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1. 출발-도착
안녕하세요, shiho입니다. 이 글은 2015년 4월 25일 발생 당일에만 50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아직도 사망자 수조차 제대로 집계가 되지 않고 있는 네팔 대지진 당시 특파원으로 파견돼, 약 10일 간 카트만두 일대를 취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여정엔 중간 경유지인 태국 방콕에서 1박이 포함돼 있었다. 급하게 예약한 항공권이라 비용은 물론 직항과 경유를 따질 겨를 없이, 남아있는 항공권 중 가장 빨리 카트만두에 떨어지는 것을 구했다. 구호단체 '기아대책'에서 이 모든 귀찮은 절차를 대행해 줬다. 나중에 회사에서 비용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렇게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구조단체의 활동에 묻어 가는 입장이라 이들의 편의도 봐 줄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구호단체들은 재난현장에서 돈을 펑펑 써야 하기 때문에 1인당 반출할 수 있는 한도액을 훨씬 넘는 달러를 갖고 나가야 하는데, 이 돈을 봉투에 나눠 담아 갖고 출국해 주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기사에 이들의 활동을 살살 녹여 주고 기회가 되면 별도 기사 꼭지로 써 주는 일 등이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공항에서 엄청 큰 돈을 맡아서 반출해 줬다. 나눠서 가져갔음에도 각각의 봉투가 1인당 반출 한도액을 훨씬 넘어선 금액이었다.
필요한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자연스레 점심을 먹었는데 거기서 동행하는 기자들과 통성명을 했다. 펜 기자 두 명은 당연히 후배일 거라고 생각했고 카메라기자는 솔직히 선배일 줄 알았다. 계산을 한다기에 잘 먹었다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입국 신고서 같은 걸 쓰는데 나이가 두 살 어리더라. 그래도 선배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족보를 까보니 후배였다. 어느 모임에서 최고참이 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취재 바닥에 늦게 들어와서 가는 곳마다 선배 소릴 들을 때가 많았고 '옹'이라는 별명을 가진 적도 있었다.
방콕에 떨어졌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 똑같은 여정으로 카트만두에 가는 국내 여러 봉사단을 만날 수 있었다. 의대 교수들과 학생들도 있었다. 일행은 승합차 택시를 타고 공항 권역 안에 있는 노보텔(사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잠깐이라도 방콕의 밤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시내까진 너무 멀었다. 사지에 내몰리기 직전의 마지막 여흥 따윌 즐길 틈은 역시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출장가서 쓸 기사 계획 때문에 전날까지 상황과 구조대 동선 등을 파악하기 위해 기사를 빠짐없이 봤는데, 이틀 먼저 도착한 국민일보 선배가 벌써 여진으로 대피한 경험을 기사로 써 놓은 상태였다. 여진 때문에 추가로 건물이 무너지거나, 본 지진에 기울어져 있던 잔해가 무너져 추가 사상자가 속출하는 때였다. 두려웠다. 엄마가 보고 싶고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도 보고싶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이 침대에서 자는 마지막 밤일 수도 있다' '깨끗한 생수는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줄을 이어 떠올랐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알람 소리에 깼다. 두세 시간 눈을 붙인 것 같았다.
다음날 신문을 보고, 일부 메이저 신문 특파원들은 나와는 다른 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날 A신문 특파원이 칼럼에다가 B신문 특파원을 있는대로 조져놨다. 네팔 주변 나라에서 본인과 같이 있는데 B신문 기자가 네팔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텔에서 도착1신을 썼다는 얘기다. 이 와중에 이렇게 한가하게 기자질을 해 먹는 쓰레기도 있구나 싶었다. 더 웃긴 건 B신문은 중국주재 특파원과 경찰팀 기자 한명을 현지에 보냈는데, 경찰팀 기자는 카트만두에 있는 내내 특파원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특파원은 현장에 없었지만 기사는 계속 나왔다. 그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남이 네팔 기사를 중국에서 쓰든 태국에서 쓰든, 우리는 방콕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타이항공을 탔다. 비행기가 꽤 좋았다. 솔직히 우리나라 국적기보다 좋았던 기억이다.
기내에서 누리던 쾌적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의 골짜기에 위치한 나라였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착륙해야 할 곳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축에 속하는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 게다가 착륙할 공항은 지진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안개까지 끼어 있었다.
파견지에 도착하진 않았지만 출장이 벌써 시작됐다. 이미 비행기 안에서 기사를 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샘이다. 비행기는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 상공에서 뱅뱅 돌았다. 계속 돌았다. 나는 비행기가 몇 분 동안 선회하는지를 재야 했다. 그게 내 취재의 시작이었다. 나는 기사에 이렇게 썼다.
기자가 탄 타이항공 TG319편이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내린 시간은 이날 오후 1시(현지시간). 공항 상공에서 40여분을 선회하다 간신히 착륙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잠시뿐. 각국에서 도착한 구호물자를 실은 민항기와 인도 군용기 등이 공항 여객터미널 부근에 얽히고설켜 TG319편은 터미널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비행기는 승객들을 활주로 한복판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취재진과 조선대 의료봉사팀, 일본·태국·스위스 봉사단은 활주로를 걸어 간신히 입국장에 들어섰다.
