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빙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in #kr6 years ago

팥빙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팥빙수 애호가입니다. 요 몇 년은 즐거운 시기였죠. 고만고만한 과일 팥빙수가 지배하던 암흑기를 뚫고, 다양하고 질 좋은 팥빙수가 넘쳐나기 시작한 겁니다. 급기야는 팥과 연유만 들어간 복고풍 팥빙수가되살아났죠.

역시 팥빙수는 심플한 맛. 부모님이 점심 대신으로 드시던 레트로한 맛이 떠오릅니다. 커다란 얼음조각을 수동 빙삭기로 샥샥 갈아 수북하게 쌓아놓은 얼음 알갱이의 담백한 그 맛. 여름의 소울푸드입니다. 만팔천원이 넘는 맛차 빙수를 먹어도, 모두에게 인정받는 밀탑 빙수를 먹어도 아쉬웠었죠. 마트에서 빙수 킷을 사서 가끔 해먹어도 그 때 그 맛과는 비교가 안되더군요. 왜 이리 아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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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제가 좋아하는 타입의 동네 빙수입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을 읽어 보면, 마가린 간장밥을 재현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마가린 간장 밥도 만만치 않은 메뉴지요. 시골의사 박경철씨도 대학 다니러 도시로 와서 하숙집에서 ‘I can’t believe its not butter’라는 기묘한 덩어리를 쌀밥에 올려 간장을 뿌려먹던 그 맛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죠. 세상에 이런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그런데 나이 들어 재현하려 했지만 그 맛이 안나오더란 겁니다. 수입 유기농 비싼 버터를 써도 따라갈 수 없는 그 때 그 맛. 알고보니 어린 시절 시장 간장집에서 병에 따라주던 그 몽고간장의 맛을 따라오는 간장이 없었던 겁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일본 기꼬망의 어떤 프리미엄 브랜드가 그 맛을 재현해주었고, 윤광준씨의 모험도 끝을 맺게 됩니다.

소울 푸드, 없이 살던 시절이라 맛있게 느낄 뿐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즘 프리미엄 식품이래봐야, 공장에서 값싼 식재료를 MSG와 색소로 가공하여 내놓지 않습니까. 질 좋은 쌀에 버터/마가린을 살짝 녹여 내고 질좋은 양조 간장을 올려낸 음식은 생각보다 고급 음식이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 먹던 팥빙수도 생각보다 고급 음식 축에 들어갔던 거지요. 홍대 까페에서 공장제 팥을 올려 만원 가까이 파는 음식을 먹고 있노라면 확신이 듭니다.

밋밋한 팥빙수에 아쉬움이 들던 어느 날, 팥을 사와 끓이게 되었습니다. 팥을 삶는 일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것 아십니까. 기본적으로 한시간은 끓여 줘야 하죠. 동지날이면 팥죽을 끓이던, 몸이라도 아프면 단팥죽을 끓여내던 어머니가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압력솥에 삶아 버린다던데, 이게 위기탈출 넘버원에도 나온 위험한 방법이라고 하죠. 썬글라스 벗는 것도 위험하다는 방송이지만, 압력솥에 팥 삶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두꺼운 팥 껍질이 공기 배출구를 막을 수 있다는 거죠. 압력솥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포기해야 합니다. 게다가 대류가 일어나지 않으니 드문드문 저어 줘야 해요. 이 더위에! 밀탑에는 장인이라 불러야할 팥삶는 할머니가 아침일찍 그날치 팥을 삶아 낸다고 하죠. 그 팥 삶는 기술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에누리없이 한시간 삶고 나면, 설탕과 물엿, 혹은 꿀을 넣어 조려주는 시간이 옵니다. 저는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지요. 식혜를 해 먹는 집이 줄어들고 있죠. 왜 그런지 아시나요. 설탕을 쳐바르는 수준으로 부어줘야 그 맛이 난다는 겁니다. 팥잼이라할 수준으로요. 이걸 몰랐네요. 얼음에 팥 넣어 먹으니 별 칼로리가 있겠나, 주마등처럼 스치는 칼로리 흡입의 순간들. 팥넣고, 연유넣고, 거기에 과일과 시리얼까지 넣어 먹으면 그건 내장파괴수준. 그것도 후식으로 먹었으니 호연지기지요.

팥이 익고, 다시 식을 때 까지 기다리면, 제작시간이 두시간이죠. 설탕을 쳐발라도 팥은 금방 상하니 많이 삶아 놓을 수가 없어요. 통조림 팥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일주일이 지나야 맛이 간다지만, 이렇게 삶은 팥은 이틀이면 맛이 변해요.

설탕은 차마 레시피만큼은 넣을 수 없어서 그 반을 넣습니다. 복고풍은 포기해야지요. 이 더위에 미칠듯 한강변을 30분 뛰는 것과 마찬가지랍디다. 그리하여 마침내 만들어진 심플한 팥빙수. 연유는 차마 넣을 수가 없어서 우유만 넣어 더 심플한 팥빙수.

맛이 조금 심심한 듯 싶었죠. 에효. 이 일을 왜 벌렸나. 첫번째 말아먹은 팥빙수는 그저 심심한 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열대야에 시달리다 저녁도 팥빙수로 하기로 했습니다. 감동의 그 맛이 찾아 옵니다. 단순한 얼음과 심심한 팥과, 우유. 붉은 것과 투명한 것과 하얀 것, 세 가지가 만나 이리 조화로운 맛을 내다니. 팥에게는 적당한 숙성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결국 주말 동안 모든 끼니를 팥빙수로 때웠습니다. 저는 팥빙수 애호가니까요. 그런데 그 팥빙수 애호가는 이제 안하기로 했습니다. 해먹기엔 번거롭고, 파는 건… 칼로리의 실체를 알았으니까요. 심지어 편의점에서 파는 롯데 팥빙수. 그게 라면 칼로리와 맞먹더라구요. 월드콘보다 팥빙수가 칼로리가 높다니까요. 거기에 우유를 부어 먹으면, 라면에 밥말아먹는 수준이 되는 거죠.

아듀. 팥빙수. 다이어트 끝난 다음에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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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니 저도 먹고싶네요 ㅠㅠ빙수
팥빙수로 주말끼니를 때우다니 진정한 애호가 시네요 ㅎㅎ
저는 다이어트를 포기했어요...다이어트말고 다른 많은 것들을 하기위해서요 ㅎㅎㅎ 다이어트 꼭 성공하시고 다시 맛있는 빙수 즐기세여!! 글 잘보고갑니당

오늘은 치킨 먹는 날이죠.

저도 팥빙수 애호가지만 하루세번이나 먹진 못하는데요, 진정한 애호가시네요^^
제가 원하는 팥빙수 맛을 재현하기만 하면 회사 그만두고 팥빙수집을 차려볼까도 고민했었습니다 ㅋ

하루 다섯 번도 먹을 수 있습니닷.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요~ 이런날 시원하고 달달한 팥빙수가 땡기네요~

오늘 참 더웠죠. 슬슬 열대야도 시작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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