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동네약국 - 上

in #kr7 years ago (edited)

"다음에 줘요."

언젠가 깜빡하고 약 값을 가져가지 않았을 때, 동네 약국의 약사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약국이 있다.
아니, 있었다.

그 약국이 오늘 문을 닫았다.

.
.
.

나는 벌써 10년도 전에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 약국은 내가 이사를 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약국인 듯했다.
그 때 당시에도 이미 세월의 때가 묻어있던 간판이라든지,
금성 마크가 붙어있는 온장고, 한쪽 벽에 놓인 니스칠이 된 나무 벤치 따위의 낡은 집기들이, 이 약국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약국에서는, 약국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와 쌍화탕 냄새가 어우러진, 이 냄새가 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동네 약국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 하얀 가운을 입고있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 약사까지.
이 약국은 그야말로 동네약국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그런 곳이었다.

그 약국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카드를 받지 않는 곳들이 종종 있었다.
동네 과일가게라든지, 만화책 대여점 처럼, 소액 결재가 주로 이뤄지는 곳들.
이런 데에서 카드로 계산을 하려면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동네 약국 역시 대체로 그런 곳 중 하나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런 편이었기 때문에, 어떤 곳은 카드를 받는 곳도 있었다.

그 날은 심부름으로 감기약을 사러 갔던 것 같다.
그런데 깜빡하고 현금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집에 돌아가서 현금을 가지고 와야 되나? 아님 그냥 카드로 결재해? 끄아악...'
1분 밖에 안되는 거리이긴 하지만 현금을 가지러 집에 다시 돌아갔다 나오는 것은 너무 귀찮았다.
심부름 조차 억지로 나왔는데 한번 더 귀찮은 걸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1000원 2000원어치 사면서 카드를 내밀면 욕만 잔뜩 얻어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0초 정도 신중하게(?) 고민한 결과, 나는 결국 약국으로 그냥 가기로 했다. 귀찮음이 두려움을 이긴 것이다. 나는 이 때부터 이미 귀차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었나 보다. 마음 한켠에는 카드 결재를 해주는 곳일 거라는 희망(?) 같은 것도 자리잡고 있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에 이어 쓰도록 하겠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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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니 시골 장터에서 만날을 수 있는 약방이 생각납니다^^

저도 지방소도시에 사는데...
장사가 안되서 문을 닫는다기보다는 가게와 함께 주인도 나이가 들어 닫는 곳이 늘고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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