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아버지가 된다.
글쟁이가 된 이후로 알게 된 게 있다. 묵혀둔 감정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표현해야 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이 내 안에서 곪아든다.
종종 만났던 사람들이 있다. 네 명이다. 아니, 정확히는 네 가정이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 넷은 이래저래 통하는 것이 많았다. 의기투합해서 네 가족은 여행을 갔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각자 가족의 이런저런 면들이 보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설 때였다. 아이가 카라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빠는 화가 난 듯 “내 놔!”라고 말한 뒤, 카라멜을 멀리 집어 던져버렸다. 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두려움과 당황함을 애써 숨기려 아무렇지 않은 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아빠가 넌지시 말했다. “형님, 왜 그렇게 까지 해요” “넌 몰라서 그래. 쟤 아토피 때메 저거 먹으면 안 돼. 아토피 때문에 한약 먹는다고 들어간 돈이 얼만데” 아이의 아빠가 답했다. 더 이상 아무 말 말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술 한 잔을 하려고 모였다. 부부 넷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아이(둘째)의 아빠가 이번에는 첫째 아이에게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너 다리 벌리고 있지 말랬지. 다 큰 기집애가 왜 다리를 벌리고 있어!”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해오던 선생질이 어디 가겠나. “형님, 애들한테 갑자기 화를 내면 어째요. 아까 둘째 한테도 그렇고...”
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아빠를 타박했기 때문이다. “왜 애들한테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 왜 당신은 매번 그런 식이야.” “그럼 애들 다 네가 키워!”라고 언성을 높이며 아이의 아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괜히 마음이 쓰였다. 꼭 내가 부부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것 같아서. 조금 시간이 지나 나머지 남자들끼리 술 한 잔을 했다. 진짜 일은 거기서 발생했다.
처음에 남자 넷의 이야기는 좋았다. 그런데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겨우 누그러뜨렸던 아이의 아빠 감정이 터져버렸다. 그 대상은 나였다. “너, 임마, 네가 아무리 책도 쓰고 아는 게 많아도 남의 집 안 일에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갑자기 식탁을 쾅 내려치더니, 한 손에는 내 머리를 또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말했다. “야, 네가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머리에 피가 철철 날 때까지 병으로 머리 까버려.”
아이의 아빠가 안쓰러웠다. 자신의 감정을 다룰 지도, 표현하는 법도 서툰 아이 같아 보여서.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묘한 감정이 나를 덥쳤다. 나는 그 아이의 아빠에게 “형님, 미안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라고 연거푸 말했다. 나 역시 술에 취해서였을까? 나는 분명 잘못한 게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해야 할 말을 했다. 그렇다고 무서웠던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물리적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는 편도 아니거니와 그 아이의 아빠가 사실은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갑자기 연거푸 사과를 했던 것일까? 몇 주가 지나서야 알았다. 나는 잘난 체를 하고 싶었던 게다. 물론 아이와 아빠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나는 잘난 체를 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오.”라는 잘난 체를 하고 싶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 그런 비루한 마음이 있었다. 이제 안다. 그가 술병으로 위협을 해서 사과를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잘난 체를 위한 도구로 그를 사용했음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몇 주간 나를 괴롭혔던 마음은, ‘내가 주제 넘는 이야기를 했나?’라는 자기검열도, ‘나한테 술병을 들어서 위협을 해?’라는 분노의 감정도 아니었다. 내가 타인을 잘난 체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서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말해서 다행이다. 나는 그에게 미안했다. 충분히 미안했기에, 다음에 그를 만나면 이번에는 더욱 더 단호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형님, 아이를 그렇게 대하시면 안 돼요. 어른이면 아이를 보듬어 줘야지 아이를 분풀이용 샌드백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말한마디에 천냥빚을 갚을수는 없지마는, 원수되긴 참쉽다는 ....
육아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네요. 그 형님이 화는 냈지만, 분명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감정을 온전한 방법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그 형님이 안쓰럽네요.
아이와의 대화에 첫째도 둘째도 경청입니다. 내가 더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결국 가르치게 되더군요. 아울러, 저는 아이들과 문자로 대화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아이와 부모간의 주도권은 당연히 부모에게 있으니 부모가 그 주도권의 일부를 떼어 주지 않으면 결국 대화가 안되는 거죠.
저도 잘난 체 하는 거 맞죠? ㅎㅎ 놀라신 가운데 그리 결론내셨다면 성숙한 분은 맞는 듯합니다.
분풀이용 샌드백? 나름 정확한 표현이신듯 해요. 적힌 글만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