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소설 autobiographical novel] #제 1장

in #kr7 years ago (edited)



*이글의 작자의 말 

*이 글의 서문

#1 


   교탁을 가볍게 두 번 친 선생은 산만한 주의력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되찾을 새라 얼른 역사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이 수업을 시작할 때면 교정 안 나무에 붙은 매미들은 꼭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법이다. 세상의 빛을 구경하기 위해 버틴 기나긴 땅 속 세월의 지질함*을 증명하듯 일정한 음의 구간을 반복하는 매미소리는 선생의 수업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 가혹한 환경에서도 나는 퍽 모범적으로 보이는 포즈로 꼿꼿이 앉아 있곤 한다. 이 포즈의 현상유지는 꽤 흥미로운 이점이 있는데, 가령 졸고 있는 뒤통수가 책상 위를 처박는 일이나 한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킥킥대느라 선생에게 손쉽게 무안을 주는 일을 목격하는 따위이다. 그러나 단연 이러한 포즈가 주는 으뜸은 새초롬한 아이의 걸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소지품들에 넋을 맡기는 일일 것이다. 걸상 위에 놓인 가죽 필통의 가죽 재질을 상상해보거나, 아무렇게나 놓인 지우개가 ‘메이드 인 차이나’일 것인지 추측하거나, 수첩에 수놓인 장식을 감상하거나....... 그러나 마음이 알려주는 진위를 밝히자면, 그 아이에게 내 영혼을 맡기는 일이 즐겁다고 해야 마땅하다. 시선을 끄는 물건들의 주인은 그 아이라는 것. 사실 소지품들의 색과 모양은 그 아이 고유의 색깔과 취향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은 다시금 그 아이로 환원된다. 그리고 무의식적 일련의 흐름은 구름 위를 걷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미술수업은 유심히 듣는다는 것. 한쪽 다리는 주로 또 다른 다리의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 살짝 걸치는데 이내 저린지 들린 발을 마루 쪽으로 내려놓고는 깍지다리를 만든다는 것. 수업이 지루해질 때쯤 되면 – 대개 지루한지 자주 떠는데 – 깍지다리를 종종 떨면서 팔은 한쪽 턱을 기우뚱하게 괴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것. 이 전부는 내 영혼의 숨결을 건드리는 표상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의 몸이 아니라 책상에 나열된 소지품에 눈길을 두는 것을 훨씬 선호했는데, 이 이유는 그 아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맘껏 그 아이를 구경하며 즐거이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돌연 그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면! 그에 놀라 황급히 시선을 거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적당한 곳을 바라보며 시야 내에 그 아이를 담아두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멋진 생각을 해냈다니 가끔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애가 뒤를 돌아보는 일이 싫은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세상에는 위험하지만 달콤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애가 뒤를 돌아볼 때 그 애와 매한가지로 똑같이 새침하면서도 멍한 시선을 유지한 채 시야에 확보되어 있는 흐릿한 아이의 모습을 보곤 했다. 눈가에 자리 잡은 점을 볼 수 없다든지, 그 애의 눈이 어느 곳을 머무르는 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한 나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왠지 그 애가 뒤를 돌아보는 일이 어쩌면 나의 일관된 시선의 결과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담긴 그 무엇은 열망하는 대상의 주의를 끄는 법이니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학교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경종을 듣고 나서야 내 눈 앞에 어른대던 그 애는 모습을 감추었고, 어느덧 라비엘은 자아(自我)의 귀에다가, 바로 귓구멍에 대고 말을 걸어왔다. 그것은 말들은 종종 혈(血)을 타고 심장으로 이어져 이내 가슴을 두근–두근 하게 한다. 태아의 심음소리를 듣듯이 고요히 그 맥박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심장의 고동소리는 더 크게 심장을 치고 그 소리는 다시 내 귓전을 때리고 그 요란한 북소리는 다시 심장을 때리고 그 심장을 때린 검은 혈은 다시 내 귀 뒤쪽으로 올라가 내 귓방망이를 잡아끌면서 나를 심연의 아득한 저편으로 안내한다. 희미한 건너편에는 라비엘이 서있다. 정말 형용할 수 있는 말은 찾아볼 수 없이 수식 없는 무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다가가면 종종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주로 눈이 그렇다. 그 눈은 슬프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존재는 하는 걸까.' 아까 떠들썩한 교실은 온데간데없고, 교실 속에서 그 애를 바라보는 행복은 사라졌다. 함께 웃었던 아이들도 없다. 함께 웃었던 나 역시 없다. 엄밀히 말하면 애초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존재했다면 왜 나는 지금 라비엘의 섬뜩한 무표정과 속이 미적지근해질 것 같은 슬픔을 견뎌내야만 하는가. 방금 전 내 볼에 차갑게 부딪힌 바람은 돌아보니 어느새 없는 것이 되었다. 아침만 해도 절대지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를 한 해는 지금 산머리부터 서서히 불을 태우며 산을 삼키려 악을 쓰지만 집에 도착할 쯤 되면 – 늘 그래왔듯이, 그러나 소름끼치게 – 홀연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저 들꽃도 강인하게 서 있지만 언젠가는 목숨을 다하기 마련이다. 인간도 저 들꽃 따위와 그리 다르지 않다면,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영원하지도 못할 생을 살면서 각자의 라비엘이 나타나 온갖 우수와 고독과 쓸쓸함과 상처와 혐오를 드러내며 그 비열한 냉소를 견디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언젠간 마감할 내일을 하루하루 기다리며 무력하게 이어가는 삶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고약한 라비엘과 맞서 싸울 칼자루마저 그에게 넘겨버린 수많은 자아들이 라비엘의 손아귀로부터 진정한 인생을 찾아올 날이 올 것인가. 진정한 인생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원히 ‘진정한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미엘의 희디흰 다리와 웃음소리는?'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나는 일체의 영원성을 근원까지 파헤쳐 인정하고 싶어졌다. 유미엘은 계속 존재되어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마땅히. 



*싫증이 날 만큼 지루하다.


※글의 서문에 링크를 걸어놨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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