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돌아보기 1 - 함경북도 남양에서 내가 태어난 이유

in #kr3 years ago

아버지의 돌아보기 1 - 함경북도 남양에서 태어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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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버지가 이런 걸 쓰고 있는데 나중에 네가 한 번 정리하면 좋겠다 하시며 컴퓨터 파일을 보여 주셨다. 본인의 일생을 어릴 적부터 돌아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와 멋집니다 좋습니다 박수는 쳐 드렸으나 아들은 파일을 가져와 놓고도 한참 손을 놓고 있었고 그렇게 또 몇 해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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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파일을 찾던 중 문득 눈에 띈 ‘아버지 회고’ 파일을 발견하고 먼지를 턴다. 그리고 다시금 이 얄미운 게으름과 건망증을 탓하며 종주먹질을 머리에 몇 번 퍼부은 후 시작을 해 본다. 시작이 반이 될지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간만 못함일지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계속 후속 작업을 하고 계신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담벼락에 올리다 보면 또 이어짐이 있지 않을까.


함경북도 남양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도문이라는 도시가 있다. 1939년 초여름 이곳 도문시의 어느 소학교에 운동회가 열렸다. 연신 호루라기를 불면서 아이들의 달음박질을 챙기던 체육 선생 앞으로 새까만 일본 순사가 다가왔다. 아이들 건사에 정신없던 체육 선생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순사는 싱긋 웃으면서 체육 선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본 순사의 느닷없는 손길에 체육 선생은 인상을 굳혔다. 만주국이라지만 사실상 일본의 괴뢰 정부였고 일본 순사들은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일본 순사 입에서 나온 말은 체육 선생의 얼굴을 백짓장으로 만들었다.
“김우용씨. 당신이 여기 선생으로 있을 줄은 몰랐소. 그 옛날 당신이 나를 죽기 직전에 구해 줬으니 나도 당신을 한 번 살려 주겠소. 스물 네 시간 안에 도문을 떠나시오.”
체육 선생의 얼굴은 백짓자처럼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그제야 그는 순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로부터 십수년 전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이었다. 1899년생이었던 체육 선생 김우용은 십수년 전 만주 일대의 조선 청년들 상당수가 그랬듯 독립군에 가담했고 유명한 홍범도 장군을 따라다녔던 이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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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대장 비슷한 직책을 맡아 부하 예닐곱 명을 데리고 이동하던 김우용은 한 조선인 마을에서 한 나뭇꾼이 너무도 불쌍하게 두들겨 맞는 것을 목격한다. 나뭇꾼은 엉엉 울면서 자기는 밀정 아니라고, 살려 달라고 빌고 있었는데 무슨 확신이 있었는지 마을 사람들의 매질에는 살기가 돋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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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게 탄 얼굴에 꾀죄죄한 복색, 덮어놓고 엉엉 울면서 아이쿠 아이쿠 소리만 내뱉는 품이 불쌍하여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맙세. 밀정이라고 해도 얼굴 알려져서 밀정 노릇 하지도 못할 것 아니오.” 총 멘 독립군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니 마을 사람들도 살기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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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김우용은 “네가 진짜 밀정이면 이 짓 하지 말고 숨어 살고 양민이거든 배밭에 가서 갓끈 고치지 말고 남 의심살 짓 하지 말고 살라.”고 준엄하게 훈계하고 풀어 주었다. 그런데 수십번 고개 조아리며 눈물 흘리던 그 새까만 나무꾼이 십 수년 뒤 금술 달린 제복을 입고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부르며 스물 네 시간 안에 떠나라고 통보하는 일본 경찰 간부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진짜 밀정이었다. 이름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걸 보면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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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백산 깜짝놀란 김우용은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간다. “당장 보따리 싸라.” 세간살이고 무엇이고 챙길 틈도 없었다. 영문 모르는 아이들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만삭의 아내는 불덩이를 머리에 인 사람처럼 성화를 부리는 남편의 아우성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가자는 거요.” 남편은 실성한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두만강을 건너야 돼. 스물 네 시간 안에. 내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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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족들은 보따리 몇 개만 들고 두만강을 건넜다. 3월의 두만강은 물이 줄어서 좁은 여울목은 걸어서 건널 수도 있었다. 맏딸과 두 형제의 손을 잡고 배부른 아내 건사하며 근근히 두만강을 건너 아 조선 땅 남양에 들어와서야 김우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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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만강 건너 도문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문도 도문이지만 용정의 친구들에게 기척도 하지 못하고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용정에 살던 문재린(문익환 목사의 부친) 형과는 어떻게든 기별을 해야 했다. 결혼 때부터 챙겨 준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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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용은 용정에서 아내를 만났다. 당시 함경도와 도문, 용정 일대는 캐나다 선교회가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캐나다 선교회는 보수적이었던 미국 북장로교(평안도, 황해도 담당)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조선 독립운동에도 호의를 보였다. 김우용은 캐나다선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제창병원(꽤 큰 종합병원)의 수간호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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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생이었던 아내는 본디 황해도 재령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계모가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고생이 막심했지만 그 시절에 이를 악물고 배움을 찾아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땅 용정시로 와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김우용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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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여자와 함경도 남자는 그렇게 결혼해서 옥자, 동희, 동식의 3남매를 두고 있었다. 이윽고 새롭게 터를 잡을 함경북도 남양에서 1939년 음력 6월 14일 나, 김동훈이 태어났다. 내 손위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조선 땅에 태를 묻은 셈이다. 운동회에 별안간 나타나 아버지의 이름을 읊은 일본 경찰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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