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별 윤세주

in #kr7 years ago

1942년 6월 3일 윤세주 조선의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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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송전탑 건설 문제로 한 도시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밀양. 영화 <밀양>의 제목이기도 하고 무대이기도 했던 이 도시를 영화 <밀양>의 주연 송강호는 이렇게 소개한다. “경기는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 가깝고..... 말씨도 부산 말씨고 인구는 많이 줄었고.... 뭐 사람 사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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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밀양은 우리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영웅들을 배출한 동네고 걸출한 호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지긋지긋해했던 이름 ‘의열단’은 사실상 밀양 사람들이 주도해서 만든 단체다. 단장 김원봉이 그랬고 그 죽마고우이자 김원봉에 뒤지지 않는 혁명가 윤세주, 고향의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등 많은 사람들이 후일의 ‘한나라당 도시’에 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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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윤세주의 행적은 누구에 비해서도 그 파란만장함이 처지지 않는다. 우선 그 시작은 1911년 4월 김원봉과 함께 벌인 일장기 화장실 투척 사건(?)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때 그의 나이 열 살이었다. 아홉 살 때 나라를 잃었다는 소식에 대성통곡을 했던 이 맹랑한 꼬마는 천장절, 즉 일본 천황의 생일을 위해 준비 한 일장기를 재래식 변소에 처박아 버리는 ‘거사’를 감행하여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후 저항 정신 드높은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1919년 3.1운동을 밀양에서 주동한 후 중국으로 건너간다. 궐석 재판에서 일제 재판부가 그에게 내린 형이 가장 높았을만큼 그는 ‘요주의인물’이었다.

1919년 11월 김원봉이 단장을 맡은 의열단이 조직되자 윤세주는 쌍수를 들고 함께 하기로 한다. 태극기 흔들며 만세 부르다가 쓰러져간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선연한 윤세주로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대만총독, 매국적(賣國賊),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7.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등을 다 죽여버리겠노라 칼을 가는 의열단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폭탄과 권총을 동원한 의열단원들의 테러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혼을 빼놓는 가운데 국내에 잠입했던 열아홉의 윤세주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윤세주와 동료들을 체포한 이는 악질 친일 경찰 김태석. 일찍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를 고문한 바로 그였다. 윤세주는 법정에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되어 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왜적을 선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 열 아홉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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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고향 밀양에서 사업을 하며 신간회 활동도 벌였지만 합법적이고 체제 내적인 운동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점차 항일의 기풍을 잃어 가던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엉기는 것도 갑갑했다. 신간회 밀양지회는 끝까지 신간회의 해소에 반대하긴 했지만 신간회는 끝내 해소됐고 윤세주는 다시 몸을 일으켜 중국 남경으로 향한다. 체포된지 근 10여년 만에 그는 왕년의 의열단원 동지들과 재회한다. 중국에 있던 이들이나 조선에 있었던 이나 생각은 같았다. “의열 투쟁 (폭탄을 터뜨리는 류의)만으로는 강도 일본을 몰아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민중의 힘에 의거한 무장 투쟁이다.”

1932년 윤세주는 그보다 열 살 정도 어린 후배들과 함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한다. 이 동기생 가운데 윤세주가 끌어들였던 인물이 시인 이육사다. 이윽고 그는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진영 최고의 교관이자 이론가이자 문사(文士)이자 지휘관으로 우뚝 선다. 윤세주는 독립운동가들의 소망이었던 단일정당 민족혁명당이 조직됐을 때 중앙위원이었고 기관지 편집장이었으며 당 훈련부장도 거쳐 갔다.

“우리는 오직 과감한 실천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의 수많은 동포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호응하고 도 우리의 핏자국을 따라서 해방의 대도를 향하여 매진토록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이 하여야만 비로소 중 • 한 두민족의 실질적인 연합전선을 형성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2년 동안 실속이 없는 빈 껍질의 외교활동이나 이론에 그치는 입씨름을 원치 않고, 오직 실질적으로 남북의 각 전선에 참가하여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서 공작활동에 힘썼을 뿐이다.” (조선 의용대통신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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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사자같은 인상의 열혈 투사가 그려지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이렇게 윤세주를 회고하고 있으니까. “훌쭉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집에 목소리까지도 잔잔해 도무지 용사 같아 보이지 않았다.....나는 석정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또 지지를 받는 몇해동안 그분이 역정을 내는걸 한 번도 못 봤다

