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의 피아니스트

in #kr6 years ago





내가 다니는 곳은 분명 성인취미 피아노 학원이다. 주로 퇴근 후에 찾는 직장인들이 많다. 그런데 좁은 칸막이 방에서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으면 갑자기 옆방에서 폭풍이 불어온다. 동시에 여러 개가 몰려올 때도 많다. 나같은 쭈구리들은 그 휘몰아치는 바람물살에 겨우 눈을 뜬다. 손을 뻗어 문고리에서 휘날리는 외투를 간신히 붙잡으며 나는 생각한다. 저게 취미라고? 진짜? 아니 옆방의 라흐마니노프님,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으나 도박으로 집안을 말아잡순 아버지 덕에 눈물을 머금고 악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긴긴 사연이 있나요? 뒷방의 베토벤님, 해외 콩쿨에 참가했지만 불현듯 찾아온 공황장애로 발작을 일으키고 이후로는 무대에 설 수가 없어 일찍이 프로의 길을 접어야만 했던 안타까운 과거가 있나요? 양민학살도 아니고 여기서 이러시면.. 저같은 송충이들은 건반 위에서 어찌 기어다닌단 말입니까. 그러고보니 올초에 자주 오셨던 프레디 머큐리님은 이제 뜸하시네요.



폭풍이 잦아들면 송충이 기어다니는 소리, 소가 음메-하고 우는 소리, 그리고 나무늘보가 방구 뀌는 소리도 들린다. 피아노 치는 사람의 악보는 다 거기서 거기라, 마음 같아선 옆방 문을 열고 반가움을 마구 표하고 싶다. 앗 옆방님, 저도 그 악보 뽑았어요! 뒷방님, 곡은 제가 스무살때 연주했던 거예요! 저도 앞방님이 치고계신 그 피아노 유튜버 보는데! 우리는 얼굴 마주칠 일은 없고, 여간해선 말을 섞을 일도 없다. 마주친다고 해도 누군지 모를 것이다. 피아노학원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오로지 벽 너머의 곡으로만 인지한다. 오늘도 김동률님 오셨네. 이루마님은 오늘 조금 늦네? 김광민 아저씨랑 유키구라모토 할아버지는 수요일 오후에만 들르시는구나. 'Playing Love'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요즘의 나는 그들에게 아마 엔니오 모리꼬네로 불리우고 있을 것이다. 내게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성진보다는 옆방 피아니스트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 것이다. 천재 예술가의 서사는 별로 관심 없으므로. 매일같이 좁은 방, 88개의 건반 위에 앉아있는 그들의 사연이 정말로 궁금하다. 그들도 내가 궁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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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입구에 정모 공지라도 한 번 붙여보심이 어떠실지? ^^

그정도 인싸력을 제가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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