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나오면 웃자.
아린이가 글자와 숫자를 조금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식탁에 탁상 달력 하나를 올려두었다. 가족 일정을 미리 아린이에게 알려주거나 아린이가 원하는 활동이 있으면 언제 할 것인지 약속을 하기 위해 달력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아린이가 언젠가부터 달력에 쓰인 숫자들을 읽고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탁상 달력을 하나 식탁에 올려두었다.
요즘 아린이는 그 달력을 보며 아빠가 회사에 가지 않는 날을 기다린다. 저녁마다 식탁에 마주 앉으면 달력을 나에게 내밀며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라며 재촉한다. 그러면 아린이는 며칠이 지나야 아빠가 회사를 안 가는지 센다. 아빠는 빨간색 숫자인 날은 회사를 가지 않는데, 한 주의 끝인 토요일은 까만색 숫자지만 회사를 가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한 번 자고, 두 번 자고, 세 번 자면 아빠 회사 안가네!?”
요즘엔 아린이가 나보다 더 휴일을 기다린다. 잘 모르는 숫자를 읽어가며, 손가락을 꼽아보는 아린이를 보면 아이들에게 아빠의 의미가 어떤 것일까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게다가 그게 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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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에 나는 평소보단 한 시간 정도 더 자고 일어나 가족들이 깨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내가 한 주간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샤워를 하고 명상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저널을 쓰고 있었다.
나는 저널의 ‘오늘의 다짐’ 항목에 가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전날 저녁에 아린이와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게 자고 일어난 그때까지도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이날 명상을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를 주제로 한 명상을 했건만!). 지금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일로 나는 아린이에게 너무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고, 아린이에게 그런 마음을 이야기 한 후 그날 저녁 잠들기 전까지 아린이를 피했다. 매일 밤 아린이와 보내는 ‘신나는 시간’에도 들어가지 않고 혼자 거실에 있었다. 아린이를 보기가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의 다짐
1. 아이들이 나오면 웃자. 어제의 감정을 오늘까지 가져가지 말자.
2.
나는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화가 난 상태지만 그것은 충족되지 않은 내 욕구의 비극적인 표현일 뿐, 그 감정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웃음’을 택하기로 하고 이 오글거리는 문장을 써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시 반도 되지 않았다. 뭐지. 아내가 깬 건가 하고 문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서서히 아린이 모습이 보였다. 아린이는 한 손으로는 인형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눈을 부비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린이 뒤로 보이는 방은 아직 어둡고, 아린이가 원하는 날 가끔 켜놓는 무드등—별들이 회전하며 천장을 수놓는—이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우주에서 아린이가 나에게 내려오는 느낌이랄까. 그런 선물 같은 아이를 위한 완벽한 연출이랄까.
당황했지만, 이 상황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완벽하게 조작된 것 같았다. 나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그래서 나는 거부하지 않고 채 하나 밖에 쓰지 못한 오늘의 다짐을 실행했다. 웃으며 팔을 벌렸더니 아린이가 더 크게 웃으며 뛰어와 안겼다. 아빠와 마음 상한 일이 있는 채로 너도 밤이 길고 무거웠겠지. 안아 올려서 일찍 보니 반갑다고 속삭여주며 식탁에 데려가 앉혔다. 내 눈에 탁상 달력이 들어왔다.
“아린아. 혹시 오늘 아빠 회사 안 가는 날인 거 알고 일찍 나온 거야?”
“응!! 오늘 날짜에 빨리 동그라미 쳐.”
아빠와 놀고 싶어서 자다 깼는데 바로 나왔다는 아린이의 마음이 사랑스러운 것과 동시에 왜 많은 역사 속의 지배계층들이 피지배계층에게 지식과 정보를 통제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주말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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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솔이는 충분히 더 자길 바랐기 때문에 나는 아린이와 상의해서 가까운 산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아린이는 무척 신이 났다. 새로운 방식으로 묶어 본 아린이의 머리도 괜찮아 보였다. 다짐을 한다는 건 삶을 그저 ‘맞이하는’ 게 아니라 주도할 수 있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한 독서시간보다 더 큰 배움을 주는 아침을 보냈다.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군요 ㅎㅎ
평화가 전해지나요? ㅎ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