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3. 정령이 사는 동네와 영어 공부하는 택시 기사

in #kr7 years ago (edited)





#1 우리 동네엔 늙은 정령이 산다


오후에 동네를 산책한 적이 있다.

나의 새 동네, 30년쯤 된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는
주로 젊은 부부들과 고령의 사람들이 산다.
저 옛날 서민들을 위해 보급했던 주공 아파트라
평수가 넉넉하진 못하다.
1인, 2인 가구가 주로 사는 이유다.

단지는 우물처럼 차분하다.
신중히 갓 어른의 삶을 시작한 젊음들과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늙음들이
느긋하고, 느슨하게 뒤섞인 이 곳.

편안하게 팔짱을 낀 젊은 부부가
느린 걸음으로 마트로 향할 때
아파트 단지 곳곳엔,
길고양이처럼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다.

나도 풍경의 한 조각처럼
젊음과 늙음 사이를 천천히 산책했다.
햇볕은 적당한 온도로 거리를 굽고,
나는 방금 겨울잠에서 깬 곰처럼
킁킁대며 거리의 냄새를 맡았다.


좋다.



나도 모르게
좋다라는 말이 과즙처럼 터져나왔다.

산책을 하며 느낀 기분을 와이프께 말했더니
자기도 이 동네가 좋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


할아버지 할머니들 좋아. 동네 정령들 같고.



정령이라.

어쩌면 이 동네의 늙음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 정령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동네를 지키는, 그런.




#2 택시 기사가 말했다 "해브 어 굿데이"


어제 오후였다.

외근 나갈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중년 아줌마였다.
나이는 우리 엄마 정도 되어 보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짧게 행선지를 말하고
곧바로 휴대폰에 시선을 박았다.


쉬 이즈 댓 뷰티풀
쉬 이즈 낫 댓 뷰티풀
쉬 이즈 댓 뷰티풀
쉬 이즈 낫 댓 뷰티풀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기사는 운전하는 중에 계속 거친 발음으로
'쉬 이즈...'를 반복했다.
거슬렸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싶었다.
그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책 한 권이 보였다.
'기초 영어 500'


제가 실은 영어 공부를 하는데요.



기사 아줌마의 얘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언젠가 국민연금공단에 가는 외국인 손님을 태웠는데
알아듣질 못해서 답답했다는 얘기.
그래서 조금이라도 알아듣기 위해
혼자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오늘 집에 가면 아들한테 '러블리 마이 썬'이라고 해야겠어요.
아들이 엄청 놀라겠지? 근데 손님, 이 말 맞는 거죠?



그 말을 듣자, 엄마가 떠올랐다.
대학생 때였다.
어느 날, 엄마나 날 붙잡고 말했다.
나도 영어가 알고 싶다고.
아니, 말하는 건 못해도 좋으니 읽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알파벳 발음부터 기초 영단어까지
일일이 알려드린 적이 있다.

엄마는 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십대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친구가 잘 다린 교복을 입고 등교할 때
엄마는 해진 사복을 입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교복이 너무 입어보고 싶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다.
병환으로 자리에 누운 아버지를
손을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를
굶게 놔둘 순 없어서.


영어하시는 거 알면, 아드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리려는데
기사 아줌마가 크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손님, 해브 어 굿데이!



기사님을 향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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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야기 잘 듣고 갑니다~ㅎ

해브 어 굳 위크엔드~!ㅋ

감사합니다. ㅋ 해브 어 굳굳굳 위크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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