 그랬더니 바깥 소음이 조금 잦아드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이부자리에 누워 보았지만, 장사꾼 때문에 나른한 졸림은 이미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짜증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나는 두꺼운 책을 하나 집어 들어 딱지치기하듯이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쿵!"

다락방의 바닥이 묵직한 울림을 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아뿔싸! 1층에는 어머니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황급히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1층에 소리쳤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실수로 책을 떨어트려서 그래요.”

“조심해라! 이 녀석아. 집 무너질라. 점심 먹은 식판이나 내 놓아라.”

어머니는 방 문틈으로 맨듯하게 깎아 놓은 사과 한 접시를 스윽 넣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사과 접시를 받아들며 깨끗하게 비운 식판을 상호교환 하듯이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과일 장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잠시 들어오신 모양이다. 나는 달콤한 꿀 사과를 한입에 베어 물었다. 사과의 향긋한 향과 달콤한 물이 입안으로 스며들면서 나는 바깥의 과일장수에 대한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나는 사과 접시를 금세 비우고,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 시침이 오후 두 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젤 위에 집게로 고정된 도화지와 그 아래에 놓인 팔레트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부터 한 참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건만, 나는 언젠가부터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 더 자세한 표현을 쓰자면 슬럼프에 빠진 것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어서야 나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몽롱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거리에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학원 가방을 메고 요란스럽게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 나는 그때 다락방에서 기거하고 있을 지금의 나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 보았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냥 어린 시절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서‘나도 꿈 많은 시절이 있었지!’하면서 애써 서글픈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여섯 시 이십팔 분, 어느새 앞집 여자가 출근할 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여자를 관찰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때, 예상보다 일찍 녹슨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 이 잉-

그리고 미처 내가 창틈 아래로 피할 겨를도 없이 여자가 나와 버렸다. 여자의 눈과 내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창틈에 손을 기댄 자세로 석고상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은근슬쩍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의 맥박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날뛰었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굽이 높은 구두를 뚜벅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늘 가던 길을 걸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껏 여자를 관찰해 왔지만,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문틈으로 저녁이 들어와도 저녁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아까 전 여자와 눈이 마주친 상황만 반복해서 떠올렸다.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왜 미소를 흘렸던 것일까? 어쩌면 여자는 여태껏 내가 자신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도 나에게 은근히 호감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내며 깊어만 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겨울밤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이 깊어지자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연이어 펑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음의 주인공은 바로 폭죽이었다.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은 아름답긴 했지만, 우리 동네와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나는 새해를 기념하는 폭죽이 과연 우리 동네에도 해당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폭죽을 터트리는 사람들은 우리 동네 사람들을 별로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이 솟은 빌딩 숲 사이에 가려진 우리 동네, 언제나 사소한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재개발을 앞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난한 동네에도 새해의 희망은 존재하는 것일까?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그냥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각양각색의 빛깔로 퍼져 오르는 불꽃놀이를 창을 통해 지켜보는 것도 매우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나는 폭죽놀이를 매일 밤마다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집 앞 거리의 풍경을 지켜보는 나의 일과에 조그만 낭만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편으로는 앞집 여자도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어쩌면 그녀는 일이 너무 바빠서 신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여자의 이름만은 꼭 알고 싶다. 내가 유독 여자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건, 여자 집 거실 창을 통해, 여자를 관찰할 때마다 머릿속에 명확한 명칭이 떠오르지 않아 허전한 감정을 채울 길이 없는 까닭이다.

창밖에는 폭죽 터지는 소리와 그 소릴 듣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의 환호 소리와 그런 아이들을 혼내는 어른들 소리와 행복상회 앞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동네 아저씨들의 허풍소리와 늘 같은 시간에 들리는 이웃집 부부의 싸움 소리와 비틀거리는 취객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나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닫았다.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어섰고, 그렇게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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