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아오키: 잠은 죽어서나, 넷플릭스

in #kr6 years ago

자신이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 마치 유성처럼 떨어져 파장을 만들고 바람을 넣어 다시 숨 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영화, 음악, 만화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형태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내가 필요한 딱 그 순간에 오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타이밍이다, 타이밍. 너무 늦게도, 너무 빠르게도. 적절하게 발효와 썩음의 사이의 줄다리기를 잘라주는 그 순간.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서버 운영이 워낙 개판이라 게임 매치는 되지 않고, 배는 고프지만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는 짜증나고 어정쩡한 시간에 그냥 넷플릭스를 켰다. 뭔가 있겠지하고. 이리저리 컨텐츠 사이를 방황하다 핫핑크 채운 쌍또라이 같은 폰트가 예쁘길래 눈에 들어온 다큐 하나, 바로 <스티브 아오키: 잠은 죽어서나>

이게 뭐가 예쁘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넷플릭스가 초반에 한국 들어왔을 때 정말 가관이었다. 이제 좀 일한다는 증거. 오히려 차분한 미국 폰트보다 스티브 아오키의 똘끼를 더 잘 표현했을 정도. 의도인가, 귀찮음인가.

사실 스티브 아오키는 내게 데본 아오키의 오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데본 아오키는 슈퍼 모델 겸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내 미의식 구축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

지금이야 브아걸 가인이 뜬 이후로 무쌍도 예쁠 수 있다는 개념이 잡혔지만, 2003년에 데본 아오키를 매력적이라고 했던 한국 남자는 주변에서 내가 유일했다. 당시 사진 공부하던 때라 랑콤이며 베르사체 모델했던 데본 아오키 사진은 질리도록 봤기 때문일지도. 암튼 그때 프로필 검색하면서 알게 된 게 스티브 아오키. 긴 머리에 오이 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데본 아오키 오빠.

그 후로 완벽하게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가 오늘 다시 리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남자였다. 데본의 오빠가 아닌, 데본이 스티브의 동생이었다. 키보드 좀 두들겨보니 뭐 이건 커리어가 장난아님. 2간단하게 전세계 DJ 순위 8위를 찍었고, 그래미상 후보까지 올랐던 남자. '잠은 죽어서나'는 그 대단한 DJ의 삶과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다.

내용은 어떻게 보면 뻔하다. 열심히 살아온 한 남자의 석세스 스토리. 열심히 했고, 운이 좋았다. 너무도 훌륭한, 하지만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은 욕망까지 있었다. 거기다가 미국에서 마이너인 동양인. 그가 성공했다. 음악으로. DJ 이야기답게 훌륭한 음악과 자극적인 편집이 보는 내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했다. 살색 가득한 클럽에서 샴페인과 케익을 날리는 모습은 멋지더만. 디제잉을 배워볼까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다. ㅋㅋ

이 뻔하디 뻔한 내용이 현재 나의 삶에 겹쳐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좋았다. 기억에 남는 건 두 가지. 2014년 41개국에서 161번 공연을 했다. 그 해 가장 바쁜 DJ로 온갖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 비행기 복도에서 쪽잠 자면서도 공연에서는 계속 뛰고, 노래 하고, 디제잉 하면서도 아직 배고프다는 열정에 기가 질렸다.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면서도 '나는 무엇하고 있는가' 자연스레 비교가 되더라.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집중과 확고한 자신감. 좋아하는 일이기에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잘 할 수 있다는 그래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어우, 진짜 나 뭐하고 있는 거지?

너무 뻔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왜 이리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읽으며 꾸준함이 제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고 있었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주변에 흔들리고,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껄떡대고.

이 한 편의 다큐를 보고 나약한 내 자신은 180도 바뀌지 않는다. 다만 어떤 자극은 확실히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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