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에 초대합니다: <시크릿 가든>에 대하여
SBS 특별기획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11.13. ~ 2011.01.16.)읽기
- 김은숙, 하면 <도깨비>나 <태양의 후예>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무엇보다 <시크릿 가든>의 작가로 다가옵니다. 저는 지금도 <태양의 남쪽>에서 <도깨비>의 이르는 그녀의 작품 목록에서 <시크릿 가든>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아래의 글을 덧붙입니다. 드라마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기대합니다.
초대의 말씀
<시크릿 가든>은 우리에게 눈물과 웃음을 준, 모두를 위한 동화이다. 여기서 ‘우리’와 ‘모두’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먼저 ‘우리’란 당연히 <시크릿 가든>을 함께 본 시청자들, 다시 말해서 비밀의 정원에 발을 들여놓아본 마법의 경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는 더 광범위하다. 이미 <시크릿 가든>을 시청한 사람부터 아직 시청하지 못한 사람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비밀의 정원을 함께 거닐어본 사람들과는 추억을 나누는 기록이 될 것이며 아직 그곳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마법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초대장이 될 것이다. 부디 이 수줍은 초대를 거절하지 마시길!
동화의 세계: 물신(物神)에서 물활(物活)로
<시크릿 가든>은 익히 잘 알려진 여러 고전 동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왕자가 가난한 평민과 결혼한다는 <신데렐라>, 왕자를 사랑하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매우 낯선 나라에서 모험을 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서로의 생활 세계를 교환하는 <왕자와 거지>와 같은 동화의 모티프들은 <시크릿 가든>에서 매우 매혹적으로 변주된다. 이 매혹적인 변주야말로 <시크릿 가든>의 백미라고 할 수 있으며 눈물과 웃음의 원천이 된다.
동화는 그 장르적 특성상 물활론적 세계관이 물신주의를 압도한다. 물신의 세계에서 신데렐라는 왕궁의 파티에 갈 수 없지만 물활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온갖 동식물과 초자연적 존재가 그녀를 돕기 때문이다. 호박이 마차가 될 수 있어야 신데렐라는 왕자를 만날 수 있다. <시크릿 가든>은 동화적 모티프를 차용하면서 물신(物神)의 세계에서 물활(物活)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고전 동화의 왕자 역할을 재해석한 등장인물인 김주원은 물신의 세계를 대표한다. 그는 “사회지도층”이라 자부하고 막대한 부와 뛰어난 지능과 매력적인 외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더구나 그는 온정주의의 표상인 고전 동화 속의 왕자와 달리 냉정하기까지 하다. 그는 으리으리한 집, 넓디넓은 정원, 세 대의 고급 승용차, 그리고 자본주의의 왕국인 백화점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그것을 위해 ‘정략결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에 비해 신데렐라이자 인어공주이며 앨리스인 동시에 신데렐라도 인어공주도 앨리스도 아닌 길라임은 어떤가. 그녀는 영화촬영 현장에서 위험한 액션 장면을 도맡아 하지만 얼굴은 화면에 드러낼 수 없는 스턴트우먼이다. 월세 30만원짜리 방을 친구와 나눠 쓰고 있으며 “집안, 학벌, 외모 어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여자”다. 그녀의 이력서에 기재된 경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물신의 세계에서는 주원의 말마따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물활의 세계, 다시 말해서 주원을 살리고 순직한, 그녀의 아버지가 속한 세계에서 보자면 그녀는 얼굴을 감출 필요가 전혀 없는 “김태희나 전도연 같은” 주연배우라 할 수 있다. <시크릿 가든>의 초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액션 스쿨의 사물함 안쪽에 붙어 있는, 사진 속의 라임의 아버지는 웃고 있다가 시무룩하게 표정을 바꾼다. 그 장면에서 <시크릿 가든>은 자기 장르를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으며 앞으로 전개될 판타지에 대해서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예비 학습을 실시한다.
목숨을 건 도약: 로맨틱 코미디와 판타지의 결합
보통 로맨틱 코미디가 계층이 상이한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면 판타지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이 극적 전개에 개입하여 인과율을 조정하는 장르적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두 장르의 결합은 ‘우여곡절’과 ‘초자연적인 무엇’의 만남을 의미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로맨틱 코미디가 그 자체로 현실에서는 좀처럼 관찰하기 힘든 ‘낭만적 요소’를 갖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까지 개입하게 되면 드라마의 갈등 구조는 심각하게 훼손될 우려가 있다. 말하자면 ‘저런 부자가 어떻게 저런 가난뱅이와 결혼해?’라는 불평에 ‘뭐? 서로 몸이 바뀐다고? 죽은 아버지의 마법으로 그렇게 됐다고?’라는 투덜거림이 시청자의 입술에 추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장르를 결합시키면서 극적 긴장을 탄탄하게 유지하려면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두 장르의 특성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새로운 직물을 짜내야 한다는 것이다.