그가 역정을 낸 건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 뿐이었던 것 같다. 국민당 지역에서의 활동을 주장하던 죽마고우 김원봉과도 갈라선 윤세주는 ‘북상 항일’ 즉 화북지역에 진출하여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항일 전쟁을 치르는 길을 택한다. 양자강을 건너고 숱한 산길을 지나 태항산에 이른 조선의용대를 두 팔 벌려 환영한 팔로군 지휘관은 팽덕회. 후일 중공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미군과 맞섰던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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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

그러나 태항산은 윤세주에게 마지막 무대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 사단 병력이 태항산을 공격해 들어왔고 팔로군 총사령부가 포위됐다. 이때 혈로를 뚫는 역할을 한 것이 조선의용대였다. 높은 곳에서 내리쏘는 일본군들을 향해 죽음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조선의용대는 고지를 점령하고 퇴로를 열었다. 이 퇴로로 팽덕회가 빠져나가고 오늘의 중국을 이끈 거인 등소평이 목숨을 건졌다. 난전 와중에 윤세주는 나이 든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두봉과 그 가족들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가까이에 몰려와 이곳 저곳을 뒤지기 시작하자 윤세주는 자신을 희생시켜 사람들을 살릴 생각을 한다.

윤세주는 동료와 함께 총을 쏘며 튀어나가 일본군의 시선을 분산시켰고 집중 사격을 받아 부상을 당한다. 다른 동료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는 동안 바위틈 사이에 몸을 숨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미 그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동지들이 그를 들것에 싣고 며칠 동안 행군했지만 그의 피는 그의 몸 안을 너무 많이 빠져 나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입 밖에 낸 소리는 “단결해서..... 적들을 사살하시오”였다. 1942년 6월 3일 해방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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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어 지난 뒤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준영은 한국 대학생들을 이끌고 옛 전적지였던 태항산을 방문했을 때 뜻밖의 경험을 한다. 한국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 중국인 촌로가 허둥지둥 달려온 것이다. 그는 태항산에서 있었던 조선 의용군들의 불굴의 항전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윤세주와 그와 함께 싸우다 죽은 또 하나의 조선인 진광화 (본명은 김창화)의 묘지를 수십 년 동안 돌보아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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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선인들은 중국에서도 혁명 열사로 대접받아 인근의 대처인 한단시에 조성된 혁명 전사 묘역으로 공식적으로는 이장됐으나 이장한 뒤에도 전사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묘역을 지켜 왔다는 것이다. 중국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 한다. “왜 이제야 왔습니까.” 대륙의 한 구석,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을 중국인 촌로는 어떤 사람들을 보고 느꼈기에 그토록 오랫 동안 그 감동을 잊지 못했을까.

그나마 밀양 사람 윤세주는 찾아주는 사람도 많고 밀양시에서도 꽤 신경을 써서 기념 사업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평안도 출신의 김창화는 찾아 주는 이도 없고 기억하는 이도 거의 드물다. 진광화, 본명 김창화는 중국인 촌로의 보살핌 외에는 제삿밥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없다. . 김일성의 ‘백두산 줄기’ 이외에는 사람 취급을 않는 북한에서 왕년의 ‘연안파’쯤 될 진광화에 신경을 쓸 것 같지도 않거니와 가족은 물론 후손도 없다고 했다.

일제 강점 36년 동안 그렇게 수도 없는 이들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스스로 등에 비끄러맨 깃발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불나방처럼 죽어갔다. 가끔 “국내에서 활동한 이들의 공”을 논하는 이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맹렬히 가로젓게 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 ‘국내에서 자립의 힘을 기른’ 이들의 공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과 죽음을 깡그리 바쳤던 이들의 공을 기린 뒤에야 가능한 일이겠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엇비슷하다고 우기는 것은 언어도단의 최고봉을 넘으면 넘었지 밑돌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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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를 알아가네요. 정성글에는 추천이라고 배웠습니다.

네 기억해 주십시오 그 이름... 참 멋진 남자였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윤 세 주 .

네... 밀양 남자.... 이육사가 존경하고 김원봉이 흠모한 남자. 석정 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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