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미감 (2/3: 디자이너와 시계, 그리고 바우하우스)
디자이너와 시계
제랄드 젠타(Gerald Genta, 1931-2011)
제랄드 젠타(Gerald Genta, 1931-2011)는 시계 디자인에서 선구적인 입지를 다진 사람이다. 그는 1950년대 주얼리 업계 수습생으로 들어왔다가 시계 디자인을 시작한다. 젠타는 본인의 디자인 하우스를 만들기 이전에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에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그는 해밀턴, 오메가, 오메가 피게, 유니버설 제네브와 협업했다.
젠타는 디자인 자문 역으로 컨설팅을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각으로 시계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의 스타일은 특히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등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이유인즉 50년대만 하더라도 다이얼은 시계 브랜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된 수단이었고, 케이싱이나 브레이슬릿은 상대적으로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젠타는 예술가로서 (자기 브랜드를 제외한) 디자인 정체성을 케이스에 집중적으로 담는다. 그의 디자인은 시계에서 다이얼만이 디자인 요소로 여겨지던 지루한 관습을 보기 좋게 깬다.
제랄드 젠타의 로열 오크 초기 스케치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는 그의 천재성이 녹아든 첫 번째 작업이다. 1972년 그는 잠수복 헬멧의 고정 나사에서 영감을 받아서 여덟 개의 나사와 연결부를 케이스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케이스를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즉각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고객들이 이 디자인을 수용하기에 케이스가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약 38mm).
그렇지만 기계식 시계가 점차 과시적으로 변해가면서 젠타의 디자인은 재조명된다. 고객들이 커다란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개성있는 그의 디자인이 최우선으로 조명받았다. 이후 그는 쇼메와 반 클리프 아펠, 피아제, 브레게, 불가리, 까르띠에 파샤, IWC 인게니어, 세이코, 그리고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케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인/브랜드와 협업한다.
그렇지만 보수적인 시계 업계에서 외부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순탄한것만은 아니었다. 2009년, 그는 한 그리스 시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외부자로서 디자인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로열 오크 이후로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분이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필자는 어쩌면 젠타와 같이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을 여러 브랜드에 골고루 녹여내는 사람은 이제 다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젠타의 팔각 디자인 성공 이후, 시계 브랜드들은 이제 다이얼 뿐 아니라 케이스까지 디자인 요소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에릭 지루(Eric Giroud)나 알랑 실버스타인(Alain Silberstein) 같은 인물들이 시계 디자이너로서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유명 개인 디자이너가 시계 디자인을 아웃소싱 하는 방식의 작업은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바우하우스 시계
이제 시계는 20세기 양식을 계승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이것은 가구와 건축뿐 아니라 생활양식으로서 시계 디자인에 영향을 발휘한다. 시계는 본디 기능을 위해 태어났지만 희소성과 계급 사회의 상징성 때문에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바우하우스 양식은 가장 먼전 시계에 붙어 있던 불편한 것들을 떼어버리고 기능만을 추구한다.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는 과거 시계들의 유산인 지저분한 장식, 꼬여있는 아라비아 필치, 복잡한 핸즈, 펜던트 모양의 케이스 등을 개편한다. 흔히 '심플 워치(simple watch)'라 통용해서 부르는 것들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들은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색, 장식, 굴곡 등 시계 본 기능 외에 부가적인 장식물을 체로 치듯 걸러 낸다. 시간을 읽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두고 남은 기능들을 몽땅 분리수거한다.
노모스(Nomos) 탕겐테(Tangete)
이들의 시계는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한다. 노모스(Nomos)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간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다이얼을 디자인한다. 인덱스는 간편하고, 핸즈는 시원하게 뻗는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간편해서 시간을 읽는데 무리가 없다. 노모스는 간혹 다이얼에 컬러 바리에이션을 주긴 하지만 이것은 가독성이나 형태에 방해가 가지 않는 선에 한한다.
독일의 융한스(Junghans)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계승한다. 그들은 38mm의 널찍한 다이얼에 바 인덱스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가독성을 높인다. 이들 시계는 핸즈가 길쭉하게 뻗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오독할 염려가 적다. 가죽 밴드 또한 장식적 요소가 없고,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면서도 패턴이나 가죽 결 같은 것을 살리지 않는다.
바우하우스 시계는 기능적으로 무결하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classic)인 시계라고 평할 수도 있다. 규칙이 엄밀 할 뿐 아니라, 계승이 꾸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우하우스 브랜드들은 업데이트가 곤욕이다. 10년 전에 구매한 시계와 최근의 것 사이에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우하우스 시계 메이커들은 폰트나 인덱스의 간격을 조정한다거나, 날짜창 크기를 바꾸고, 컬러 바리에이션을 개선하는 등 조금씩 진보한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시계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간결하고 명료한 맛이 있어서 한 번쯤은 경험하고 싶은 맛이 있다.
시계 미감 3편, 추상주의와 스팀펑크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