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잃음'과 '잊음'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욕지거리를 하며 부부싸움을 할 때면 잠을 잤다. 아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려고 애를 썼다. 힘든 일, 아픈 일이 있어서, 그것들을 잊고 싶을 때면 잠을 청했다. 몇 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면 무섭고 서러운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닫힌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나는 잤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요즘 잠을 못 잔다. 몸은 고되어도 그렇다. 음악을 들어도, 책을 읽어도 그렇다. 그저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을 들까 했지만,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른다. 오른손 검지와 약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려 애를 쓰면 찌릿 거린다. 몸이 덜 고되어 잠이 오지 않는 것인가 싶어,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두세 시간을 치고받느라, 손이 고장된 게다. 젠장. 그래도 잠은 오지 않는다.
불면의 밤은 그나마 낫다. 진짜 고통스러운 것은 낮이다. 불쾌한 몽롱함으로 하루를 지내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 불쾌한 몽롱함은 가끔은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일이 있어도 잠을 잘 수 있었던, 그래서 다음 날이면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던 날들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날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불면이라는 불청객은 왜 찾아왔을까? 불면은 ‘얻음’에서 오지 않는다. 흔히, 우리는 현재의 삶에 어떤 문제를 얻게 되어 불면이 찾아온다고 믿는다. 숙면의 삶에 불운과 걱정이 더해져 불면의 삶에 이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불운과 걱정거리가 없던 시절을 동경한다. 그것만 없다면, 우리는 다시 숙면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불면의 삶으로 들어서고 알게 되었다. 불면은 ‘잃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불면은 상실에서 온다. 불운과 걱정을 얻어 잠을 잃은 것이 아니다. 모든 걱정과 불운은 결국 우리가 잃은 것들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잠마저 잃은 것이다. 나는 잃었다. 소중한 것을. 그래서 불면에 시달린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의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살면서 소중한 것들을 잃어본 적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이처럼, 불면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되려, 잤다. 하지만 왜 나는 지금 불면에 시달릴까?
알겠다. 내가 잤던 이유는 ‘잃은’ 것을 ‘잊기’ 위해서였다. 나는 긴 시간, ‘잃음’을 ‘잊음’으로 메우려 했다. 내게 잠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나의 불면은 잊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잃어버린 것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하려는 무의식적 노력. 잃어버렸지만, 잊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했기에. 기억하기 위해 나는 불면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니, 정말 그렇다. 나의 깊은 숙면은 잃어버린 것과 함께 했을 때 가능했으니까.
나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테다. 하지만 불면의 몽롱함이 예전만큼 불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의 불면은 잃어버린 것을 잊지 않으려, 정확히는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애절한 바람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면을 너무 빨리 내쫒으려 하지 않을 요량이다. 그 소중한 것을 너무 빨리 잊는 것이 더 괴로울 테니까. 잠 못 이루는 밤을 조바심 내며 불안해하는 대신,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려 애를 쓸 것이다. 나는 이제 불면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내게 남긴 선물이니까. 그 소중한 것이 내게 남긴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