1신 원문 링크
기사에 쓴 그대로였다. 비행기는 땅에 내려서도 20여분 간 아무 설명 없이 서 있었다. 결국 기장은 우리를 공항 터미널이 아닌 활주로 한 가운데에 내려 줬다. 승객들은 기내 수하물을 들고 약 500미터를 걸어야 했다. 불편함을 느꼈다기보다 신기하고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이 머리와 가슴 속을 꽉 채웠다.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각자 소신과 책임이 있어서 그 곳에 온 사람들이었다.
공항 터미널은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했다. 건물은 우리네 시골 버스 터미널 같았다. 어차피 비행기가 그 앞에 멈췄어도 별다른 승강 편의 시설은 없었을 것 같았다. 건물 앞엔 각국의 군용기들이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서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조끼를 겉에 입은 군복 차림의 인원들이 부지런히 짐을 내리고 있었다. 각국에서 답지한 구호물자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천정에 균열이 생겨 버팀목을 대 놓은 곳, 복도가 갈라져 시커먼 틈을 드러내고 있는 곳을 지나갔다. 착륙 직후부터 문자로 보고를 했는데 스마트폰은 무선인터넷은 물론 통화도 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차는 서너시간이 한국보다 느렸다. 서울에서는 한창 마감을 할 시간이었다. 외교부에서 여행 주의, 출국 권고 문자가 쏟아졌다. 갑자기 문자가 되는 것 같았다. 외교부 문자에 섞여서 캡의 답신이 들어왔다.
2015년 4월 29일 수요일
40여분 선회하다 여기시간 1시3분에 착률 뒤 별다른 설명 없이 20여분 기내 대기하고 있습니다(오후 4:42-한국시간)
오후 2시 25분 활주로 가운데 내려서 500여미터 걸어 터미널 도착했습니다. 짐 못 찾은 상태.(오후 4:43)
ㅋㅋ욕본다. 힘내라. 빠샤!!(오후 6:02)
넵 입국 수속 중입니닷(오후 6:13)
짐을 어떻게 찾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항 입국장은 한산했고 출국장은 미어터졌다. 별별 차들이 줄을 지어서 계속 공항에 사람을 토해내고 있었다. 네팔 사람도 있었고 인도 사람도 많았다. 얼굴엔 안도감이 감돌았지만 긴장을 놓은 것 같진 않았다.
좋은글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댓글 장원 님 아래의 글들은 제가 훔쳐 갑니다,
아이고 영광입니다. 사실 댓글 장원을 계기로 꿍쳐 뒀던 이 얘기를 지금 꺼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콘님 덕분입니다.
기자형님. 그런데 구호단채들이 재난현장에서 돈을 쓰는 건 왜 그런건가요? 제 생각엔 거기 뭐 살 수 있는 거도 없는데 돈이 아니라 장비나 구호물품을 들고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거기서 바로바로 뭐 하나요???
그 난리 통에도 쌀이 있고 가게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산 꼭대기 마을엔 생필품을 사러 내려올 수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 천지에 있고요. 카트만두 밖에서 넓은 비닐을 사서 보온용으로 나눠주기도 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 라고....
절망이 가득한 재난의 현장에 대고 비유하긴 좀 안 좋다고 생각되지만...
주변 국가들의 도움, 지원 같은 거 외에 시장은 언제든 형성된다고 생각됩니다.
비행기로 소수의 사람이 옮길 수 있으면서 운송비가 저렴(?)하고 실용적인 것은 역시 '돈' 이겠지요. ^^;
환이 방금 댓글로 연재에 쓸 거 하나 또 기억났다.
좋네 ㅋ
2부 금방읽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가 딱 드라마중요씬에서 끝나듯이
2편이 궁금했었거든요.꽤기다려야겠다 싶었는데 헤헤.
저는 일간지 기자니까요. ㅋㅋ 근데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5일 근무를 여기서만은 지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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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기자가 아닌가봅니다.
글이 정말 생동감 있네요 현장에 있는것 같습니다.
글 잘쓰시는 분들은 항상 부러워요,
전 제가 써두고 읽어도 무슨말인지 모르겠는 글들이 많더라고요
취재 뒷이야기 재밌게 봤습니다.
귀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도 한 문장을 길게 쓰다 보면 헷갈리는 일이 많아서 되도록 짧게 쓰려고 합니다. 제 기사보다 앞서서 쓰고 나니 마감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네요. ㅋ
네 이야기라 그런지 읽는 내내 긴장이 되는게...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구먼. ㅡㅡ;
ㅋㅋㅋ 무사히 다녀왔으니
공황부터 아비규환이었네요. 제가 갔을때는 많이 복구된 상태였군요. 앞으로도 좋은글 부타드립니다!
제가 갔을 때도 본지진이 일어난 지 4일 뒤였으니, 지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더라구요. 땅이 물처럼 흘렀다고 하더라구요.
기자분의 내공이 잘 묻어나는 글입니다.
아직 내공이랄 것도 없지만 고맙습니다!
당시의 여자친구...
왠지 그냥 짠한데요...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곳에 가신 것이니.
정말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당시 얘기를 좀 물어봐서 따로 한 꼭지 써볼까 고민 중이기도 한데.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정말 기자분이셔서 그런지 글을 잘쓰시는 것 같아요 ㅋㅋ
재미도 있고 참 잘 읽히고.. 너무 부럽습니다 ㅠㅠ
여진으로 인한 2차피해들이 되게 무서우셨을 것 같아요...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다음편이 참 기대되네요 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여진 때문에 밤중에 자다가 대피한 날도 있었는데 때가 되면 써 보겠습니다. ㅋㅋ
엉엉 픽 고맙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