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살 아이와 엄마 유골까지....충남아산 유해발굴현장, “그들은 악마였다”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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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중의소리 스팀지기입니다. 오늘 전해드릴 기사는 너무 슬픕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인 향토방위대에 의해 집단학살이 벌어진 충남 아산의 유해발굴현장을 담은 기사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 기록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아산군에서는 1950년 10월에서 1951년 1월 사이에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자 지목을 받은 민간인 200~300여명이 학살됐습니다. 여기서 '부역자'란 인민군 점령시기에 협조한 사람을 말하는 데요, 자의든 타의든 협조했다고 지목되면 부역자가 됐습니다. 부역자에 대한 처벌은 미군이 이 지역을 떠나고 온양경찰이 복귀한 후 시작됐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배방면, 신창면, 염치면, 온양읍, 선장면 등 각 지역에서 본격적인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이 민간인학살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 19일째를 맞은 3월 15일, 발굴현장에서는 수많은 유해조각과 유품이 6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현장을 담은 기사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악마였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개들의 성가신 짖음 소리가 무거운 대기를 타고 올라왔다. 물기를 머금은 소나무에서는 바람에 흔들린 빗방울이 후두둑 바람에 떨어졌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구 뒷터골. 눈 내린 모습이 아름다워 설화산이라고 불린 산 능선 자락에서는 파란 천막으로 덮힌 발굴현장 조명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에서 1951년 1월 사이에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했다는 지목을 받은 민간인 200~300여명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인 향토방위대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폐금광굴 유해 발굴 현장이다. 유해 발굴 19일째를 맞은 15일, 발굴현장에서는 어김없이 수많은 유해조각과 유품이 6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총알이 관통한 두개골의 모습. 당시 향토방위대는 5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근접사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구자환 기자

처참한 발굴현장... 2~3세 어린아이의 유골도 드러나

땅속 2미터를 파고 들어간 지층에서는 유골들이 겹겹이 쌓인 모습을 드러냈다. 학살자들은 마을 정미소에 감금한 주민을 100명 단위로 3차례에 걸쳐 이곳으로 끌고 와서 집단학살했다.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은 “유해가 다섯 겹으로 층층이 쌓여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1950년 10월부터 이 장소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까지 뒤터골 폐금광 학살은 1951년 1월 6일 발생한 학살로 알려진다.

학살자들은 죽임을 당한 시신위에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민간인을 세워서 학살하는 잔인함도 드러냈다. 대부분의 학살지에서 사람을 죽인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학살하지 않고 그 인근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죽음을 앞두고 피투성이로 조각난 시신을 목격한 피해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떠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곳에서 서로 엉킨채 드러난 유골과 유품들. 여성의 골반뼈 위에 쌍가락지가 놓여 있고 그 위 신발위로 유골잔해가 드러났다. 정강이 뼈 위로는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유해발굴단

임영순 발굴팀원은 한 곳에서 드러난 유골과 유품에 대해 안타까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두 겹으로 구성된 같은 장소에서는 여성의 골반뼈 위에 쌍가락지가 놓였다. 쌍가락지는 전통혼례식에서 혼인을 했다는 증표로 주어지는 예물이다. 그 옆에는 당시 피해자가 신었던 고무신이 놓여 있고 고무신 위로는 작은 뼈들이 쌓여 있다. 여성의 골반뼈 옆에 놓인 정강이뼈 위로는 3세 이하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쌓여 있다. 아이의 나이로 볼 때 피해자는 18세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인 것으로 보인다.

15일 충남 아산 배방면 유해발굴 현장. 동굴 입구 오른쪽 벽면에서 1950년 10월~1951년 1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 부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서로 엉긴 모습으로 드러났다.ⓒ구자환 기자

태워진 흔적이 보이는 두개골과 총알이 관통한 두개골, 골반 뼈도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에서는 학살을 끝낸 경찰과 치안대가 마을주민을 불러 짚단을 매고 산으로 올라갔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들은 시신위에 짚단과 나무 등을 덮고 시신을 불태워 증거를 은폐하려했다. 발굴된 유골은 열 살 미만 어린이의 유골과 대부분 여성으로 것으로 추정된다. 목격자들은 이곳으로 끌려간 사람들 70~80%가 아녀자였고, 어린아이를 엎은 여성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가족전체가 학살되기도 했고, 부역혐의를 받은 가족이 달아나고 없으면 다른 가족을 죽이는 대살도 자행됐다.

유골에 이어 수많은 유품들도 나왔다. 발굴팀에 의하면 현재까지 은비녀 20여개, 쌍가락지, 아이의 장난감인 구슬, 4혈 단추와 2혈 단추, 여성용 양장 단추, 약병, 의복, 머리카락, 고무신, 귀후비개, M1, 카빈 탄피와 실탄, 그리고 사용하지 않은 실탄이 유골과 썩혀서 나왔다. 유골과 탄피가 함께 있고 주변 지형으로 미루어 볼 때 학살자들은 5미터의 근거리에서 사격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여성의 왼손에 끼워진 채 발굴된 은으로 된 쌍가락지.ⓒ유해발굴팀

못다한 사랑의 한이 연리수로 자랐나...나무뿌리 아래로 드러난 유골

쌍가락지를 끼고 죽임을 당한 여성의 못다한 사랑의 한이 나무로 자랐을까. 특이하게도 수령이 40년가량 된 연리수의 뿌리 아래에서 다량의 유골이 나왔다. 나무뿌리가 지형의 변화를 막아주었기에 비교적 온전한 두개골이 유품과 함께 여기서 오고 있다. 총알이 관통한 두개골과 골반뼈가 여기서 나왔고 쌍가락지와 탄피도 함께 나왔다.

두세 살 어린아이의 유골이 나오면서 유해발굴팀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홍수정 발굴팀원은 “아이의 유골을 보면서 힘들고 우울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유해발굴을 돕는 유족은 “이건 사람이 아니다. 악마다”라고 했다.

동굴입구를 중심으로 좌측 벽면의 발굴을 끝낸 발굴단은 오른쪽 벽면에 집중하고 있다. 오른쪽 벽면에서는 유골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발굴팀원은 “두개골에 남아있는 이빨이 붓으로도 떨어져서 제 자리에 다시 옮겨다 놓곤 한다”며, “너무 처참하다”고 말했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피학살자 유해발굴 현장. 땅속 2미터 속으로 5층으로 겹겹히 쌓인 민간인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구자환 기자

발굴현장에는 사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 유족이 언론기사를 보고 100만원을 후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유골과 처참한 유골이 드러나면서 발굴팀도 독(?)이 올랐다. 점심을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발굴현장으로 김밥을 사가지고 와서 먹기도 한다. 작업시간도 늘리고 있다. 기존 오후 5시까지 진행하던 작업을 오후 6시까지 연장했다.

총괄진행을 맡고 있는 안경호 팀장은 “이번에 끝을 봐야겠다. 동굴 안을 확인하기 전에는 비가와도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작업을 마치는 시각, 자욱한 안개가 설화산을 다시 덮고 있었다.

  • 취재 및 기사 : 구자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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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으신 분은 레드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검색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역은 다르지만....

네 레드툼은 민중의소리 구자환 기자가 오랜기간 취재했던 내용을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

이러고도 한민족 한민족...
심지어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아니고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그것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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