<시크릿 가든>은 매우 영리하게 두 장르의 정수를 뽑아내어 하나의 화합물을 만들었다.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칵테일을 시청자 앞에 내놓은 것이다. 그 비결은 인용의 묘(妙)와 적절한 시점(時點)의 선택에 있다. 설사 읽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등장인물과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고전 동화를 창의적 변용의 텍스트로 선택했다는 것은 <시크릿 가든>의 대단히 중요한 서사 전략이며 그 전략은 주효했다. 익숙한 서사 구조에 얹힌 이야기였기 때문에 <시크릿 가든>은 변주의 지점이 도드라졌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시크릿 가든>만의 진귀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시크릿 가든>에서 가장 중요한 판타지 모티프는 ‘몸의 뒤바뀜’이다. 주원과 라임은 몸이 뒤바뀌는 초자연적 경험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단시간만에 획득한다. 이것은 <왕자와 거지>의 판타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왕자와 거지는 생김새가 같아서 서로의 역할을 바꿔볼 수 있었는데 비해서 주원과 라임은 몸이 바뀜으로서 서로의 일상을 진짜로 체험해보게 된다. 이 둘은 초자연적인 경험 때문에 서로를 도울 수밖에 없으며 이 연대의 경험은 둘 사이에 귀중한 자산이 된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그 다음에 비범한 상상력이 보이지 않았다면 <시크릿 가든>은 범작 내지 졸작이 되었을 것이다.
‘몸의 뒤바뀜’이라는 모티프는 자동차 추격 장면 촬영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라임이 뇌사 상태에 빠졌을 때 가장 극적으로 활용된다. 이때 주원은 ‘진짜로’ 목숨을 건다. 이 선택은 윤리적 최종심급에 해당된다. 라임에게 인어공주 역할을 제안했던 주원은 온데간데없다. 정반대로 그는 스스로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도 좋다고 결심한다. 이 전복적 변주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독창적이다. 왜냐하면 주원은 라임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그녀의 몸에 들어가 죽어야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로맨틱 코미디의 우여곡절을 벗어나서 비극적 판타지로 진입하게 되는 셈인데 <시크릿 가든>은 판타지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현실 복귀는 기억의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현실과 환상(판타지)의 경계가 그렇게 뚜렷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와 동시에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비밀의 정원이 있으며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는 마법의 주문이 곧 ‘기억’임을 가르쳐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주원은 21세에 겪은 ‘사고’에 대해서 잊고 있다가 극의 종반부(19회)에 이르러서야 그 기억을 되찾는다. 13년 전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때문에 어떤 장소에 갔다가 화재로 인해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된다. 유독 가스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데다가 그는 발목까지 다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혼자서 탈출할 수가 없다. 바로 그때 주원과 라임을 잇는 운명의 끈으로서 라임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도 같다. 그를 떠올림으로써 주원은 잊고 있던 과거를 복원한다. 그 과거의 끝에 라임이 있었다. 조실부모한 여고생 라임이 쓸쓸한 영안실에 엎드려 자고 있고 기진맥진해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주원은 그 곁에 누워 잠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 라임과 주원이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주원은 잠든 라임 곁에 잠시 머물렀다 갔을 뿐 제대로 조의를 표하지 못했다. 그가 사고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고 위로와 사과를 전했다면 라임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원이 사고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지운 것은 단순한 기억상실로 볼 수 없다. 헌신적인 소방관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라임의 아버지와 목숨을 맞바꾸었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라임의 아버지가 주원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 것이다. 주원은 이 기억을 망각 속으로 방기함으로써 윤리적 차원의 의무 불이행 역시 잊고 재벌 3세로서 오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제에 의해서 주원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가. 바로 이 문제를 풀면 우리는 비밀의 정원 한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뇌사 상태에 놓인 라임 대신 죽기로 결심한 주원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비가 오는 곳을 향해 떠난다. 이 장면에 이르기 훨씬 전에 우리는 이미 ‘몸 바꾸기’의 마법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고 있었다. 마법사는 바로 라임의 아버지다. 몸을 서로 바뀌게 하는 마법은 라임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하필 주원인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몸이 바뀔 때, 그러니까 첫 번째 몸 바뀌기에서부터 주원은 선택된 사람임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라임의 아버지는 닭백숙을 파는 여자로 변신을 했다가 자신으로 돌아오면서 신비한 꽃술병 속에 나타난 주원의 얼굴을 알아보고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이렇게 해서라도 내 딸을 살려야겠네.”라고 말한다. 주원이 선택된 이유는 19회에 이르러서야 분명하게 제시된다. 라임의 아버지는 주원을 구조한 뒤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딸을 주원에게 부탁한다. 여기에 윤리적 의무가 개입한다. 따라서 <시크릿 가든>을 그저 ‘운명적 사랑’에 관한 드라마로 치부하면 그 의미는 축소되고 만다.
