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돌로뮤의 대학살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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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바돌로매는 무시무시한 방식의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 가죽이 벗겨져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것이다.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전승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심판'을 보면 중앙의 예수 아래에 가죽 같은 걸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돌로매다. 그리고 손에 든 건 그 자신의 가죽이다. 유럽에서 "바르돌로뮤" 또는 "바르톨로뮤"라로 불리운 그의 축일은 8월 24일이었다. 그리고 1572년 8월 24일. 천국의 바르톨로뮤가 그 벗겨진 가죽을 들고 통곡할 만큼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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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프랑스는 신구교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몇 차례 내전을 거치며 신교도들도 프랑스 곳곳에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했고 국왕 측근에까지 진출했다. 국왕이 "친애하는 아버지"라고까지 지칭한 유능한 장군 콜리니도 신교도였고, 국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전의도 신교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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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가도 고민은 많았다. 카톨릭 귀족들도 견제해야 했고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의 알력도 있었다. 콜리니 장군은 국왕에게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스페인에 맞설 것을 촉구했고, 이 와중에 신교도 왕국이었던 나바르의 왕자 앙리와 국왕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마고)와의 결혼 동맹이 추진된다. 앙리의 어머니가 프랑스 왕 샤를 9세에게 "교황이 이 결혼을 반대하면 어찌할 것이냐?"라고 묻자, 왕은 단호하게 답했다. "교황이 그런다면 내가 마고를 신교도들의 집회장에 데려 가서 결혼식을 올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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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는 화려하게 파리에 입성한다. 하지만 결혼식은 따뜻하지 않았다. 마고 공주가 결혼식에서 앙리를 남편으로 맞을 것인가 하는 대주교의 질문에 답하지 않자 왕이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했을 정도. 또 대성당의 그늘에서는 국왕이 신교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구교도의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그 음모의 시작은 국왕이 신뢰하던 신교도 장군 콜리니 저격이었다. 장군은 중상을 입었고 국왕은 콜리니를 방문하여 "그대의 아픔은 내 아픔이다!"라고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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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 이하 카톨릭 귀족들은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신교도들의 복수를 피하려면 먼저 치는 수 밖에 없다고 왕을 압박한다. 신구교도 분쟁의 재발로 왕의 통치가 힘을 잃기 전에 신교도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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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마다 "왕은 내 편이다."라고 생각하게 했다는 "교묘하게 순진했던", 즉 우유부단하고 변덕이 심했던 왕은 망설임 끝에 몇 시간 전과 180도 다른 명령을 내린다. "파리의 신교도들을 전멸시켜라. 짐의 명령을 즉시 이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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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을 입고 누워 있던 콜리니부터 목숨을 잃는다. 프랑스의 내전을 종식하고 신구교도의 화합을 이뤄 보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파리로 올 때 음모를 눈치챈 한 신교도 여인이 엎드려 만류한다. "당신은 지금 파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들을 때마다 그의 대답은 그 최후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견결했다. "다시 내전을 겪느니 파리의 쓰레기 더미 위에서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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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의 목 없는 시신은 파리 시내에 나뒹굴었고 파리에 입성했던 앙리의 수행원들을 비롯한 신교도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약 7만 명이 죽었다. 콜리니가 진절머리쳤던 내전의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이제 신교도들은 그때껏 지켜 왔던 "왕권에는 복종하는 것이 옳다"던 캘빈의 가르침마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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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무대가 학살의 장으로 음산하게 변하는 일은 역사에 의외로 흔하다. 화해의 자리가 새로운 원한의 시작이 되는 일도 귀하지 않다.남북의 평화의 상징 같던 금강산에서 남한측 자산을 몰수한다는 북한 관련 보도를 들으면서, 1572년의 한 결혼과 그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던 하객들이 바로 그 8월 24일 당해야 했던 운명이 떠올랐던 것은 그 불길한 상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이나 북이나 "다시 내전을 겪느니 쓰레기 더미 위에서 죽겠다."던 콜리니보다는, "엎질러진 물이다. 조질 수 있을 때 조지자. 며칠이면 된다."고 충동질하는 이들만 빗자루로 쓸어낼 만큼 많아서 더욱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