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그림을 넣은 티셔츠: 네 번째 생일 선물

in #kr7 years ago (edited)

요즘 한창 5살 언니라고 으시대는 아린이는 어린이집에서 미술 활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는 이야길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듣는다. 금요일이면 어린이집에서 만든 것들을 가지고 집에 오는데 그날은 자기가 만든 것들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설명하느라, 또 아빠가 퇴근하면 똑같이 자기 작품들을 설명해주느라 시간을 들이곤 한다. 그 마음에 일일이 정성들여 반응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는 매일 그날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동생을 작은 방에 눕히고 나면 안방에서 문을 닫고 셋이서 잠들기 전까지 ‘신나는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놀이 시간을 갖는다. 그날 활동은 아린이의 선택에 맡기는데, 주로 아린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가 될 때가 많다. 얼마 전부터는 이제 제법 팔다리가 붙은(…) 사람을 그릴 수 있게 돼서 가족화를 그리는 일도 많아졌다.

아린이는 어린이 완벽주의자라(아내는 이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한다.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궁금해한다..)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나는 이거 못그려ㅠ” 하고 시무룩해지거나 그렸던 걸 직직 그어버리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잦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의 표현에 대해 굉장히 반사적인 격려로 “아냐. 잘 그렸는데 뭐. 그리다보면 나아질거야”라고 말해주곤 했는데, 이런 격려들은 회사에서 경험하는 것 같은—할 말이 딱히 없어서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거나, 그 일을 계속하게 만들려는 조작적인—표현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게 됐다. 요즘엔 “아린이가 이걸 예쁘게 그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실망했구나?”하고 공감해주려 노력한다.


풍경(風磬)의 나무들



5월 23일은 아린이의 4번째 생일이다. 아린이의 생일 선물로 뭐가 좋을지를 두고 몇 주간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아린이가 언젠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었다며 집에 가져와서 자랑을 늘어놓던 ‘풍경(風磬)’이 생각났다. 요즘 어린이집 교육 프로그램은 참 고상한 것 같다. 풍경이라니.


풍경에 그린 그림

과거에 상담 전공자들과 함께 불안/위축 행동을 보이는 해외 아동들에게 미술치료 활동이 효과가 있는지 검증하는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HTP(House Tree Person)나 KFD(Kinetic Family Drawing) 같은 그림 검사와 분석법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 연구에서 분석 쪽에 기여를 했었다. 아린이는 아직 사물에 대한 인지와 표현히 현저히 부족하기도 하고, 그림 검사가 그림 한 장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해주는 툴도 아니기에 아린이의 그림을 일일이 목적이 있는 시선으로 들여다보려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린이의 그림에서 마음을 대변해주는 상징적인 요소들이 그림에 보이면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이 풍경의 나무판에 아린이가 그린 그림은 뭔가 따뜻하고 흐뭇한 느낌이 있었다. 사과와 오렌지 나무라고 설명한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그루의 나무와 태양, 하늘, 그리고—외계인이거나 오징어로 보이긴 하는—사람을 그려놓았는데 스스로도 맘에 들었는지 굉장히 뿌듯해했다. 아린이는 이걸 집에 가져오던 날 저 풍경 소리가 잘 날 수 있게 안방문에 걸겠다고 의견을 내놓았고 아내는(우리 집에서 가장 잘 여닫지 않는 문이 뭐였더라 고민하며..)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아린이와 상의를 했다.

생일 선물을 고민하는 중에 이 풍경을 떠올린 이유는 아린이가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기준도 높아서 자주 실망하게 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는 그림이 있다는 게 좋기도 했고, 아린이의 창작물에 대한 아빠의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을 활용한 뭔가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싶었고, 즉시 떠오른 게 티셔츠 전사였다.


나에겐 흔한, 아이에겐 처음인



나의 재능은 무엇이든 가족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게 최근에 세워진 나의 원칙 중 하나다. 개인의 좋은 특질들은 직업에 집중되어 활용되고 개발되기 마련인데, 이것들이 가족에 영향을 주는 일들은 늘상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족 안으로 가지고 가야겠다는 의식은 없었다. 그러다 삶의 중심과 핵심 가치를 조율해가는 과정에서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내가 보유한 자원들을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티셔츠 작업은 학부때부터 흔하게 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아린이는 티셔츠에 그림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 거다. 이런 흔한 기술도 아이들에겐 처음 경험하는 새롭고 신기한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갑자기 엄청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티셔츠는 흰색 20수에 워싱 처리감이 조금 있는 걸로 사고, 전사지를 주문했다. 모두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저 풍경을 폰으로 찍어서 옮긴 뒤 포토샵에서 배경을 지워주는 작업을 했다. 일단 다섯 그루의 나무를 모두 꺼냈는데, 뭔가 조형하기가 쉽지 않아서 가장 크게 그린 나무 두 그루만 사용하기로 했다. 전사 작업 특성상 배경이 채워진 형태 안에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게 작업과 관리에 용이해서 아린이가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붓 터치 형태의 배경을 넣어주었다.


완성된 티셔츠


생일을 축하한다니


사실 나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축하는 어떤 성취를 달성했을 때 사람들이 그 성취와 노력에 대해 찬사를 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내 ‘생일’에 해당하는 나의 성취가 뭔지 알 수 없었고 그 축하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간의 아린이의 생일들을 보낼 때도 나의 마음은 아린이의 생일에 대한 환상을 채워주는 데 집중되어 있었지 ‘축하’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리 공감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생일에는 아린이를 ‘축하’할 수 있었냐면.. 역시 그건 아니었지만, 대신 나와 아내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었다. 이런 아이를 가정에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축하의 의미에 너무나 잘 맞는 위대한 ‘성취’였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아린이가 우리 가족에 온 것을 환호하고 환영해 줄 수 있었다. 이것이 아린이에게 진짜 생일 선물이 되었길 바랬다.


촛불끄기

착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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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이에 대한 얘기네요. 참 기쁘네요

같이 기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아닙니다. 아이에게 정말 잘해주려는 게 느껴져서 저도 기쁘네요. ㅎㅎㅎ정성글에는 추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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