기억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자신을 투입해서 그 미로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자각하는 것이다. <시크릿 가든>은 윤리적 의무가 곧 우리의 운명이 될 때, 비밀의 정원에 우리가 서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행복의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비밀의 정원: 타자와 만나는 유일한 장소
비밀의 정원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장소가 아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그곳의 입장 심사를 통과한 등장인물은 김주원, 길라임, 오스카, 윤슬뿐이다. 이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미로를 헤맸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의무를 찾아냈다. (라임도 그런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액션 스쿨 사물함에 붙은 아버지의 사진과 주원의 어머니 집을 방문할 때 들고 가는 귤 바구니는 라임이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의 딸로서 윤리적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오스카와 윤슬의 재회는 절대적으로 기억에 의지하고 있으며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음으로써 이뤄진다. 주원은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비밀의 정원의 주재자라고 할 수 있는 라임의 아버지는 주원이 목숨을 던지는 순간 마법을 정지시키고 라임과 주원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나머지 삶은 이제 그들의 힘으로 헤쳐 나가게 내버려둔다. 비밀의 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물화된 세계의 권세에 저항할 수 있는 마음을 서로 나눠가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원의 어머니는 절대로 비밀의 정원에 들어설 수 없다. 그녀는 과거라는 미로 속에서 영원히 맴돌며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모른 체한다. 라임이 자신의 아들을 살려준 소방관의 딸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한 언행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라임에게 무릎을 꿇긴 했어도 “어마어마하게 해주마. 돈으로 해주마!”라고 말함으로써 물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백한다. 어마어마한 돈으로 보상하면 라임의 아버지의 목숨도, 살아난 주원의 목숨도,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게 살아온 라임의 목숨도 값을 매길 수 있는 사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지 않고 사물로 취급하는 이 태도는 비밀의 정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시크릿 가든>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 방법의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만이 사물이 아닌 타자를 만날 수 있으며 물거품이 되지 않고 온전한 인간으로 변하는 인어공주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몸마저 포기하는 주원의 결단을 보라. 우리는 그 결단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환상의 효용: 다시 초대의 말씀
두 사람의 몸이 뒤바뀐다는 설정과 재벌 3세가 가난뱅이 스턴트우먼과 결혼한다는 설정은 환상의 차원에서 보면 동급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환상들 중 어느 하나만을 <시크릿 가든>이 다뤘다면 진부한 드라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크릿 가든>은 이 두 개의 환상을 종횡으로 엮어서 매우 뛰어난 로맨틱 코미디이자 판타지이고, 러브 스토리면서 그 이상의 메시지를 담는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인류학적 보편성을 확보한 고전 동화들의 서사 구조를 솜씨 좋게 활용하고 변주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시크릿 가든>은 국경을 뛰어넘는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주인공이 <신데렐라>처럼 남성 주인공의 의지에 따라 일방적인 구애의 대상이 되지 않고 <인어공주>를 남성 주인공이 각색하고 또 그것을 실행한다는 점에서 확인되는바 <시크릿 가든>은 남성중심주의적 시각에서도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시크릿 가든>의 세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계와 다르다. 혹자는 그런 동화적 세계를 만들어내고 탐사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노자 식으로 대답하자면 쓸모없음으로 쓸모를 지니는 나무도 있는 법이다. 다른 곧은 나무들이 모두 가구나 건축자재로 쓰일 때 굽은 나무는 쓸모없음으로 그 자리에 오래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넓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그 아래로 모으고 이야기꽃을 피우게 만든다. <시크릿 가든>은 이런 굽은 나무들이 모인 숲과 같다. 세파에 시달린 사람들은 이 숲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하나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밀의 정원에 초대합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시길!
한재연(@witism)의 최근 글 목록
- 인간이 만든 지옥, 형제복지원을 아십니까?
- 애프터눈 티에 대한 명상
- '진맛'을 볼 수 없었던 이유: <음란서생>(한국, 2006)
- 아파트 지하상가로 시간여행을 떠나다, 사실은 배가 고파서......
- 다람쥐가 인간보다 나은 점
- 새해엔 고래! - 스팀잇 버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근하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병실에서 보낸 하루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그게 최선입니까?의 유행어를 낳은 드라마죠
잘보고갑니다.
진짜 잼나게 봤던 드라마였죠 ㅎㅎ
아
저도
좋아하는 작가님이셔요
근데
님의 글 속 이야기도
여간 재미진 게 아니네요
하여
또 읽고 싶어져 팔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