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벗들 이제 무엇을 배워야 할까

in #kr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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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벗들 이제 무엇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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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동기 중 말장난에 능한 친구가 있었다. 동아리 낙서장에 저마다의 필명으로 끄적일 제 그는 자신의 필명을 ‘지하’로 적었다. 어쭈 뭐 김지하냐? 내가 이죽거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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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준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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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듣고 폭소를 터뜨리며 “그래 너 닮았다. 너는 가끔 하이드 같을 때가 있어.”하며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평소에는 지극히 명랑하고 친절했으되 술을 먹거나 분위기를 타면 세상 비극은 다 짊어진 듯 우울하거나 거칠어질 때가 있는 녀석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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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지하’의 원조 ‘지하’(芝河)가 갔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 역시 좀 다른 의미의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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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두운 ‘민족적 민주주의’와유신의 시절, 그의 존재와 그의 시는 분명 메마른 사막 속 희망의 샘이고, 어둠의 광풍 속에서 쉽게 스러지지 않는 촛불이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대중만큼이나 미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빵쟁이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관심(?)을 받은 빵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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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를 특수감금상태속에서 집어넣고, 접견⋅통신⋅독서⋅운동⋅세면 일체를 금지한 위에 심지어 6개월 이상이나 일체의 물품구매마저 금지시켰읍니다.....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휴지 구매마저도 금지했읍니다. 밥을 먹으면 배설을 해야 되고 배설을 하려면 휴지가 필요한데 손가락으로 닦으라는 얘기입니까? ” (1976년 12월 23일 공판 최후진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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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을 풍자하는 <오적>같은 시를 썼다는 이유로 중죄인이 돼 감옥에 갇혔고, 턱없는 조직 사건의 배후라는 명목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고, 위에 쓴 것처럼 사람을 말라죽이는 감옥살이를 몇 년을 치러야 했던 그의 시가 70년대 죽음의 골짜기와 80년대의 불바다를 걸었던 사람들에게 즐겨 낭송되고 노래로 만들어 불렸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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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 <타는 목마름으로> <새> <푸른옷>같은 노래야 말할 나위 없고 <서울길>이나 <금관의 예수>처럼 팍팍한 삶을 살던 이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까지 그의 시와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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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 버림받은 끝 없고....”를 부르며 독재 정권에 대한 반역을 꿈꾸던 청춘들에게, 감옥에 들어앉아, 또는 그런 신세가 된 벗들을 그리며 부르던 “왜 날 울리나 눈부신 햇살 새하얀 저 구름”을 되뇌던 이들에게, “가슴에 흐르다 굳어버린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죽어도 좋겠네.”를 읊조리며 눈물 주룩주룩 흘리던 사람들에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절규하던 예수쟁이들과 예수쟁이 아닌 모두에게, 김지하는 정녕 은혜로운 인물이었다. 그의 밝음이다. 닥터 지킬의 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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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0년대 이후 그는 생경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딩 시절 부산 서면 영광도서에서 그의 책 ‘대설 남’을 집어들었다가 대관절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며 집어던진 이후 그의 생명 사상 설파를 봉독해 보겠다고 어설픈 시도를 했으나 지식과 철학의 일천함 탓인지 큰 감명을 받지 못했다. 70년대에 그토록 열렬한 투사였다가 80년대 기이하게 변했던 김동길만큼은 아니었으나 점차 그는 관심에서 멀어졌고 ‘어른’의 위치에서도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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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인의 인터뷰를 보면 그 이면의 당혹과 좌절을 일부 느낄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상황을 인식한 어머니(박경리)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동아일보 2012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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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적어도 그의 가족이 ‘운동권’ 내부에 실망감을 느꼈고 이후 김지하 역시 그에 동화돼 갔던 것 같다. “남편은 자기 세월 다 도둑맞은 사람이다. 7년간 감옥에서 외부 접촉 없이 지냈고, 나온 뒤엔 20여 년 동안 변절자, 생명운동 교주라고 공격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사회생활, 세상에 대한 이해, 가족관계 등 소통이 힘들었다.” (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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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은 많은 것을 부른다. 일단 고립을 부르고, 고립은 대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좌절로 이어지거나 “나를 몰라주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을 쌓는다. 그리고 한때 그의 안위에 수만명이 손을 모으고 그의 석방이 온 대학가에서 축배를 들 사안이 됐던, 즉 일종의 ‘문화권력’의 정점에 섰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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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그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한때 단단한 대지 위의 동지였던 그들은 대륙 이동 뒤의 인류처럼 동떨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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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결정적으로 ‘하이드’로 변했던 순간으로 1991년 분신 사태에 그가 내던진 폭탄같은 칼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 칼럼에 흥분하여 집에 있던 김지하 시집을 갖다 버린 (아이고 아까워라)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지금 생각할 때 그 칼럼은 그의 변절(?)보다는 ‘충심’이 담긴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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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당시의 연이은 분신은 한국 학생운동권의 그릇된 문화와 감성의 뼈아픈 정점이었으며, “이 한 몸 불태우니 너희들은 분노하여....” 같은 비장 서사의 위험한 일탈이었다고 보거니와, 당시의 김지하는 1986년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가 문익환 목사에게 전했다는 말, “분신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해라. 독립운동하면서도 살아서 싸웠지 분신해서 죽는 경우는 없었다.”는 호소를 격하게, 그 특유의 언어를 통해 전달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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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세상과 90년대의 사람들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에, 그리고 그가 애초에 그 글을 가져갔던 한겨레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실렸기에 그 칼럼의 파괴력은 그 자신까지도 휩쓸어 버렸다. 이후 그는 용서하기 힘든 ‘하이드’로, ‘지킬 박사’의 기억은 거의 사라진 하이드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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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가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그의 말이 지상을 장식할 때마다 그에게 공감했던 기억은 없다. 더구나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했던 박정희의 딸을 지지하던 모습은 노추(老醜)라고밖에 더할 표현이 남아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논리는 정교하다기보다는 완고했고, 뻔한 소리를 어렵게 하는 재능만 발휘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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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이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거니와 (무슨 이런 봉건적인 용어를.....) 그는 변절한 게 아니라 추하게 늙었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어서 자기 말 안들어 주는 사람들에게 삐치고,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설교하기를 즐기고, 그러다 외면받으면 분노에 휩싸이고, 그 분노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력과 역사마저 한낱 불쏘시개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은 그 이외에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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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장돌뱅이든 위대한 거인이든 모든 이의 생애는 빛과 그림자를 지닌다. 그 빛의 크기와 그림자의 깊이가 다를 따름이다. 김지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김지하의 그림자보다는 그의 빛을 더 바라보고 싶다. 그가 명철했던 시절, 그의 글과 시와 투쟁에 우리 민주화운동이 기댔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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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우리는 그의 그림자를 우리의 모습으로 투영해 보았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나이 들었답시고 요즘 젊은 것들은..... 혀를 차는 데에 더 부지런하지 않은지. 세상은 변했는데 왕년의 운동권 시절 논리를 지금도 구사하며 스스로 고립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누가 무시할라치면 “이 사악한 놈! 감히 무엇을 건드리느냐!” 노호하며 자신과 주변을 모두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김지하의 표현을 빌려 “늙은 벗들 이제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를 곱씹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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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그의 '지킬박사' 시절을 쓰기로 한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았던 한 역사적 시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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