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꿈의 해석 - 2
부모님께서 나의 다락방 기거 생활을 친척들과 이웃집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나를 대인공포증이라거나, 우울증이라는 근거 없는 처방을 내리며 나와 의사소통 하기를 시도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과 직접 만나는 대신 다락방 문을 걸어 잠그고 이렇게 외치곤 했다.
“지금 좀 바빠요.”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려고 수작을 걸었다.
“일단 나와 볼래? 우리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면서 이야기하자.”
나는 끌어내려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변명을 댔다.
“지금 중요한 작업 중이어서요. 한가할 때 오세요.”
물론, 그들에게 내가 한가할 때란 없었다. 나는 본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말대로 나는 이곳에 숨어들긴 했지만, 단지, 이 공간이 좋아서 그런 것뿐인데, 사람들이 ‘쟤가 오죽하면 저런 곳에 숨어들었을까!’하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면 답답한 마음도 들고 고작 그 정도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다락방 생활을 하는 5년 동안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다락방의 천장 높이가 낮아 늘 숙이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 생활은 단순하지가 않다. 물론,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나만의 세상에는 엄밀히 일과가 존재하고 새로운 관찰거리가 계속해서 생겨난다. 내 방에는 오래된 책들이 도미노를 일렬로 세운 것처럼 방 끄트머리를 에워싸고 있다. 나는 매일 자세를 엎드리고 쭉 나열된 책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면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 책들과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책들로 나뉘게 되는데 나는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책 중에 손가락이 집히는 데로 선택한다. 선택받은 책은 오늘 하루 동안 나에게 일과를 제공하는 셈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책의 눈빛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테고 또,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책을 고른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나처럼 5년 이상 정해진 책들과 동거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내가 눈을 뜨는 시간은 대게 아침 식사시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다. 그건 1년 전에나 그랬을 것이다. 나는 새벽 세 시가 되면 눈을 뜬다. 내 방에는 알람시계가 없다. 시계라고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낡은 벽시계 하나가 전부다. 벽시계는 벽에 걸려 있어야 제 역할을 할 텐데 바닥에 물끄러미 누워 있어 그런지 시곗바늘이 조금 느리다. 그래서 나는 정확한 시간은 모르고 바닥의 시계를 보고,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지금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알람시계가 없는 나는 오로지 동물적 감각과 잠재의식에 의존하여 스스로 잠을 깨운다. 그 동물적 감각이란 게 참 애매하지만, 나와 다른 이성을 관찰하고 싶은 욕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앞집 여자를 관찰하는데, 여자의 퇴근 시각이 바로 새벽 세 시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