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 세상 밖으로
1999년 10월 29일 이근안 세상 밖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줄여서 민청련이라는 단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 단체는 1983년 만들어져 전두환이라는 깡패 두목 (이 사람의 성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이 다스리는 정권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단체다. 이 단체의 기관지 창간호에 신경림 시인이 실었던 시는 이 단체의 존재가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불길을 헤치고 물 속을 헤엄치고 / 가시밭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 모두들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 온 나라에 울려퍼지는 노래 크게 외쳐 부르면서 / 등에는 깊은 이빨자국 이마와 손바닥엔 아직 피 붉은 채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 / 끝내 흔들리지 않을 깃발 저 하늘 ...높이 세우기 위하여......"
창립은 9월에 했는데 경찰의 방해로 정식으로 사무실을 얻고 활동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이 죽다 살아온ㅈ리 분위기도 북극의 얼음 동굴같이 싸늘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10월 29일 민청련은 기습적으로 얻어 놓았던 사무실에 현판을 달고 현판식을 거행한다. 이에 기겁을 한 경찰은 즉시 사무실을 점거하고 집기를 내동댕이치고 현판을 뜯어낸 뒤 1주일 동안이나 문을 봉쇄한다. 경찰과 깡패가 구분되지 않았던 시절의 풍경화.
2년 뒤 1985년, 또 10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이 민청련에 대한 조사 발표를 한다. 대학가의 각종 시위와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 학생들의 지하단체인 ‘민주화추진위원회’가 있으이 배후에 김근태가 있다면서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발표가 있기 전, 김근태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9월 초 구류를 끝내고 나오던 김근태는 석방되기는 고사하고 저 유명한 남영동 대공 분실로 끌려간다. 그리고 23일간 불법으로 감금된 채 짐승같은 고문을 당한다. '관절꺾기' '(요도에) 볼펜 심 끼우기' 등 말하기조차 끔찍한 고문 과정에서 그는 잊을 수 없는 고문 경관 한 명을 눈에 담는다.
'반달곰'이라 불리우기도 했고, 박중령이라 호칭되기도 했던 고문기술자. 김근태 뿐 아니라 녹록치 않은 심문 대상자가 있을 경우 출장을 다니며 그들을 달아맸던 냉혈한. 그의 이름은 이근안이었다.
'빠개질 듯이 아픈 머리가 큰 수박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고통'에 '멱 따진 돼지'처럼 비명을 내지르게 하는 (김근태의 표현) 전기 고문을 솜씨 있게 진행하면서 이근안은 김근태의 귀에 대고 뇌까린다. "지금은 네가 당하고 나중에 민주화 같은 거 되면 내가 고문대에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고문해라. 응?"
표창을 16번이나 받았으며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 수사가 안된다."는 극찬을 들었던 이근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렸을만큼 잔인했던 인간 백정은 세상이 바뀌면서 지하로 스며들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고문 사실이 드러나고 그 죄상이 폭로되었지만 경찰은 지명수배만 내린 채 "우짜라고?"를 반복했다. 못 잡느냐 안 잡느냐의 답 없는 논쟁만 뜨거운 가운데 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민가협에서 1억의 현상금을 내걸어도, 지명수배 포스터를 사방에 붙여도 그의 행적은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
그러던 1999년 또 또 10월 29일 느닷없이 그가 자수한다. 왜였을까. 어쩌면 그는 세상이 또 한 번 바뀌리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빨갱이들이 설쳐 대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이 뒤집히고 자신이 돌아온 영웅으로서 갈고 닦은 고문 솜씨를 발휘할 때가 오리라 굳게 믿고 경찰 내부의 형님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지냈는지도 모른다. "납북어부 김성학 씨 사건 관련하여 부하 3명이 구속돼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더 이상 도피하기도 어려웠다."고 했으니, 이제는 정말 안 되겠구나 싶었던 것 같다.
7년을 최종 선고받은 후 그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그리고 천만뜻밖 황당무계하게도 그는 목사가 된다. 자칭 목사가 아니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 진짜 목사가 된 것이다. 아무리 20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하나 과연 예수는 죄인에게 고통을 어떻게 줄까를 연구하며 채찍에 납덩이를 달고 갈고리를 드리우며, 마디마디 마다 짐승의 날카로운 뼈를 갈아 꽂았던 로마의 고문기술자들을 잊을 수 있을까. 피가 튀기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져도 헤죽헤죽 웃으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며 조롱하던 야수들의 후예가 목사가 됐다.
예수야 일곱 번의 일곱 번도 용서하라는 분이시니 태연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옷을 찢고 머리 풀어 눈물로 참회하기는커녕 나는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김근태에 대한 전기 고문은 1.5볼트짜리 건전지 두 개로 협박한 것이 다라고 우기면서 이제 그 진상을 밝히겠노라는 '목사' 앞에서 아무리 예수님인들 평정을 유지하실 수 있을까. 아직 벼락이 내리지 않았으니 평정을 유지하고 계신 것 같긴 하지만.
1999년 10월 29일 나는 이근안의 모습을 사진 아닌 영상으로는 처음 봤었다. 곰같은 체구와 아직 둥글어지지 않은 눈매의 그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개는 한 번도 숙여진 적이 없다. 그날 나는 짐승을 보았고, 비록 목사직은 추후 박탈당했으나 그는 어쨌건 목사가 된 적이 있다. 그 자체로 한국 기독교는 혀를 깨물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